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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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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DOZI 2026.01.22 21:23 read.14 /

쿠루루기 스자쿠가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를 사랑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 스자쿠 본인은 그렇게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좋다 싫다와 같은 호오의 문제였다면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는 아무래도 ‘좋다’ 쪽이었고, 그것이 사랑에 가까운 감정이었다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 정도의 각오가 설만큼의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라고, 스자쿠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나는 생각보다 를르슈를 좋아하진 않았구나.’하고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그와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하고 매일 같이 얼굴을 맞대고 있더라도, 스자쿠는 를르슈에 대한 감정을 사랑 쪽으로 기울일 수 없었던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데도 를르슈를 사랑하지 않는다니. 스자쿠는 감정에 둔한 자신이 이렇게 느낄 정도인데, 예민한 를르슈는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면서,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를르슈가 이 상태를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이어져왔던 무언가가 끝나버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이제까지 이어진 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확실하게 뭔가가 끝날 것 같다는 것은 예감이 아니라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그 ‘무언가’에 매달리고 있는 것은 스자쿠도, 를르슈도 마찬가지여서 아직까지도 관계는 이어지고 있는 거겠지.

스자쿠는 그러한 미련을 품고 있는 이 상태를 사랑이라고 얼버무려도 되는 걸까 싶었다. 고민 끝에 이런 생각, 를르슈의 앞에서는 티내지 말자고 결론을 내렸다. 색깔로 치자면 사랑이 아닌 것이 흰색, 사랑이라면 검은색이라고 했을 때, 스자쿠의 감정은 회색이었으므로, 그것은 순백보다 순흑에 가까웠으니까. 한 번 물든 것은 쉬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는 스자쿠로써는 당연한 결론이었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는 쿠루루기 스자쿠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이미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 둔해 터진 남자는 자기 감정 따위 한참 뒤에나 돌아볼 것이며, 지금이야 몸을 맞대고 얼굴을 마주하더라도 감정을 마주하고 나면 언젠가는 를르슈에게서 멀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스자쿠는 미련을 가지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에 대한 확실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스자쿠는 가차없이 버리는 편이었다. 미련이 없으니 손에 들어와도 기쁘지도 않을 것이고, 손에 안 들어와도 슬프지도 않을 것 같다는 것이 그의 인생이었다.

를르슈와의 관계도 그러할 것이다. 스자쿠는 를르슈를 원하지도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관계에 대해서 정의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이 그 증명이었다. 그런고로 스자쿠는 를르슈가 잃게 되더라도 슬퍼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스자쿠가 언젠가 이 관계의 정의, 자신이 품고 있는 감정의 정체, 그런 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온다면 를르슈는 버려지는 것이다. 를르슈는 그러기 위해서 스자쿠의 눈을 필사적으로 가려왔다. 스자쿠와 포옹하거나, 키스를 하거나, 섹스를 하거나… 그런 일들을 하고 있을 때에도 스자쿠에게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스자쿠와 를르슈의 관계는 를르슈의 집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는 걸, 를르슈는 잘 알고 있었다. 를르슈가 노력하지 않으면 이 관계는 끝나버리고 말 것이고, 현실을 직시한 스자쿠는 지체 없이 를르슈를 버리고 갈 것이다.

를르슈가 그런 끝이 무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스자쿠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스자쿠가 멀어지는 게 두려운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날의 섹스는 전희가 평소보다 길었고, 스자쿠의 사정도 를르슈가 2번 정도 절정에 이른 후에야 겨우 한 번이 이루어졌었다. 항상 성급하게 격렬한 것이 몸에 배어있던 를르슈는 스자쿠와의 이런 느릿한 섹스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주어지는 쾌락은 여전하다고 할 정도로 좋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절정에 시달리고 나서야 를르슈는 스자쿠의 품에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섹스라는 거친 운동을 한바탕 하고 난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체력이 남아도는 스자쿠가 물이라도 한 잔 가져다 주는 타이밍이겠지만, 스자쿠는 그런 말 대신에 를르슈를 빤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를르슈는 거칠게 갈라지는 숨소리 사이로 헐떡거리는 자기 소리만 두 사람 사이에서 울리는 것이 부끄러워졌다. 후우, 후우, 하고 숨을 고르는 를르슈의 소리를 듣고 있던 스자쿠는 를르슈의 붉어진 뺨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땀에 젖은 손끝과 촉촉한 볼이 부드럽게 마주하는 순간에, 스자쿠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를르슈는 평소 답지 않게 느린 템포의 섹스와 침묵하고 있는 지금이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확연하게 느꼈다. 하지만 그 차이를 느꼈다고 해서 불안해하는 것을 보이는 건 너무 노골적이니까. 를르슈는 아무렇지도 않게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고서 스자쿠를 불렀다.

 

“스자쿠….”

“응, 를르슈.”

“물 좀 가져다주겠어? 목이 말라.”

“알았어.”

 

스자쿠가 물을 가지러 나간 사이에 를르슈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스자쿠의 손 자국이나 그가 빨아들여 남은 울혈 자국 같은 것들이 보였다. 모두 다 아슬아슬하게 옷에 가려질 법한 곳에 남겨져 있었다. 스자쿠는 이런 부분에서 알게 모르게 철저했다. 를르슈와의 관계를 공공연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뜻 같기도 했다.

제대로 걸을 수 있을까, 싶었던 다리에 힘을 주며 를르슈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엉거주춤하게 일어선 모습과 다르게 를르슈의 걸음걸이는 욕실까지 향하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뒤에서 젤과 정액이 뒤섞여 흐르는 기분에 혀를 차게 되었지만 를르슈는 우선 욕실 문을 잠그고 샤워를 시작했다. 샤워 콕을 돌려놓고서 뜨거운 물로 몸을 적셨다. 스자쿠의 체온보다도 더 뜨거운 물이었다. 데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온도로 몸을 적시던 를르슈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의 스자쿠는 무언가 깨달은 게 아닐까. 전희도 길었고, 스자쿠의 사정도 꽤 늦었고… 그는 뭔가 생각에 잠겨서 섹스에 집중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스자쿠와의 섹스는 기본적으로 급하고 격렬했고, 한바탕 몰아치듯 쏟아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를르슈를 살피고 느긋한 여유를 가지고서 를르슈를 안았다. 그 답지 않은 섹스였다.

 

“를르슈, 벌써 씻는 거야? 물 가져왔는데.”

 

밖에서는 벌써 스자쿠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를르슈는 샤워 콕을 다시 원위치로 돌려놓았다. 귓가를 울리던 물소리가 끊겼다. 를르슈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스자쿠는 조용했다. 를르슈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나가봐야 돼. 급하게 연락이 와서. 오늘은 여기까지다.”

“연락? 누구한테?”

“슈나이젤 형님한테서다.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다고 하시니까.”

“…그렇구나.”

 

를르슈의 말은 전부 다 거짓말이었다. 슈나이젤로부터 온 연락은 없었다. 지난 번 에리어13의 폭동을 진압했을 때의 대가로 를르슈는 일주일 간의 휴가를 얻었고, 오늘은 그 첫날이었다. 스자쿠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모를 것이다. 스자쿠의 그렇구나, 라는 목소리를 끝으로 를르슈는 다시 뜨거운 물을 틀고 몸을 씻기 시작했다. 뒤에 가득 찬 스자쿠의 정액과 질척하게 젖은 젤의 흔적까지 다 빼내고 나면 몸은 나른해졌다.

를르슈는 샤워 가운을 두르고 나왔다. 스자쿠는 대충 여민 바지와 셔츠 차림이었다. 그는 욕실에서 나온 를르슈에게 물이 담긴 잔을 건넸다. 를르슈는 목이 말랐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은 듯 했다. 사양하지 않고서 물을 벌컥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뜨거웠던 몸을 단번에 가라앉히는 기분이 들었다.

바닥에 내던져두었던 옷들은, 를르슈가 씻는 사이에 스자쿠가 가지런히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를르슈는 속옷부터 입으면서 옷차림을 정돈했다. 를르슈가 옷을 입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스자쿠는 말이 없었다. 를르슈는 그와의 침묵이 싫지는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왜 이렇게 불편하게 느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 수 있다. 스자쿠가 평소와 다르기 때문에, 그 침묵도 불편한 것이다.

하지만 를르슈는 내색하지 않았다. 너 뭔가 달라진 것 같아, 라고 말하면 스자쿠는 금세 정답을 찾아내 를르슈를 내던지고 멀리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스카프를 적당히 두르고 나면 를르슈는 황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럼 재상부로 바로 가는 거야?”

“아, 아니, 우선 아리에스에 들려서 자료를 찾아보고….”

“번거롭겠네. 아, 차는 미리 불러뒀어.”

“고마워.”

 

스자쿠는 를르슈의 거짓말을 눈치챈 것 같진 않았다. 를르슈는 삐걱거리는 몸을 겨우 다잡고서 스자쿠의 저택 앞에서 인사를 했다. 스자쿠와 섹스를 하다 만 기분으로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항상 정신을 잃을 때까지 몰고 가는 섹스가 아니라, 이렇게 거짓말을 할 여유까지 생기는 섹스는 낯설고,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어딘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를르슈는 차를 타고 아리에스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본 스자쿠의 얼굴은 평소와 같았는지, 아니면 어딘가 달랐는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