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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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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자모브 주의

 


 

 

 

를르슈를 만나고 난 뒤에, 비가 오는 밤에 스자쿠는 오랜만에 섹스를 했다. 상대는 술집에서 만난 베타 여자였다. 보기 드문 알파네, 하고 스자쿠를 유혹하는 것에 더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여자의 가슴을 움켜쥔 채로 좋을대로 움직이고 있으면 헐떡거리는 숨소리 사이로 자꾸만 를르슈가 떠올랐다.

스자쿠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것은 오히려 역효과였다. 지금 섹스하고 있는 상대를 를르슈로 착각하게 될 것 같았다. 아니, 착각하고 싶었던 걸지도. 스자쿠는 크게 한 번 허리짓을 하고서 콘돔 안에서 사정을 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의 하얀 등, 흔들리는 가슴 같은 것을 보면서 스자쿠는 미간을 찌푸렸다. 스자쿠에게 섹스는 스포츠 같은 것이었다. 성욕을 푸는 데에 보다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운동이었다. 그런 것에 상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를르슈를 겹쳐보려고 했을까.

스자쿠는 열이 점점 식어가는 몸을 느끼며, 사정한 콘돔을 묶어서 버렸다. 여자가 그것을 보더니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그냥 해도 됐는데. 어차피 안전한 날이거든.”

“괜한 짓은 하지 말자는 주의라서.”

 

다음 콘돔을 꺼내서 덧씌우자, 여자는 알파는 역시 다르네에, 하고 말끝을 늘리며 말했다. 다리를 벌리는 여자 사이로 자리 잡은 스자쿠는 이번엔 눈을 부릅뜨고 섹스를 했다.

를르슈를 그렇게 보면 안 된다. 하지만 이미 그에게 끌리고 있는 것은…. 한참 힘들 때를 파고드는 비겁한 짓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건 반칙이야. 룰에서 어긋난 거라고.

여자의 높아지는 신음과 스자쿠의 차가워지는 머릿속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사정하고 나서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를르슈의 반짝이는 왼손 약지의 반지 뿐이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스자쿠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스자쿠는 있는 힘껏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운전을 하다가도 찾아가고 싶거나 만나러 가고 싶다는 충동을 참아가면서, 스자쿠는 또다시 보름을 보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만나지 않는다면 아무렇지 않게 마음이 멀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정확히 보름이 지났을 때, 를르슈가 군부에 찾아왔다.

 

“잘 지내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할 거 같아서….”

 

를르슈는 직접 만든 쿠키와 레몬청 같은 것을 잔뜩 꺼내며 말했다. 를르슈가 면회를 왔다는 이야기를, 스자쿠는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를르슈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진짜 왔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마주한 를르슈는 여전했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얼굴색이 밝아보였고, 하얀 셔츠 위로 겹쳐 입은 베이지색 가디건 같은 것이 화사해보였다. 스자쿠는 그가 꺼내놓은 쿠키와 레몬청을 받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오셨는데 다른 사람들한테도 인사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뇨, 스자쿠 씨가 전해주세요.”

“군부 내라고 해도 를르슈 씨를 아는 사람들이니까 괜찮을 텐데. 아니면 다들 불러올까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더 만나면, 뭐랄까.”

 

—그 사람만 없다는 게 더 실감날 거 같아서요. 

를르슈는 스스로를 달래는 듯한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스자쿠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아직 그는 남편을 잃은지 일 년도 되지 않았다. 그래, 한껏 슬픔에 젖을 때다. 스자쿠는 죄송하다는 말을 하며 자리에 도로 앉았다.

 

“죄송할 것까진 없어요. 오히려 마음 써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저만 만나도 괜찮으시겠어요?”

“스자쿠 씨라면 잘 전해주시겠죠, 뭐.”

 

두 사람 사이에서는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애초에 죽은 남편의 부하직원과 죽은 상사의 아내 관계에서 할 말이 많을 수가 없었다. 스자쿠는 침묵 속에서 그가 싸온 쿠키를 만지작거리다가 먹어도 되냐고 물었다. 물론이죠, 드세요. 레몬티도 따뜻하게 해서 드시면 좋아요.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전기포트에 물을 끓여왔다.

투박한 머그잔에 를르슈가 말하는 대로의 비율로 레몬티를 만들어 먹었다. 초코칩이 박힌 쿠키도 먹었다. 스자쿠는 먹고, 를르슈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맛있네요.”

“그런가요? 오랜만에 만들어서 잘 됐는지 걱정이었는데.”

“파는 것보다 더 맛있었어요.”

“칭찬 고마워요.”

 

스자쿠가 먹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를르슈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웃는 얼굴에 스자쿠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웃었다. 면회는 정해진 시간이 지나고, 를르슈는 돌아갔고, 스자쿠는 제자리로 왔다.

자리에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 * * 

 

“너 미쳤어?”

“아니까 조용히 해….”

“네가 좀 파란만장하게 살아왔다고 해서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아나봐? 야, 좋아할 사람이 따로 있지!”

“조용히 하라고….”

“하하, 그래. 카렌. 목소리 좀 낮춰줘.”

 

높아지는 코우즈키 카렌의 목소리에 지노 바인베르그가 뒤늦게 그녀를 말렸다. 올해 말에 결혼을 앞두고 있는 커플을 쌍으로 끼고서 스자쿠는 술을 잔뜩 퍼부었다. 섹스를 진탕 하고, 마음을 저 깊숙이 가라앉혀도, 를르슈를 향한 마음은 계속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차라리 타인에게 쓴소리라도 듣는 게 어떨까 싶어서 친한 카렌과 지노에게 상담을 했다. 유쾌한 술자리는 이내 윽박지르는 카렌과 우울함에 빠져드는 스자쿠의 모습으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뭐… 확실히 고민될만하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그런 관계면 말이야.”

“응. 엄청 고민이야.”

“고민할 게 있어? 너 그거 제정신 아닌 거야.”

“제정신 아닌 거 같아, 나도.”

 

달래주는 지노와 쏘아붙이는 카렌 사이에서 한참동안 담가졌던 스자쿠는 결국 어느쪽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로 술을 들이붓고만 있었다. 눈을 감아도 아른거리는 를르슈의 모습, 초커를 한 목덜미, 손가락에 끼워졌던 반지, 환하게 웃던 미소. 스자쿠는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마른 세수를 했다.

 

“카렌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스자쿠도 좀 여유를 갖고 다가가는 건 어때?”

“여유?”

“응. 지금 스자쿠도 혼란스러우니까 제대로 못 보는 거일 수도 있잖아. 솔직히 스자쿠도 상사를 잃은지 얼마 안되었고, 서로 힘든 처지에 본 거니까.”

“그래… 어쩌면 흔들다리 효과 같은 거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걸 수도 있어.”

“흔들다리 효과?”

 

지노와 카렌의 말에 스자쿠는 얼굴을 쓸어내리던 손을 멈추었다. 여유를 갖고, 다가간다. 어쩌면 흔들다리 효과일 수도 있다. 착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하지만 이렇게까지 갖고 싶은 오메가에 대한 충동을 착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스자쿠는 속으로 그런 질문을 내던졌다. 상사와 각인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그 목덜미에 이를 세울 수 있는게 자신 뿐이길 원하게 되고, 왼손 약지의 반지를 어디론가 내던지고 싶은 이 충동 같은 것도. 

흔들다리 효과의 착각일까?

집으로 돌아온 스자쿠는 텔레비전을 켜둔 채로 소파에 앉았다. 텔레비전의 소음으로 머릿속을 비워낼 생각이었지만 사고의 연쇄는 끊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를르슈에 대한 생각, 도덕, 의리, 배신, 이런 것들이 뒤엉켜서 스자쿠의 입가를 뒤틀리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