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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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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타인데이 2026

DOZI 2026.02.14 00:00 read.141 /

지노카렌 나옴

 

 

 

 

그것은 스자쿠와 를르슈가 사귄지 어느 해의 발렌타인데이를 앞둔 어느날의 일이었다. 

브리타니아인의 감각으로 를르슈는 이제까지 ‘감사한 사람들’에게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을 건네고는 했다. 어차피 나나리한테 만들어줄 겸 스자쿠한테도, 라는 것이 이제까지의 왕래였다. 스자쿠는 기쁘게 그 초콜릿을 받으면서 화이트데이를 기대해달라고 하는 것이 평소의 발렌타인데이였다. 그러나 매년 를르슈에게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을 받아온 스자쿠는 올해는 좀 더 색다르게 보내고 싶었다.

이번에는 내가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을 주는 거야! 스자쿠는 2월 초부터 발렌타인데이 가판대를 세우는 제과점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스자쿠는 를르슈와의 데이트가 없는 시간에도 부지런히 제과점이나 인터넷을 뒤져서 를르슈가 좋아할 법한 초콜릿을 찾으러 다녔다. 하지만 영 마움에 드는 것이 없었다.

이건 너무 진부하고, 이건 너무 싸구려 같고, 이건 너무 겉멋 든 기분이고. 스자쿠는 그냥 아무 초콜릿이나 를르슈에게 그냥 덥썩 쥐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2월 10일까지의 일이었다. 

그날은 검도부의 연습이 있었던 날이었다.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연습을 끝마친 스자쿠는 시계를 보고서 를르슈와의 저녁에 늦지 않기 위해서는 슬슬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샤워실에서 몸을 개운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 카렌을 만났다. 연습복 차림이 아닌 카렌은 잠깐 짐을 가지러 왔다고 했다.

 

“늦게까지 남아있었네, 너.”

“응. 오랜만에 몸 좀 풀었어. 카렌도 이제 갈 거지?”

“그래야지.”

“역까지 데려가 줄게.”

“내가 알아서 갈 건데?”

“어차피 역앞에서 를르슈 만나기로 했어.”

“으윽…. 그거 참 감사하다.”

 

조금 드문 조합이지만, 영 없을 일도 아닌 카렌과의 하굣길이 시작되었다. 아직 좀 춥네,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면서 카렌과 대화를 나누던 스자쿠는 갑자기 발렌타인데이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까, 카렌도 지노랑 사귀고 있지. 여자애니까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을 주겠지? 어떤 초콜릿을 주려나?

 

“카렌, 혹시 발렌타인데이 준비하고 있어?”

“뭐? 갑자기 무슨….”

“나 말이야, 매년 를르슈한테 발렌타이데이 초콜릿 받고 있어.”

“알고 있거든.”

“근데 이번에는 내가 주고 싶은데, 어떤 초콜릿이 좋을지 몰라서 고민 중이거든. 카렌은 지노한테 어떤 초콜릿 줄 거야?”

 

스자쿠의 말에 카렌은 어디까지 찾아봤냐고 물어봤다. A 초콜릿이랑, B 초콜릿, 그리고…. 스자쿠의 리서치는 꽤나 범주가 넓었다. 카렌은 제법 찾아본 스자쿠의 정성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스자쿠 치고는 힘냈잖아? 솔직하게 그 말을 들려주면, 스자쿠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 치고는 힘냈다는 게 뭐야? 를르슈한테 아무거나 줄 순 없잖아. 그래서 카렌은? 카렌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말했다.

 

“나는 매년 아무거나 주고 있거든. 지노는 그날 그냥 어떤 초콜릿을 줘도 좋아해. 100엔짜리를 주던, 1000엔짜리를 주던.”

“음, 생각보다 낭만이 없구나. 너네는.”

“뭐?! 너네는 얼마나 로맨틱한지 모르겠는데 이게 보통이야!”

“보통은 아닌 거 같아.”

“너네가 유난인 거라고!”

 

카렌이 씩씩거리는 것에 스자쿠는 자기가 잘못 말했다고 빌었다. 내가 눈치가 없었어. 스자쿠의 솔직한 사과에 카렌은 잔뜩 들어간 힘을 풀었다. 이런 바보한테 진을 빼서 뭐가 좋겠냐고. 카렌이 사과를 받아주는 것에 스자쿠는 활짝 웃었다. 이제 카렌 화 풀린 거지? 스자쿠의 속 없는 모습에 카렌은 괜히 다시 열이 받는 거 같았다.

 

“아무래도 좋아. 그렇게 찾아도 없으면 네가 직접 만드는 건 어때?”

“초콜릿을 만든다고? 내가?”

“를르슈도 만드는데 너라고 못 만들겠어? 그리고 들어보니까 초콜릿은 그냥 녹였다 굳혔다 하는 거라서 단순하다고 친구들도 말했던 거 같아.”

“흐음….”

“처음이라 좀 투박해도 그게 수제 초콜릿의 매력 아니겠어?”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무언가 납득한 듯 했다. 카렌은 ‘도움이 됐냐?’라고 물었다. 스자쿠는 고개를 붕붕 끄덕이면서 카렌에게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좋은 생각이 났어, 카렌! 정말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카렌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스자쿠의 말이 더 빠르게 튀어나왔다.

 

“카렌도 같이 만들자!”

“뭐?”

“지노한테 아무 초콜릿이나 주는 건 지노가 너무 불쌍하지 않아?”

“네가 뭔데 걔가 불쌍하니 어쩌니 하는 거야?!”

“아니, 물론 나도 를르슈한테 어떤 초콜릿을 받아도 기쁘긴 하지만 수제 초콜릿은 일 년에 딱 한 번 받을 수 있는 거고… 그런 감동을 를르슈한테 주고 싶어졌거든. 지노도 사실 그런 걸 기대하고 있지 않을까?”

“그건 네 추측이잖아!”

“그렇긴 한데. 그래도 카렌이 이번에 직접 만든 초콜릿을 주면 지노는 엄청 좋아할 걸?”

 

카렌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하게 말해라, 너. 그냥 혼자 만드는 거 무서우니까 그런 거잖아. 카렌의 말에 스자쿠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해맑은 웃음과 함께 말했다.

 

“맞아, 혼자 만드는 거 어려울 거 같아서! 카렌이 도와줬으면 좋겠어!”

“그냥 를르슈한테 가서 같이 만들자고 해!”

“싫어! 를르슈 몰래 만들어서 서프라이즈 하고 싶단 말이야!”

“퍽이나 되겠다.”

“카렌, 도와줘—!”

“뭘 도와? 알아서 해결해.”

 

그렇게 카렌이 돌아서려고 하는 것에 스자쿠는 한숨을 내쉬었다.

 

“카렌이 직접 초콜릿 만들어주면 지노가 진짜 좋아할 텐데….”

“그러니까 그건 우리의 문제라니까.”

“…으응. 알았어.”

 

스자쿠는 고독하고 씁쓸하고 외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응, 그럼 나 혼자 초콜릿 만들게. 혼자 만든 엉망진창의 초콜릿이라도 를르슈한테 감동을 줄 수 있을 거야. 를르슈가 엄청나게 기뻐하겠지? 항상 받기만 하는 건 미안하니까. 나도 내 나름대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고. 카렌은 이런 마음 모르겠지? 지노가 항상 카렌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안 돼. 가끔씩이라도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거야. 물론 나도 이번 초콜릿 한 번 만드는 걸로 그게 다 전해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아무튼….”

 

스자쿠가 엄청나게 중얼거리는 말들은 카렌에게 비수처럼 날아들어 꽂혔다. ‘지노가 항상 카렌의 말을 잘 들어두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안 돼’?! 그러는 너는 를르슈 말을 잘 듣고 있긴 하냐?! 뭐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과 다르게 카렌은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지노의 지극정성이 아니었으면 발전할 수 없는 연애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고작 그 초콜릿 하나로 될 수 있을까? 아니, 그래도 부담스러울 수 있잖아. 갑자기 직접 만든 초콜릿을 주는 건 지노도 싫을 지도… 아니, 아니 분명 좋아하겠지. 백 퍼센트.

 

“난 를르슈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초콜릿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니야.”

 

그건 꼭 내가 지노의 웃는 얼굴엔 관심 없는 것 같잖아! 카렌은 어느새 궁지에 몰린 자신을 느꼈다. 어느덧 역 근처에 다다른 스자쿠는 그럼 안녕, 카렌, 하고 손을 흔들려고 할 때였다. 카렌은 멀어지려는 스자쿠를 불러 세웠다.

 

“좋아! 만들자고, 발렌타인 초콜릿!”

“진짜? 언제?!”

“음, 잠깐만… 어라, 13일 저녁 말고는 안 될 거 같은데.”

“13일 저녁? 너무 아슬아슬하지 않아?”

“어차피 데이트는 14일 당일에 할 거라서 괜찮을 거 같기도 하고.”

“아, 나도 그렇게 하면 되겠다. 그럼 13일 저녁에 보는 거로. 장소는 나중에 연락해서 정하자.”

“그래.”

 

카렌이라는 발렌타인데이 초콜릿 동지를 얻은 스자쿠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나 혼자라면 절대 못 생각했을 거야. 카렌이 있어서 다행이야! 스자쿠의 낯부끄러운 말에 카렌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러던가… 아직 만들지도 않았는데 다 만든 것 같이 굴지 좀 마…. 스자쿠는 휴대폰 캘린더에 입력을 해두고서 카렌과 바이바이, 하고 인사를 했다.

이제 를르슈가 기다릴 것 같아서, 하고서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스자쿠의 등을 바라보던 카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근데 나 요리 못하는데 괜찮나? 아니, 뭐 어차피 녹였다 굳히는 거니까 괜찮지 않을까…? 아, 모르겠다. 13일 저녁에 생각하자.

 

그리고 두 사람은 12일 저녁에 이런 메시지 대화를 남겼다.

 

스자쿠: (지도 첨부) 13일 저녁에 여기 빌렸어!

카렌: 본격적이네

스자쿠: 뒷정리만 잘 해주면 된대. 13일에 점심 먹고 만나자. 준비 하고 들어가면 될 거 같아.

카렌: 알겠어

스자쿠: 그럼 내일 봐! (고양이 이모티콘)

카렌: (대충 알겠다는 이모티콘)

 

그리고 대망의 13일 저녁이 되었다.

스자쿠와 카렌은 역앞에서 만났다. 여어, 스자쿠, 점심 뭐 먹었어? 를르슈가 카레 해줬어. 진짜 안 궁금해. 물어본 건 카렌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대화를 나누고 나서, 스자쿠와 카렌은 마트에 들렀다. 발렌타인데이를 앞두고서 초콜릿을 산처럼 쌓아두고 있는 것들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이렇게 잘 만들어진 초콜릿과 경쟁해야 하는구나.”

“이제 와서 사는 건 늦었어. 우리는 우리식대로 가는 거야.”

 

처음엔 하기 싫다고 했던 카렌은 그런 것 치고는 꽤나 꼼꼼하게 재료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넉넉한 양의 판 초콜릿, 아기자기하게 꾸밀 색깔 초코펜, 일회용으로 쓸 수 있는 깍지와 틀, 기호에 맞춰서 넣을 수 있는 아몬드 같은 견과류까지. 초콜릿을 담을 상자와 감쌀 포장지도 빼먹지 않고 샀다. 그러던 중 스자쿠는 딸기를 보더니 중얼거렸다.

 

“를르슈는 딸기 좋아하는데.”

“그럼 사.”

“그럴까?”

 

그렇게 스자쿠는 딸기를 샀다. 두 사람은 묵직해진 장바구니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스자쿠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딸기 초콜릿은 어떻게 만드는지 몰라. 딸기 초콜릿 어떻게 만들어? 카렌에게 물어봐도 카렌도 알 방법이 없었다.

 

“대충 유튜브 보면 나오지 않을까? 어제 찾아보니까 설명 영상이 많더라.”

“카렌은 공부 많이 했어? 초콜릿 만드는 방법.”

“유튜브로 많이 보기는 했는데… 내가 언제나 생각하는 건데, 요리는 기세야.”

“기세?”

“어떻게든 하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완성된다, 이 말이지.”

“그거 멋있다.”

“그렇지?”

 

그렇게 두 사람은 그렇게 장바구니를 들고서 미리 빌려둔 쿠킹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꽤나 넓고 쾌적한, 화이트 톤의 예쁜 주방은 요리를 하는 것이 긴장되게 했다. 그래도 요리는 기세니까! 스자쿠와 카렌은 의기투합을 하며 초콜릿을 만들 준비를 시작했다.

스자쿠와 카렌은 열심히 판 초콜릿을 부수었다. 힘이 넘쳐나는 두 사람은 판 초콜릿을 가루로 만들 기세였다. 중탕이라는 것도 해봤다. 뜨거운 물이 담긴 그릇에 작은 그릇을 하나 띄워놓고 거기에 초콜릿을 녹이면 된대. 유튜브에 있던 설명을 그대로 읊는 카렌의 말에 스자쿠는 그대로 따라서 했다. 초콜릿은 천천히 녹기 시작했다. 아직 모양이 살아있는 판 초콜릿을 보면서 카렌이 말했다.

 

“그냥 프라이 팬에 불 켜놓고 녹이면 안되나?”

“아, 그러게? 그게 더 빨리 될 거 같은데.”

“그치?”

 

스자쿠와 카렌은 그렇게 프라이 팬 하나를 태워먹었다.(끝나고 나서 스튜디오 측에 정직하게 배상했습니다.) 초콜릿이 눌어붙고 연기가 풀풀 나는 프라이 팬을 치우고 나니 기운이 빠졌다. 판 초콜릿을 넉넉하게 사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중탕을 시작한 스자쿠와 카렌은 어딘가 힘이 없었다. 

가까스로 잘 녹인 초콜릿을 억지로 끼운 깍지가 달린 짤주머니에 넣고서 스자쿠와 카렌은 하트 모양의 틀에 짜내기 시작했다. 

 

“와, 넘친다, 넘친다!”

“아, 어떡해, 옆에 있는 거랑 붙었어.”

“카렌, 조용히 해! 지금 잘 되고 있단 말이야.”

“우와, 스자쿠, 이거 봐, 나 좀 재능 있는 거 같아.”

 

그렇게 얼렁뚱땅 초콜릿을 굳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시간은 벌써 밤 11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앞으로 30분이면 초콜릿은 굳을 것이다. 스자쿠와 카렌은 진동하는 초콜릿 냄새에 지쳐 버렸다. 이제 포장해야 하는데… 할 의욕이 안 들어. 스자쿠가 나약한 소리를 했지만 카렌도 그를 북돋아줄 힘이 나지 않았다. 그러게, 너무 피곤해.

잠깐 누워있자. 스자쿠는 그렇게 말하면서 쿠킹 스튜디오 바닥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야, 거기 더럽지 않아? 카렌이 말렸으나 스자쿠는 이미 누워버린 뒤였다. 바닥이 시원해…. 스자쿠는 뭉친 어깨가 냉찜질하는 기분이라고 말하자, 카렌도 그냥 누워버렸다. 카렌은 왜 누워? 누울 수 있는데 왜 서있어야 하지?

30분 후 알람이 울리고 나면, 바닥에서 일어난 스자쿠와 카렌은 열심히 포장을 하기 시작했다. 읏쇼읏쇼. 그건 무슨 소리야? 어라, 카렌, 치이카와 몰라? 그거 어린이 애니메이션 아니야? 너 어린이 방송도 보냐? 동심을 지키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스물 몇살 먹고 동심 지켜서 뭐하게…?

그리고 두 사람은 네모난 상자에 그나마 봐줄 만한 초콜릿을 나눠 담았다. 포장지로 감싸는 것도 일이었다. 두 개 있던 포장지 중에 하나를 크게 찢어먹고 나서야 스자쿠와 카렌은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었다.

 

“와, 두 번은 못 하겠어.”

“그러게.”

 

스자쿠와 카렌은 엉겁결에 같은 모양의 포장지로 감싼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을 가방에 넣어두었다. 지노 이 자식, 이거 받고 감동 안 하면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카렌은 초콜릿이 가방 안에서 녹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를르슈는 매번 이런 고군분투를 하고 나한테 초콜릿을 준 거구나. 스자쿠는 새삼 를르슈의 은혜에 감동을 받았다.

설거지와 뒷정리까지 마치고 쿠킹 스튜디오 밖으로 나온 스자쿠와 카렌은 이미 동지애가 싹트고 있었다. 고생했어, 카렌! 너도 고생했어, 스자쿠! 바—이바이! 안녕! 그렇게 인사를 하고 헤어진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인적이 사라지고 나서, 건물 뒷편의 그림자에서 또 다른 두 남자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오고 있었다.

 

“왜 갑자기 둘이 친해졌지? 카렌이 스자쿠 좋아하는 거 아니야?”

“재수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선배.”

“네가 카렌 간수를 잘 해야지!”

“그거 선배가 할 말은 아니죠! 스자쿠 관리를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무엇을 숨기랴. 를르슈 람페르지와 지노 바인베르그였다.

 

사건은 이러했다. 12일 저녁, 를르슈는 스자쿠와 조금 이른 섹스를 끝내고 스자쿠의 방에서 누워있던 참이었다. 를르슈 먼저 씻을래? 평소라면 같이 씻자고 달라붙을 스자쿠 치고는 담백한 권유였다. 를르슈에게 바닥에 내던졌던 셔츠 한 장을 건네준 스자쿠는 상큼하게 웃어주었다. 그 웃음이 어딘가 찜찜하게 느껴졌던 를르슈는 샤워를 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다.

를르슈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스자쿠가 홀로 있을 침대 쪽에서 메시지 수신 알림음이 울리는 것 같았다. 쟤 지금 휴대폰 보려고 나 먼저 씻으라고 한 거 아니야? 를르슈는 의심을 품으면서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러면서 샤워를 하는 내내 그 의심은 깊어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저 녀석을 실토하게 만들 수 있을까?

우선 이쪽도 태연한 척 해야지 더 숨기려 하지 않겠지.

샤워를 마친 를르슈는 스자쿠가 꺼내둔 옷으로 갈아입었다. 를르슈 다 씻었어? 스자쿠는 무엇 하나 숨기는 것 없는 사람처럼 말했다. 그렇게 굴면서 뒤에서는 또 기상천외한 일들을 벌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 것은 사랑하는 연인으로써 멈추게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침실로 돌아왔다. 그럼 나도 씻을게. 스자쿠는 어느새 침대의 시트도 갈아놓았다. 를르슈, 졸리면 먼저 자도 돼. 다정하게 말한 스자쿠가 씻으러 간 사이에, 를르슈는 의심스럽게 뒤집어 놓여진 채로 있는 스자쿠의 휴대폰을 들춰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남자친구의 휴대폰을 열어보는 것을 소위 ‘판도라의 상자’를 연다고 한다. 를르슈는 그 표현이 실제보다 부풀려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판도라의 상자는 너무 거창하잖아. 고작 휴대폰의 메시지를 보는 것 뿐인데.

스자쿠의 휴대폰 비밀번호 1205를 입력한 를르슈는 그렇게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를르슈는 세간의 그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적절하다 못해 아주 를르슈의 심정을 제대로 후벼파는 기분이었다.

카렌? 코우즈키 카렌? 그 지노 바인베르그랑 사귀고 있는 코우즈키 카렌? 

 

‘카렌이랑 만난다고? 어디를 빌려서?’

 

를르슈와의 14일 데이트를 앞두고서 13일 저녁에 여자(카렌)를 만난다고? 그것도 저녁에? 대체 왜? 그것도 사귀는 사람이 있으면서? 아니 오히려 그런 성벽이었던 건가? 서로 아찔한 스릴을 즐기는 편인건가?

를르슈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스자쿠가 씻는 소리가 끝났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휴대폰을 다시 뒤집어 놓고서 이불을 뒤집어 썼다.

 

스자쿠가? 바람을?

그것도 카렌이랑? 대체 언제부터?

 

를르슈는 13일 오후 2시까지 스자쿠와 집에서 카레 데이트를 했다. 카레를 맛있게 먹으면서 스자쿠는 오늘 저녁에 카렌을 만나러 간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흐음, 카렌이랑 만나는 건 비밀이다, 이건가. 그렇겠지. 바람은 대체로 은밀한 비밀이니까.

그리고 오후 5시 30분. 를르슈는 고민 끝에 지노 바인베르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를르슈 선배. 오랜만이네요. 방학하고 나니까 만날 일이 없네요. 아, 네, 카렌이요? 카렌은 오늘 친구랑 약속이 있다고 해서요. 네? 맞아요. 저녁에 만난다고 했어요.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뭐… 어떤 친구냐뇨. 카렌의 친구겠죠. 제가 무슨 선배도 아니고 카렌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다 감시하고 카렌의 친구들을 전부 다 알고 있는 건 좀 그렇죠. 그리고 그거 일종의 데이트폭력이에요, 선배. 자각하고는 있으신거죠? 스자쿠가 그렇다고 해서 선배까지 그러면 그거 무슨 궤변이에요. 아무튼… 네? 스자쿠를 만난다고요? 카렌이? 스자쿠를요? 왜요? 스자쿠랑 뭘 하는데요? 네? 오늘 저녁에 스자쿠랑 단둘이 만나는 거라고요? 뭐하는데요? 뭐하는지도 모른다고요? 선배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거예요, 말이 되나요? 카렌은 저랑 사귀는데 스자쿠를 왜 만나요? 아니 선배, 저 지금, 아니, 진짜, 선배, 저, 아, 그러니까….’

 

그렇게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의 지노를 불러냈다.

를르슈와 지노는 스자쿠와 카렌이 만나기로 했던 그 장소로 향했다. 회사원들이 오가는 고층 빌딩이 즐비한 동네에 스자쿠와 카렌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사귀고 있는 연인들끼리 서로 아는 사이인데도 왜 단둘이서 만나는 걸까.

그런 의문들을 를르슈와 지노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으면서 묵묵히 스자쿠와 카렌이 있을 건물의 뒷편에 앉아있었다. 아직 봄으로 넘어가기 전의 추운 한기가 도는 저녁은 금방 어두워졌다. 어두워지는 건 주변 풍경 뿐만이 아니었다. 시간은 밤 12시를 향해 가고 있는 중에도 스자쿠와 카렌은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요…?”

“나도 알고 싶어.”

“스자쿠한테 전화해보셨어요?”

“안 받던데. 카렌은?”

“카렌도 안 받아요.”

“…….”

“선배, 저 죽을 거 같아요.”

“알아서 죽어….”

 

차갑게 대꾸한 를르슈는 피워본 적 없던 담배가 무척이나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지노는 땋은 머리 끝을 손끝으로 빙빙 돌리면서 10초에 1번씩 한숨을 쉬었다. 정신 사나운 지노의 모습에도 를르슈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쯤, 스자쿠와 카렌이 나왔다. 어딘가 힘들어보이고 지친 기색의 두 사람은 그런 와중에도 눈빛만큼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바—이바이! 안녕! 두 사람은 무어라 대화를 나누더니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헤어졌다.

각자의 연인들이 정말로 둘이서 만나서 무언가를 했다는 걸 두 눈으로 보는 건 입맛이 썼다.

 

—카렌이 스자쿠를 좋아하는 거 아니야?

—스자쿠 관리를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서로 내뱉은 말을 곱씹던 를르슈와 지노는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각자 스자쿠와 카렌에게서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스자쿠?”

‘를르슈, 전화했었네. 몰랐어. 무슨 일이야?’

“아니… 그냥 뭐하나 싶어서.”

‘아, 친구랑 놀았어.’

 

그건 알고 있었다. 그 친구가 카렌이라는 것까지. 를르슈는 스자쿠가 카렌의 이야기를 해주길 바랐다. 숨기지 마, 숨기지 말라고. 우리 사이에 그런 비밀 같은 거 만들지 말란 말이야. 를르슈는 간절히 빌었지만, 스자쿠는 웃으면서 ‘오늘은 피곤해서 일찍 잘게. 내일 데이트 해야 하니까.’라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여보세요, 카렌?”

‘지노. 부재중 전화가 남아있길래. 무슨 일 있어?’

“음… 아니, 오늘 잘 놀았나 싶어서.”

‘아아, 친구랑 재미있게 놀았어.’

“재미… 있었어?”

‘응. 좀 피곤할 정도로. 아, 그래도 내일 데이트할 체력은 있으니까.’

 

좀 피곤할 정도로?

지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카렌은 어딘가 지친 기색이었지만 활기찬 목소리였다. 지노의 속도 모르고 카렌은 내일 보자, 라고 전화를 끊었다.

를르슈와 지노는 끊어진 전화를 보고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 내일 스자쿠 만나실 거예요?”

“만나야지.”

“오늘 일 물어보실 거죠?”

“물어볼 거야.”

“…전 카렌이랑 못 헤어져요.”

“나도 안 헤어져.”

 

두 사람은 그렇게 몇번이고 다짐했다. 연인의 불륜을 어떻게 눈감아줘야 할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기 때문에 다짐하는 것은 몇번을 해도 모자랐다. 를르슈와 지노는 서로를 위로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겨우 움직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느때보다 추웠다. 내일은 달콤한 데이트가 기다리고 있을 발렌타인데이인데. 어째서 계속해서 쓸쓸한 기분이 드는 건지.

 

대망의 2월 14일.

한숨도 못 잔 를르슈는 스자쿠와 만나기로 한 역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스자쿠를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어떻게 얼굴을 마주해야 할지 각오가 서지 않았다. 심란한 속을 겨우 다스리며 를르슈는 금방 도착한다는 스자쿠의 메시지를 읽었다.

 

너 카렌이랑 무슨 사이야,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까?

아니면 카렌에 대한 이야기를 흘리면서 스자쿠를 떠볼까? 어떡하지?

 

“를르슈, 기다렸지!”

“스…자쿠.”

“왜 그래?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서있고.”

 

티없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스자쿠는 어디 하나 걸리는 게 없다는 결백한 사람처럼 굴었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억지로 다짐했던 것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를 속이고 배신했겠다, 스자쿠…! 를르슈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후우, 하고 깊게 숨을 토해내고 나면 머릿속이 차분하게 정리가 되었다.

그래, 침착해야 돼. 침착하게, 침착하게…

 

“아, 맞아! 를르슈, 해피 발렌타인데이! 내가 초콜릿 준비했…!”

“이딴 거 필요없어!”

 

침착함은 잠시도 되찾을 수 없었다. 를르슈는 스자쿠가 건네려고 했던 빨간 포장지로 엉성하게 싸인 초콜릿 상자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스자쿠는 갑자기 초콜릿을 내던지는 를르슈를 보고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바닥에서 뒹구는 초콜릿들이 흩어지는 것에 스자쿠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를르슈가… 내가 만든 초콜릿을… ‘이딴 거’라고? 필요 없다고?

 

“아무리 못 만들었다고 해도 이렇게 던지는 건 너무하잖아!”

“이딴 거 받으려고 오늘 만나러 온 줄 알아?!”

“뭐?”

 

‘이딴 거’라고 두 번이나 말했어!

스자쿠는 너무 황당해서 화를 내지도 못했다. 스자쿠 답지 않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졌다. 아니, 발렌타인데이니까 오늘 초콜릿 주려고 만난 거지, 오늘 그럼 왜 만난 건데? 그냥 만나도 좋긴 하지만 우선 초콜릿을 주는 날 아니야?

스자쿠가 그런 말을 꺼내기도 전에 를르슈는 그를 다그쳤다.

 

“너 말이야, 어제 뭐했어!”

“뭐, 뭐했냐니.”

“어제 코우즈키 카렌이랑 오후 3시부터 자정이 될 때까지 뭘 했냐고!”

“아, 아무것도, 안, 아니, 그걸 어떻게…?”

“네가 나를 두고 바람을 피워?!”

 

그렇게 스자쿠와 를르슈는 역앞에서 호모치정 싸움을 벌이면서 2월 14일의 오후를 맞이했다. 땅바닥을 나뒹구는 초콜릿은 를르슈가 열받아서 다 밟아서 짓이겼다. 이딴 거로 사람 마음 갖고 놀지 말란 말이야! 를르슈의 ‘이딴 거’ 발언이 세 번이나 이어지자 스자쿠도 참지 않았다. 보자 보자 하니까 이거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뭐가 너무하다는 거야! 네가 먼저 배신한 거잖아!! 뭘 배신해? 내가?

 

“그러니까… 학생들끼리 사귀는 사이인데, 오해가 있어서, 역앞에서 서로 두들겨 패고 싸웠다고? 아니,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때리고 한 사람은 일방적으로 맞았다고? 그래서 주변에서 신고해서 우리들이 출동한 거고?”

“네.”

“아니, 뭐. 남자들끼리 사귈 수도 있지. 근데, 남들 보는 앞에서 그렇게 주먹다짐하면 요즘 같은 시대에는 데이트폭력으로 신고당할 수가 있어.”

“네….”

“그럼 절차가 복잡해지거든? 서로 고소할 마음이 없다 하더라도 문제가 심각해져요.”

“네…….”

 

역앞에서 장소를 바꿔, 경찰서에 사이좋게 자리잡은 스자쿠와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건을 짧게 정리한 경찰관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우선 처음이고 서로 오해라고 하니까 그냥 넘어가긴 하는데… 그래도 보호자가 있어야 보내줄 수 있어요. 또 나가서 싸움박질 하면 곤란하니까.”

 

그렇게 스자루루와 지노카렌은 4자대면을 하기까지 5분 전이 되었다.

그것은 곧—지금 2026년 2월 14일이 된지 16시간째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