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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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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오라버니와 차를 마시는 기분이에요.”

 

나나리의 말에 를르슈는 쓴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오랜만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요새 를르슈는 흑의 기사단 일로 바빴으며, 낮밤 할 것 없이 테러리스트 활동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나나리가 요즘 들어 외로워한다는 사요코의 말이 없었더라면 를르슈는 오늘밤도 클럽하우스 밖에서 보냈을 것이 분명했다.

사랑하는 나나리를 위한 싸움인데, 정작 나나리를 위해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어불성설은 없을 것이다. 를르슈는 정성껏 내린 차를 나나리의 잔에 채워주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학생회에 스자쿠가 들어왔잖아? 스자쿠한테 이것저것 알려주느라 시간이 없었어.”

“스자쿠 씨랑 지내셨군요.”

“응. 그 녀석은 달라진 것 같아도 또 여전하더라고.”

“…스자쿠 씨는 여전히 상냥하셔요.”

“맞아.”

 

나나리는 보이지 않는 앞에 놓인 잔을 조심스럽게 쥐고서는 홍차를 들이켰다. 맛있어요, 오라버니. 다정하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나나리의 말에 를르슈는 기분이 좋아졌다. 요즘 들어서 날이 선 상태로 계속 싸움에 임해있던 긴장이 조금이라도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스자쿠 씨는 어릴 때랑 모습이 똑같나요?”

“응? 음… 어릴 때랑 똑같진 않갰지. 사람은 성장하니까.”

“어떻게 변하셨나요?”

“어떻게… 라고 말해야 할까.”

“오라버니는 스자쿠 씨가 스자쿠 씨인걸 한 번에 알아보셨나요…?”

 

를르슈는 스자쿠를 재회한 곳을 떠올렸다. 독가스라고 여겨졌던 캡슐 앞에서, 를르슈를 먼저 알아본 것은 스자쿠였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소년에게서 스자쿠를 찾은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건가. 아니면, 기적적으로 변하지 않은 부분을 알아본 것일까. 

 

“글쎄….”

 

를르슈가 고민 끝에 중얼거렸다. 나나리는 금세 심각해지려는 자신의 오라버니에게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를 고민하게 만드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저는 스자쿠 씨 얼굴을 모르니까, 만약에 눈이 보이게 되면… 스자쿠 씨를 못 알아볼까봐요. 그러면 너무 속상하잖아요.”

“…아, 그렇겠구나.”

“예전에 들었던 설명으로는 초록색 눈에, 눈썹이 무척 짙고, 곱슬머리에.”

“그런 부분은 여전하지.”

“피부색은요? 여전히 햇빛에 그을리셨나요?”

“아아, 그래.”

“눈 모양은… 어떻게 생기셨을까요? 코는요? 제가 기억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까요?”

 

를르슈는 스자쿠의 얼굴을 떠올렸다. 커다란 눈이 인상적이긴 했지만 딱히 ‘이 부분이야말로 스자쿠다!’라고 말할 구석이 느껴지질 않았다. 뭐랄까, 그 녀석은 군인 일로 바빠서 학교도 잘 안 나오니 얼굴을 볼 새가 있어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떠올리는 게 괘씸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스자쿠의 얼굴을 묘사하려니 를르슈는 솔직한 심정이 입밖으로 튀어나갔다.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어. 스자쿠는… 스자쿠 같이 생겼…다고 말할 수 밖에.”

“아하하, 오라버니도 참.”

“좋아, 나나리를 위해서 내일 스자쿠를 만나면 제대로 설명할 수 있도록 해볼게.”

“정말요?”

 

기대하고 있겠다는 나나리의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나나리가 눈을 감고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게 설명해줄테니까. 그러자 나나리는 환하게 웃어주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조그맣게 감사를 전하는 여동생에게 를르슈는 기꺼이 임무를 완수하겠다고 맹세한 것이었다. 

 

* * *

 

그리고 다음날,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스자쿠의 등교에 를르슈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스자쿠가 웃으면서 를르슈에게 인사하는 것에 를르슈는 새삼 그의 얼굴이 보기 좋게 웃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를르슈?”

 

그리고 왜냐고 물을 때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도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기 좋고, 귀엽게 웃는 편이군. 를르슈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서 고개를 돌렸을 때에, 스자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를르슈를 쳐다볼 뿐이었다.

 

“를르슈, 나 쳐다보지 않았어? 그것도 꽤 오래.”

“아아, 할 일이 있어서.”

“할 일?”

“아니야. 해결 됐으니까.”

“무슨 일이었는데?”

“끈질기게. 별 거 아니니까.”

“별 거 아닌데 왜 그렇게 쳐다봐?”

“……내가 어떻게 쳐다봤는데?”

 

그러자 이번엔 스자쿠가 입을 다물었다. 를르슈를 입으로 이길 수는 없다는 걸 알고서 분한 표정을 짓는 스자쿠를 또 쳐다보고 있으면 기분이 묘해졌다. 미간이 찌푸려지면서 짙은 눈썹 끝이 모이는 것이 귀엽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귀엽군, 귀여워. 남자치고는 저런 화난 표정을 해도 귀여운 편에 속하는군. 

 

“또 쳐다보고 있잖아.”

 

스자쿠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말했다. 놀리는 거야? 를르슈는 놀릴 의도는 없었으나, 놀리듯이 말하면 다채롭게 변하는 스자쿠의 표정에 만족스러워졌다. 괜히 상큼한 미소를 지으면서 를르슈는 ‘아닌데?’라고 부정했다.

 

“역시 뭔가 있잖아, 를르슈.”

“아니라니까.”

“맞잖아.”

“아니라니까?”

“거기 두 사람, 이제 조회 시작할 거니까 앉도록 해라!”

 

때마침 들어온 담임선생님의 모습에 스자쿠와 를르슈는 자리에 앉는 수밖에 없었다. 를르슈는 오늘따라 타이밍은 모두 자신의 편인 거 같다는 생각을 하며 여유롭게 돌아갔다. 스자쿠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나나리에게 대답해줄 수 있는 답은 모두 확보했으니 이제 스자쿠의 얼굴을 쳐다보는 거에는 신경 쓸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 * * 

 

그러나, 그런 결론과 다르게 하루는 흘러갔다.

 

점심시간. 를르슈는 스자쿠와 같이 밥을 먹으면서 그의 먹는 모습을 은연 중에 관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깔끔하게 샌드위치를 베어무는 스자쿠는 를르슈의 도시락에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냥 샌드위치일 뿐이잖아, 라고 말하는 를르슈에게 스자쿠는 이런 보통의 샌드위치가 먹고 싶었다며 울 것 같이 기뻐했다.

 

‘과장하면서 말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진짜 기뻐하는 군.’

‘기뻐할 때 초록색 눈이 더 반짝거리는 편이야.’

‘먹을 때에는 입을 다물고 소리 없이 삼키고.’

‘소리 내서 웃을 때에는 가지런하게 난 이가 보이는 정도.’

 

나나리에게 전할 말들을 속으로 정리하면서,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다음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맛있게 먹는 스자쿠의 모습을 보면서 괜히 자신이 뿌듯해졌다. 

 

5교시. 점심시간이 지나고 첫 수업인 5교시에는 졸고 있는 스자쿠를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졸지 않으려고 있는 힘껏 미간을 찡그린 채로, 하지만 곧 느슨하게 풀리는 미간은 그가 긴장을 풀고 꿈나라로 향하려고 하는 것을 알게 했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학생들 사이로, 옆자리에 앉은 스자쿠의 모습은 좀 더 눈에 띄는 것 같았다. 

지루한 철학 교사의 설명 사이로 를르슈는 졸고 있는 스자쿠를 한동안 멍하니 쳐다보았다. 다부지게 다물린 스자쿠의 입술이 작게 하품하는 것에 저도 모르게 하품이 나왔다. 팔자 좋구나. 너도, 나도.

 

6교시는 체육이었다. 를르슈는 빠지려고 했지만 오늘은 자율연습이라는 말에 굳이 결석을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산하고 있지만 여유롭게 출석일수를 채우는 편이 좋으니까.

를르슈는 스탠드에 앉아서 자율연습이라는 핑계로 자기들이 하고싶은 축구를 하는 남학생들을 바라보았다. 를르슈는 안 뛰어? 스자쿠가 를르슈를 불렀지만 리발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를르슈는 후보군이야~ 화이팅 하자구, 스자쿠! 를르슈가 후보 선수라는 말에 스자쿠는 아아, 하고 뭔가 납득한 거 같았다. 뭘 납득하고 있는 거야, 젠장. 축구는 내 장르가 아닐 뿐인데. 를르슈는 울컥 화가 났지만 땡볕을 달리는 것보단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축구하는 스자쿠를 실컷 보았다. 원체 몸 쓰는 일에는 발군인 그 체력이 축구를 할 때에는 매섭게 빛이 났다. 벌써 몇명을 제친 거야? 독주하는 스자쿠를 보며 달려들던 수비수들이 튕겨져 나가는 것에 를르슈는 놀라워했다.

공을 들고서 상대편의 골문까지 뚫고가는 스자쿠의 눈은 매섭게 빛이 났다. 커다란 눈, 집중한 탓에 좁혀진 미간, 몸싸움에서 지지 않고 다 이겨내는 승부욕이 를르슈가 있는 곳까지 뜨겁게 느껴졌다. 게임은 스자쿠가 다 끌고 갔다. 처음 세 골까지는 긴장하면서 본 를르슈였지만, 스자쿠가 일곱번째 골을 넣을 무렵에는 하품이 나왔다. 

 

* * * 

 

방과 후에는 학생회에 모이는 시간이 있었다. 멤버들을 소집해놓은 미레이가 정작 보충수업으로 빠졌기에, 다들 수다를 떨다가 헤어지는 이 모임에 그저 웃다가 나갈 뿐이었다. 셜리가 제일 먼저 수영부 일이 있다면서 나갔고, 리발도 오늘은 바쁘다면서 나갔다. 카렌은 평소대로 결석. 남은 것은 스자쿠와 를르슈 뿐이었다.

언제 또 학교에 올지 모르니 숙제를 미리 해두고 싶다던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가 그 숙제를 도와주고 있었다. 낮의 철학 시간에는 졸고 있던 주제에, 를르슈의 설명에는 집중하며 받아적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히죽 웃음이 났다.

 

“또 웃어, 를르슈.”

“응?”

“방금 전에도 웃었잖아, 나 보면서.”

“아… 그랬어?”

“응. 그랬어.”

“…뭐, 그런 거지.”

“뭐가 그런 거야?”

“그냥 웃을 수도 있지. 뭐가 그렇게 신경 쓰여?”

“내 얼굴이 뭔가 웃겨?”

 

웃기기는커녕 귀여워서 웃을 뿐인데. 를르슈는 그것을 입밖으로 냈다가는 꽤 곤란할 것을 직감했다. 대충 둘러대야지.

 

“웃기진 않아. 그냥… 보기 좋다고 생각했을 뿐.”

“……응? 무슨 소리야, 그게.”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자, 다음 문제에 집중해.”

“집중이 될 리가 없잖아.”

 

스자쿠는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면서 중얼거렸다. 

 

“를르슈, 아침에도 계속 쳐다봤지? 왜 쳐다봤어? 무슨 할 일이었어?”

“별 거 아니라니까.”

“별 거 아닌데 왜 말을 못해?”

 

그러고보니 정말, 왜 말을 못 하는 걸까. 그냥 스자쿠를 놀리는 것이 꽤 즐거워서 그런 걸까. 놀림 당하는 스자쿠가 표정을 바꾸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긴 했다. 하지만 더 놀렸다가는 이 녀석도 어지간히 참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슬슬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으려나….

 

“나나리가 네 얼굴을 잘 모르니까, 알고 싶다고 해서.”

“나나리가?”

“응, 그래서 하루 종일 좀 쳐다본 것 뿐이야.”

“……정말 그거 뿐이야?”

“그래.”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나리의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던 듯 싶었다.

 

“아니, 나는 네가 그렇게 쳐다보길래….”

“응?”

“…아니야.”

“뭐가?”

“아니라니까.”

“뭐가 아닌데?”

“아니니까 말 안 해.”

 

아침의 실랑이를 반대로 당하는 기분이었다. 를르슈가 한 번 더 캐묻고, 스자쿠가 대답하지 않으면 크게 화를 낼 생각이었을 때, 스자쿠는 답지 않게 머리를 쓰며 나나리의 이름을 한 번 더 꺼냈다. 두 남자 사이에서 어릴 적부터 나나리는 무언의 타협점 같은 것이었다.

 

“나나리한테 뭐라고 설명해줄 거야?”

“네 얼굴?”

“응.”

“…뭐, 귀엽게 생겼다?”

“……내가 귀엽다고?”

 

스자쿠는 황당한 듯이 말을 따라했다. 그리고 를르슈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리고 보기 좋다고.”

“보, 보기 좋은 데가 어딘데?”

“예를 들면… 음, 웃을 때 눈이 반으로 접혀서 휘어지는 모양이라던가, 말할 때에도 입꼬리가 늘상 올라간 부분이나. 아, 그리고 너 뭔가 먹을 때 되게 깔끔하게 한입 먹는 거도 좋아보여.”

“…응?”

“또 집중할 때에는 약간 인상 쓰는 것도 진지해보이는 편이고….”

“……응.”

“부끄러움 탈 때에는 귀부터 빨개지는 거는 좀 웃기긴 한데.”

“뭐?!”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전해줬더니 스자쿠는 귀를 가리면서 를르슈를 노려보았다. 이건 나나리한테 말하지 않을게. 당연하지! 앞에 귀엽다고 말한 것도 말하지 마! 스자쿠가 드물게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 를르슈는 장난에 성공한 어린 아이처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