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http://very2ndplace.com/CG3/5749
를르슈의 자기소개까지 끝나고 나서 스자쿠(소년)과 ‘폐하’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를르슈는 최대한 선량하게 웃어보이려고 했지만 굳은 얼굴은 쉽게 미소가 지어지지 않았다. 여동생과 각별한 오빠라는 것도 어필이 되었을까. 미안하다, 나나리, 이 오라버니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구속복 차림의 어른 둘을 바닥에 무릎을 꿇려놓고서, 스자쿠(소년)와 ‘폐하’는 등을 돌려 저희들끼리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를르슈와 스자쿠(어른)의 처우를 정하고 있을 것이다.
무릎이 아픈 를르슈는 고개를 돌리다가 스자쿠(어른)와 시선이 마주쳤다. 스자쿠(어른)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이 와중에 인사를? 정말 쓸데없는 곳에서 성실했지만, 이상한 곳에서는 천연인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람페르지 씨. 아, 방금 전에 자기소개 잘 들었어요.”
“아, 네. 쿠루루기 씨. 저도… 잘 들었습니다.”
“여기 상황극이 되게 리얼하지 않나요? 절 닮은 아역은 어디서 구한건지 모르겠지만.”
“글쎄요. 이거 아마, 상황극은 아닌 것 같습니다.”
“네?”
스자쿠(어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 설마 이 상황을 진짜 믿는 거예요, 람페르지 씨? 스자쿠(어른)가 더듬거리며 하는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 저 두 사람이 홀로그램이나, 아니면 그냥 배우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혹시 방금 전에 꼴사납게 넘어진 장면이 전국에 방송되는 게 걱정되시면 편집할 때 잘라달라고 부탁한다거나! 그, 그런 거 있잖아요?”
“꼴사납게…는 아니죠! 보통으로 넘어진 겁니다, 보통!”
“아무튼요! 이 상황이 진짜일 리가 없다는 게 중요한 거잖아요.”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정교해요. 이 상황이 가짜라면 굳이 저와 당신을 납치해서, 우리 둘을 닮은 아역으로 연기를 시키는 게 무슨 이득이 있죠? 일반인을 상대로?”
“음……. 람페르지 씨랑 저는 우선 잘생겼으니까? 수요는 있을 법해요.”
“진짜 그런 자신감,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설마 본인이 추하다거나 못생겼다거고 생각하는… 혹시 자존감이 낮으신 편이세요?”
“당신 보단 높을 걸요?”
“저도 그런 생각으로 우리 둘이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쿠루루기 씨는 자의식 과잉이라는 생각 안 들어요?”
“만사에 긍정적이어서 좋다는 사내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를르슈와 스자쿠(어른)가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스자쿠(소년)와 ‘폐하’는 세상 심란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를르슈, 기어스로 저 둘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하자. 아무래도 30살의 우리들이라는 말은 거짓말 같아.”
“그게 맞는 방법이겠지만, 만에 하나 저 둘이 진짜 30살의 우리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예를 들어서… 어떤 세계관의 우리들이라고 쳐. 내가 걸어버린 기어스로 인해서 저 둘이 이 세상의 이레귤러가 되어서, 제로레퀴엠에 영향을 미친다면 어떡하지?”
“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잖아. 뭘 망설이는 거야?”
“망설이는 게 아니라 신중하게 하고 싶은 거다.”
“만약 예상 밖의 상황이 와도 돼. 그때를 위해서 내가 있잖아, 를르슈.”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야말로 제로레퀴엠에 영향이 있다고!”
“그럴 일이 없도록 네가 건 기어스를 쓸 테니까.”
“너는 그 힘을 너무 과신하는 경향이 있어!”
“너한테 그런 이야기 듣고 싶지 않아.”
‘폐하’는 망설이고, 스자쿠(소년)는 부추기고 있을 때였다. 잠겨있던 문이 열리고 C.C.가 들어섰다. 를르슈는 이 수수께끼의 상황을 풀어줄 그녀의 등장이 반가우면서도, 어차피 이 사건 또한 그녀와 관련된 쓸데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었다. C.C.는 울그락불그락하는 를르슈의 표정 변화에도 아무렇지 않게 웅장한 실내를 가로지르며 걸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구속복 차림의, 무릎이 꿇린 채로 서로 아웅다웅하고 있는 30대 남자 둘과, 그 둘을 등지고서 속닥거리고 있는 10대 소년 둘을 번갈아 보았다.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C.C.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를르슈와 스자쿠(어른)는 갑자기 나타난 소녀가 자신들을 향해 미간을 찌푸리는 것에 황당함을 느꼈다.
“보기에는 나름대로 좋은 남자로 컸잖아? 뭐가 불만이지, 황제폐하와 그 기사님은?”
아하, 황제폐하와 기사였구나. 30대 남자 둘은 10대 소년들의 긴밀한 관계가 어디서 비롯되었나 싶었는데, 의외의 곳에서 정답을 얻었다. 황제 를르슈와 그의 기사인 스자쿠. 두 소년의 관계가 정립되자 를르슈의 머리에는 학창시절 어느 때의 역사수업이 떠올랐다.
‘브리타니아 제정시대의 끝물에는 를르슈 황제가 있죠. 이 황제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라는 12명의 기사단을 두는 대신에 오로지 단 한 사람만을 기사로 두었다고 합니다. 이례적으로 브리타니아 출신이 아닌 이국의 기사였다고 하네요. 이름은 쿠루루기 스자쿠, 발음에서부터 브리타니아와 다른 느낌이 들죠? 아무튼 브리타니아 제정시대는 피로 얼룩진 야만의 시대였기 때문에 시험에서는 크게 다루지 않습니다만, 요즘 들어서 드라마나 소설의 배경으로 설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설마, 진짜 브리타니아 제정시대인 걸까…? 를르슈의 비상한 머리는 이미 그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을 때였다. 를르슈가 하얗게 질려서 입술을 꾹 다물고 있을 때, ‘폐하’는 버럭 화를 내면서 구속복 차림의 소녀에게 윽박을 질렀다.
“C.C.! 그런 감상 따위 집어치우고,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해!”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겠지. 뭐, 를르슈 네가 C의 세계에서 벌인 만행에 비하면 아주 귀여운 수준의 이레귤러잖아. 여기 어른 둘은 너희들과 똑같은 영혼을 가진 다른 시간선의 존재라고 말하면 될까? 각오는 했지만 이런 일까지 일어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똑같은 영혼이라고? 저 둘의 존재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건가?”
“거기까진 몰라.”
C.C.는 고개를 돌리며 머리카락 끝을 빙글빙글 꼬기 시작했다. 를르슈(폐하)는 이마를 짚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저 제멋대로인 마녀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도 모르고…. 를르슈(폐하)의 낮은 읊조림에 C.C.는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큰 소리로 항의했다.
“넌 모든 악행의 근원이 다 나라고 생각하는구나, 를르슈?”
“아니라고 반증할 사례가 있나?”
“몇번이고 살려줬더니 배은망덕한 놈.”
“누가 살려달라고 애걸복걸이라도 했나?”
“두 사람 다 그만해. 좋아, 똑같은 영혼이어도 다른 시간선의 존재라면… 어차피 죽여도 상관없잖아? 저 둘이 밖에 나가서 제로레퀴엠을 방해라도 하게 된다면 난 지금 죽이는 게 맞다고 봐.”
스자쿠(소년)가 침착하게 말하는 것에 를르슈(폐하)와 C.C.는 싸우던 것을 멈추고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게 정답인 것 같았다. 스자쿠(소년)가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말하면서 칼을 빼들었다.
를르슈(어른)와 스자쿠(어른)는 갑자기 소년소녀 셋이서 저들끼리 떠들고 이야기를 멈추더니 대뜸 칼을 들이미는 스자쿠(소년)의 모습에 입술이 바짝 말랐다. 를르슈(어른)는 지금 상황이 비현실적이게도 타임 워프를 한 것이고, 그 야만의 시대 브리타니아 제정시대로 와버렸다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이게 뭐야, 다짜고짜 죽인다고? 그리고 스자쿠(어른)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거 진짜 칼인 거 같은데 여기서 찔려서 죽으면 아웃되는 서바이벌 게임 현장인가, 라는 생각이 일순 들었지만 진짜로 죽이겠다는 살기를 내뿜는 스자쿠(소년)의 분위기에 짓눌려서 오로지 생존본능만이 일하고 있었다.
“스자쿠, 잠깐만!”
를르슈(소년)가 그를 붙잡았다. 스자쿠(소년)의 다가오던 발걸음이 멈추었다. 를르슈(소년)를 한 번 돌아본 스자쿠(소년)는 무엇이냐는 듯 시선으로 응했다.
“만약 저 둘을 죽이게 되어서, 너와 나에게 영향이 미쳐서… 설마 지금 우리 둘도 죽는다면 어떡하지?”
“C.C.가 다른 시간선의 존재라고 했잖아.”
“그렇지만 같은 영혼이랬어. 우리 둘 중 한 명만 없어져도 제로레퀴엠은 성공할 수 없잖아.”
“……그럼 어떡하자고?”
누구를 먼저 죽여서, 만약 두 사람 중 한 명만 사라져도 제로레퀴엠은 성공할 수 없다. 그 가정을 세우고 나면 스자쿠(소년)도 골치가 아파졌다. C.C.는 그 이상은 저도 모른다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딜레마 속에 놓인 두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를르슈(어른)가 입을 열었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황제, 그리고 그의 기사 쿠루루기 스자쿠는 제가 있던 세계에서는 아주 먼 옛날의 일입니다. 역사시간에 짧게 배우는, 브리타니아 제정시대의 일부분에 불과해요.”
를르슈(어른)의 말에 를르슈(소년)는 의심하는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고, 그 다음 말을 해보라는 듯이 눈짓했다. 를르슈(어른)는 한숨을 삼키면서 말을 이어갔다.
“지금이 그 시대인 거 같습니다만…. 아, 쿠루루기 씨. 혹시 당신이 살던 때의 연도와 날짜를 알려주실 수 있나요?”
“아…! 네, 저는 XXXX년 O월 O일… 일 거예요. 아마도!”
“저와 같군요. 쿠루루기 씨와 저는 지금으로부터 아득하게 먼 미래의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우연하게도 두 사람과 영혼이 같다는 것은…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를르슈(어른)는 입이 바싹 말랐다. 영광은 무슨, 영광이라는 단어는 곧 있으면 조카라는 아기천사를 낳을 대천사 나나리의 오빠로 태어난 것을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겠지. 이런 데서 쓰일 말이 아니다. 를르슈(어른)의 말을 듣던 를르슈(소년)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설마 똑같은 영혼이라서 이 빈말 같은 작은 거짓말도 들키는 건가! 를르슈(어른)는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를르슈(어른)는 더 이상의 말을 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말을 멈춘 를르슈(어른)의 모습에 이번엔 스자쿠(어른)가 자신이 나설 차례라고 생각했는지, 입을 열고 대뜸 외쳤다.
“아, 아무것도 안하고 우리 세계로 돌아갈게!”
“뭐?”
“그게 너희한테도 좋은 거 아니야? 우리도 방법을 찾을 테니까, 살려주기만 하면 아무것도 안하고….”
“무슨 방법을 찾는다는 거지? 방법이라는 걸 입에 올리는 걸 보면, 무슨 수라도 썼나보지?”
그러나 스자쿠(소년)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스자쿠(어른)는 자신의 임기응변이 형편없었음을 깨닫고, 옆에서 시간을 벌어준 를르슈(어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인박명이라더니 30대에 죽는 것도 120세 시대에 박명이라면 박명이겠지. 스자쿠(어른)가 얼빠진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멈춰라, 스자쿠.”
“왜?”
“더 이상의 혼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우리는 제로레퀴엠에만 집중한다. 저 둘은 감옥에 가둬놓고 제로레퀴엠이 끝난 뒤에는 로이드와 제레미아에게 맡긴다.”
를르슈(소년)가 그렇게 말하는 것에 스자쿠(소년)는 이를 악물더니 칼을 내려놓았다. 스자쿠(어른)와 를르슈(어른)은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C.C.가 궁금한 게 있다면서 30대 남자 둘에게 다가갔다. C.C.! 함부로 가까이 가지 마! 를르슈(소년)가 말렸지만 C.C.는 거침없었다.
“근데 미래의 너희 둘은 무슨 사이지?”
“아무 사이도… 아닌데요.”
“저도 람페르지 씨를 여기서 처음 봐요.”
“아무 사이도 아닌 둘이 사이좋게 과거의 영혼들에게 끌려와서 이런 꼴을 당하다니, 가엾구나. 이것이 바로 카르마라는 걸까?”
“……카르마는 보통 그렇게 쓰이는 말은 아니겠죠.”
를르슈(어른)가 이 상황에도 지지 않고 빈정대며 말하는 것에 C.C.는 를르슈(소년)에게 외쳤다. 거 봐, 이거 너랑 똑같은 영혼 맞다니까, 를르슈! 를르슈(소년)는 이마를 짚고서 C.C.에게 나가라고 외쳤다. 나가, 나가라고! C.C.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방 밖으로 나섰다. 문이 다시 한 번 무겁게 철컹,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네 명만 단란하게 남은 이 웅장하고 화려한 알현실. 네 사람은 각자 똑같은 영혼을 지닌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이제 감옥에 갇히는 걸까? 스자쿠(어른)는 30년 평생 살면서 감옥에 갈 만한 짓을 해본 적은 없었는데, 미래에서 과거로 왔다는 죄목으로 갇히는 건 정말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죽는 것보단 나을 듯 싶었다. 만약 최근에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이제껏 쌓아온 운동신경으로 탈옥할 수 있다면… 아, 근데 람페르지 씨를 데리고 탈출하는 건 좀 어려울지도. 저 사람 엄청 약골 같아보이니까. 안타깝지만 혼자 도망칠까…?
를르슈(어른)는 미래에서 온 자신들에게 거래할 패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이 를르슈(소년)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속이 빤히 보이는 투명한 패를 감출 수도 없다. 감옥에서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미래를 그리워하면서 어쩌면 평생을 썩게 될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를르슈(어른)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 공지 | <부활의 를르슈> 스포일러 있는 글은 * | 2019.05.12 |
| 416 |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 2026.01.22 |
| > | Do not play the Requiem 2 | 2025.12.20 |
| 414 | tva판 스자루루 - 도시락 | 2025.12.14 |
| 413 | 이것저것 쓰다 만 것들 2025-12-11 | 2025.12.11 |
| 412 | 선생x제자 | 2025.12.11 |
| 411 | 음침 찐따 오타쿠 스자쿠 X 학원의 왕자님 를르슈 1 | 2025.12.08 |
| 410 | XX를 알고 싶은 동정 스자쿠 군♥ (를르슈 생일연성 2025) | 2025.12.05 |
| 409 | 를르슈 생일 사흘 전의 기사황제 | 2025.12.03 |
| 408 | ㅇㄴㅎ 플레이 | 2025.12.01 |
| 407 | talk to me | 2025.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