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Very2ndPlace
< >

 

미오리네는 대학생이 되었다. 고등학생 시절 머물렀던 이사장실에서는 더 이상 살지 않았고, 망할 아버지가 마련해준 고급 아파트로 집을 옮겼다. 엉망이 된 이사장실에 있던 어지간한 것들은 다 버리고 나왔다. 그 이사장실에서 옮겨온 것은 딱 하나 뿐이었다. 1년 전의 7월 5일 이후 다 썩어 문드러졌던 토마토 화분. 어머니의 유산이니까, 라는 핑계를 달고서 데리고 나왔지만, 사실 어머니보다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미오리네는 토마토 화분을 볼 때마다 그녀를 떠올렸다. 슬레타 머큐리. 미오리네에게 이별을 안기고 떠난 슬레타. 다 잊은 것이라고 생각해도 슬레타를 떠올리는 것은 매번 새롭게 힘겨웠다. 버려졌다는 굴욕, 다시는 못 만날 것 같다는 좌절감, 그렇게 가슴이 아픈데도 배가 고프고 잠은 온다는 태연함이 슬펐다. 하지만 모든 것이 여전히 못 견딜만큼은 아니었다.

미오리네는 프롬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어른이 되었다.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우는 어린 여자애로 남지 않았다. 슬레타를 생각하면서 따지 못했던 토마토가 썩어가도, 결국에는 다른 화분으로 옮겨 심었던 것처럼.

미오리네는 성장한 자신이 마음에 들기도 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다. 여전히 엉망인 생활력이지만, 벌레 하나 나오지 않게 아파트를 부지런히 관리했고, 대학교 수업도 고등학생 때마냥 빠지지도 않았다. 망할 아버지의 도움 없이도 더 떳떳한 어른이 되고 싶어서, 미오리네는 성실하게 살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토마토 화분의 마른 흙에 분무기로 물을 뿌려줄 때마다 슬레타의 얼굴이 떠올랐다. 벌써 1년이 다 되어갔다. 떠오르는 그 얼굴은 처음처럼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그 윤곽이나 웃을 때 휘어지는 커다란 눈망울, 키스할 때 다정하게 다가왔던 체온 같은 것은 여전히 떠올릴 수 있었다. 성실한 미오리네의 일상 생활 속에서 슬레타의 흔적은 점점 흐려져 가면서도, 또렷하게 궤적을 남기기도 했다.

점점 잊게 될 것이다. 내일 봐요, 라고 말했던 목소리도 이제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 미오리네는 토마토 화분을 들여다보면서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이별을 받아들여, 미오리네. 그리고 다시는 사랑을 하지 말자.

 

* * *

 

7월 7일은 칠석이라고 한다. 떨어져 지내는 견우와 직녀가 일 년에 딱 한 번 만날 수 있는 날. 미오리네는 카페에서 틀어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정보를 흘려들었다. 라디오 디제이들은 잔잔한 배경음악을 깔아두고서 방정 맞게 떠들어댔다.

‘7월 7일이면 럭키 세븐이 두 번 들어간 날이죠! 분명 운이 좋아져서 헤어졌던 연인들도 다시 만나는 기적도 일어나는 게 분명해요! 정말 놀랍지 않나요? 이런 기적적인 행사를 기념하고 있는 바로 오늘, 7월 7일!’

뭐가 럭키 세븐이고 뭐가 기적이라는 건지. 미오리네는 들고 나온 노트북의 키패드를 신경질적으로 두들겼다. 괴팍한 미오리네의 행동에 옆자리에 있던 남자가 혀를 차면서 가장 먼 자리를 옮겼다. 그래, 꺼져버려. 다 당장 꺼져버려! 미오리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애꿏은 사람에게 화풀이를 할 정도로 미오리네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틀 전이었던 7월 5일에는 미오리네는 토마토 화분을 앞에 두고서 울었다. 맥주 한 캔을 까고서 훌쩍훌쩍 울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라는 말을 끊임없이 반추하며 별빛 총총한 밤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 맑은 밤 하늘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리고 어제 7월 6일 저녁, 미오리네의 아파트에 있는 에어컨이 고장이 났다. 역대급 무더위가 닥쳐온다고 하는데 에어컨은 삐익삐익 리모콘에 대한 응답 소리만 낼 뿐, 찬 바람을 뿜어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오리네는 당장 에어컨 수리 센터에 전화를 걸었지만, 무더위에 겁먹은 시민들이 에어컨을 대량으로 주문하고 수리하는 시즌이기 때문에 미오리네의 에어컨을 수리하러 와줄 사람이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오더라도 1주일 후에나 온다고 했다.

미오리네는 망할 아버지의 권력을 쓰면 고장난 에어컨을 고치는 게 아니라 새 에어컨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성실하게 성장하자고 마음 먹은 이상 그런 비겁한 수를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오리네는 얌전히 1주일을 기다리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7월 7일인 오늘, 거실의 통유리창 너머로 미오리네를 쪄죽이는 것인지 삶아죽이려는 것인지 모를 더위가 들이닥쳤다. 땀으로 흠뻑 젖은 미오리네는 평소라면 도전하지도 않았을 찬물 샤워를 20분 동안이나 했다. 몸을 아예 얼려버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개운함이 가시기 전에 재빠르게 노트북과 충전기, 휴대폰, 노트와 볼펜 따위를 백팩에 쓸어담아서 카페로 피서를 왔다.

그리고 저런 속 터질 것 같은 칠석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라디오를 듣고 있는 중이었다. 에어컨 바람을 쐬기 위해서 찾은, 미오리네가 사는 아파트 바로 앞에 있는 이 카페는 주인장이 반쯤 취미로 장사를 하는 것치고는 커피 맛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정신 사나운 라디오를 틀어놓는 취향은 미오리네를 기분 상하게 만들었다. 미오리네는 무선 이어폰을 꺼냈고, 노트북에 연결하여 아무 음악이나 틀어두었다.

하지만 틀어둔 노래마저도 미오리네의 취향이 아니었다. 요즘 노래는 상큼한 목소리와 신나는 멜로디로 이별을 산뜻하게 이야기했다. 가사를 곱씹어보던 미오리네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별은 비장하단 말이야. 미오리네는 노래를 꺼버리고 OTT 사이트에 들어가서 노트북 배터리가 다 닳아버릴 때까지 영화를 보기로 작정했다.

공포 영화는 취향이 아니고, 스릴러는 이런 정신 사나운 곳에서 볼 만한 게 아니고, 코미디는 웃을 일이 없고, 드라마나 로맨스는 지금 정신머리로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연쇄살인마 다큐멘터리를 켜놓고, 무선 이어폰은 음량을 최대로 틀어놓고서 미오리네는 고립되기를 원했다.

다큐멘터리는 무미건조하면서도 긴장감을 고조하는 나레이션이 일품이었다. 화면 편집도 몰입되게 잘 이어졌고, 사건 재연도 흐름을 깨지 않을 만큼이었다. 이런 흉악범에 대한 다큐멘터리에 대해서 미오리네는 ‘나름 나쁘지 않다’는 평을 내리면서도, 그럼에도 자신이 몰입하지 못하고 있는 이 불안감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무언가 일어날 것 같은, 불행한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벌건 대낮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흉흉한 것을 보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미오리네는 너무 화면만 쳐다보는 것 같아 멀미가 났다. 조금 시야를 환기시킬 겸 카페의 블라인드 커텐이 내리지 않은 곳을 향해 멀리 쳐다보았다.

쨍쨍 내리쬐는 햇볕, 일렁일렁거리는 여름의 아지랑이 사이로 누군가가 보였다. 믿을 수 없어서 미오리네는 두 눈을 깜빡이지도 못했다. 그 누군가는 미오리네가 그동안 계속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기도 하면서, 영원히 마주치지 않길 바라는 사람이기도 했다.

“슬레타.”

미오리네는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소리 내어 부르면 저 멀리 보이는 슬레타가 사라질 것 같았다. 사라지지 마, 라고 간절히 바라며 불렀다. 하지만 사라지기를 바란 것 같기도 했다. 그런 미오리네의 어중간한 마음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슬레타는 미오리네 쪽을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는 느낌이 들진 않았다. 그저 슬레타는 이쪽을 멀리 한 번 힐끔 보고, 다시 뒤돌아서서 여름의 골목으로 사라졌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있던 미오리네는 다시 한 번 슬레타, 하고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슬레타의 사라지는 모습은 햇볕에 늘어지는 긴 그림자로 현실적이었다. 아니, 저건 현실이야. 슬레타 머큐리가 내 눈앞에 나타난 건 현실이야.

미오리네는 이 카페를 박차고 나갈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그저 굳어있었다. 귓가에서는 기가 막힌 타이밍의 다큐멘터리 나레이션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살해 당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째서 나한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건가요, 하고 말이죠.’

어째서 나한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건가요, 하고 미오리네는 그 말을 곱씹었다. 멀리 돌렸던 시야를 다시 노트북의 다큐멘터리 화면으로 고정시켜 놓고서, 미오리네는 다 녹은 아이스 커피를 한 입 쭉 들이켰다. 밍밍하고 미지근한 아이스 커피가 더 비현실적이었다.

럭키 세븐이 두 번 들어간 7월 7일, 헤어졌던 연인들도 다시 만나는 기적이 일어나는… 라디오에서 떠들었던 말이 갑자기 미오리네에게 들이닥쳤다. 거실의 통유리창으로 쏟아졌던 햇볕처럼 미오리네를 위협했다. 

마치 운명 같이 미오리네를 덮치려고 들었다.

그러나 미오리네는 성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한 번의 이별을 겪은 몸은 침착했다. 미오리네는 다큐멘터리를 끝까지 보았고, 노트북 배터리가 한 번 방전되어 두 번째 충전으로 38% 정도 찰 때까지 기다렸고, 두 잔의 아이스 커피를 리필하여 마셨다. 도중에 무선 이어폰의 배터리가 다 되어서 다큐멘터리는 자막을 켜고 보았다. 하지만 머릿속에 남은 것은 오로지 슬레타 머큐리의 뒷모습 뿐이었다.

미오리네는 꼴이 우습게 돌아간다는 생각 뿐이었다. 어쩌면 헛것을 본 것이 아닌가 싶어서 다시 곱씹었다. 그러나 미오리네 쪽을 향했던 그 얼굴은 슬레타가 확실했다. 기억했던 것보다 차분해진 인상이 좀 낯설었지만, 슬레타였다.

미오리네는 해질녘이 되어서야 카페 밖으로 나왔다. 슬레타가 서있었던 골목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은 자신감이 없었다. 내가 본 슬레타가 환상 같은 것이었다면? 미오리네는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너무 보고 싶어서 환상을 봐버린 것이라면 미오리네는 이별을 다짐한 자신이 무너진 것을 인정한 것 같아서 싫었다.

미오리네는 흘러내리는 백팩을 겨우 다잡고서, 이제는 저녁의 가로등이 켜진 골목 사이에 서있었다. 낮의 햇살과 다른 저녁의 가로등으로 지는 그림자는 어딘가 처량했다. 미오리네는 자신의 그림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내 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뭘 확인하려고 온 거야, 나는….”

설령 슬레타가 진짜 있었다고 하더라도, 슬레타와 미오리네는 헤어진 사이이지 아닌가. 구차하고 귀찮게 집착하고 달라붙어서 어떻게 하려고? 뭘 확인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넌, 미오리네 렘블랑. 어차피 끝났는데, 전부 다 지난 일인데.

미오리네는 7월 5일부로 다 말라버린 게 아닐까 싶었던 눈물이 또 흘러나오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눈물을 닦아내면서 일그러지는 저녁 거리의 사람들 그림자를 보았다.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까 울면 창피한 건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미오리네는 흘러내리던 백팩을 바닥으로 떨구고 결국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울어버렸다.

“바보 같아, 진짜. 진짜 바보야, 나는 바보야.”

미오리네는 울음 사이로 스스로를 탓했다. 새어나가는 소리가 꼴사납다는 걸 알면서도 참을 수 없었다. 몸을 웅크리고서 훌쩍훌쩍 울고 있는 와중에, 어느 순간 주위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가로등이 꺼질 시간이 아니었고, 사람들의 발 소리는 아직도 들렸다. 미오리네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올려서 자신에게 그림자를 드리운 사람과 마주했다.

“겨우 찾았네, 미오리네 렘블랑.”

그렇게 확인하고 싶었던 슬레타 머큐리였다. 미오리네가 보았던 그 옷차림 그대로인 슬레타가 미오리네에게 손수건을 내밀면서 웃고 있었다. 가로등의 제멋대로 진 그림자에도 환하게,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1년 전의 일이 거짓말인 것처럼.

“슬레타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우선 초면이니까 자기 소개를 할까?”

에리크트 사마야. 그녀는 미오리네를 찾아다녔다고 말했다.

 

* * *

 

에리크트는 울고 있는 미오리네 렘블랑에게 어디 한적한 곳에 가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사람들이 너무 돌아다니는 이 골목에서는 편하게 이야기도 못하겠다고 말하는 에리크트의 말에 미오리네는 자신의 아파트로 갈 것을 말했다. 괜찮겠어? 에리크트의 말에 무엇이 나쁘고 괜찮은지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미오리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에리크트 사마야. 슬레타의 쌍둥이 언니가 있다는 사실을 미오리네는 잠시 잠깐 잊고 있었다. 슬레타와의 이별에만 매몰되어서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도 부끄러움을 참을 만큼 슬레타에 대한 단서를 찾았다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렇게 좋은 아파트인데 살림은 영 꽝이네, 미오리네.”

미오리네의 아파트에 들어오자마자 에리크트는 박한 평가를 내렸다. 분리수거 쓰레기는 제때 제때 버리는 게 좋을 거야. 에리크트의 잔소리에 미오리네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충 소파를 치운 뒤에 에리크트를 앉혔다.

“음료수는 뭐가 좋아? 홍차? 커피?”

“물 한 잔이면 돼. 그렇게까지 지극정성으로 손님 대접은 안 해줘도 돼.”

“나를 찾았다며? 날 찾아와준 사람한테 손님 대접을 안 하면 성에 안 차.”

“성에 안 차는 건 내가 슬레타가 아니라서 그런 거겠지.”

미오리네는 두 사람 사이에 던져지는 그 이름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에리크트에게 정말 슬레타가 아니냐고 물어보지 않아도,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다른 사람이었다. 차분하다 못해 냉정하게 느껴지는 이질적인 느낌은 저를 따뜻하게만 대하던 슬레타의 분위기와 정 반대였다.

“미오리네는 슬레타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안 궁금해?”

에리크트는 잔인한 질문을 했다. 미오리네는 골목 한 구석에서 청승맞게 울 정도로 슬레타를 그리워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이성으로 이별을 다짐했어도, 감정은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에리크트를 만나면서 확실하게 느낀 것도 있었다. 바로 슬레타를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그간 미오리네는 슬레타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 하는 것에 멈추지 않았다. 헤어진 연인의 SNS를 훔쳐보듯이 미오리네는 수성의 기업 신세에 대해서 알아보고 다녔다. 신세의 유력한 두 명의 후계자 중 에리크트가 프로스페라의 뒤를 잇기로 했고, 슬레타의 이야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델링 렘블랑이라는 아버지의 힘을 쓰면 어쩌면 닿을 수 있는 인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미오리네는 그런 치졸한 수를 쓰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은 슬레타가 그리운 마음을 꾹꾹 눌러담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궁금했던 슬레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코앞에서 펼쳐지고 있음에도, 미오리네는 시종일관 침묵이었다. 대답하지 않는 미오리네에게 에리크트는 흐음, 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에 내 얼굴 보고서 울 정도로 슬레타를 보고 싶어 했던 거 아니었어? 그런 것치고는 반응이 너무 건조한데.”

“…아니, 확실하게 알게 되었을 뿐이야.”

“참고로 말해두자면 나는 방해꾼이 아니라 사랑의 큐피드 정도야. 나한테서 찬스를 얻어가는 건 비겁한 게 아니야, 미오리네.”

“그걸 어떻게 믿어? 나는 슬레타가 직접 나한테 말하는 게 아니면 이제 믿지 않기로 했어.”

“오호, 언제부터?”

“지금부터. 에리크트, 널 만나고 나니까 더 확실해졌어. 난 슬레타를 만나야겠어.”

“무슨 수로 만날 건데? 너도 알겠지만 슬레타는 한 번 고집을 부리면 꺾이지 않는 편이야. 꽁꽁 숨겠다고 작정하면 찾을 수 없을 테고,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면 절대 입을 열지 않아. 그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불가능해.”

미오리네의 좁혀진 미간에 에리크트는 사과했다. 널 겁주려거나, 협박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 에리크트의 말에 미오리네는 시선을 피했다. 슬레타와 푸른색 시선은 똑같았지만 온도가 다른 에리크트는 저에게서 두 걸음 멀어지는 미오리네를 보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너네 둘이 헤어지게 된 건 아마 내가 원인이었을 거야.”

이런 이야기는 안 하려고 했는데, 하면서 에리크트가 입을 열었다. 사랑의 큐피드라고 말했던 주제에 에리크트는 전혀 다른 행동을 저질렀던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렇게 이야기 해도 궁금하지 않아? 이제 내가 그냥 부탁할게. 들어줘, 슬레타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내가 왜 널 찾아왔는지.”

슬레타 머큐리도 대학생이 되었다고 한다. 에리크트 사마야와 같은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미오리네가 살고 있는 곳으로부터 비행기를 타고 3시간을 가야지 있는 도시에서 산다고 했다. 슬레타가 그렇게 다니고 싶어 했던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나서, 계속 그 도시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미오리네는 어딘가 화가 났다. 영영 멀리 떠나버린 것도 아니고, 비행기를 타고 3시간, 우주로도 나갈 수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먼 거리도 아니었다. 슬레타는 그리 먼 곳으도 도망간 것이 아니었다는 게, 그런데도 1년 동안 마주칠 일이 없었다는 것이 짜증이 났다.

슬레타가 학교를 관두게 된 이유를, 사실 에리크트도 모른다고 그랬다. 다만 짐작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런 애매한 이야기로 미오리네에게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한 것이 어이가 없었지만, 미오리네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요즘 시대에 여자끼리 사귀는 거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고들 하지만, 사실은 이익집단에서는 리스크가 큰 모험은 하지 않는 추세잖아. 미오리네 너도, 그리고 슬레타 그 아이도, 모험은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 물론 슬레타는 너와 사귀고 있다거나, 사랑하는 사이라고는 한 번도 말한 적 없었지만, 너희 둘이 그런 사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건 너무 쉬웠어. 나는 그 아이를 지키고 싶었을 뿐, 헤어지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어. 정말, 단 한 번도.”

미오리네는 에리크트가 물을 한 모금 마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의 연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우리 집안에는 대대로 통하는 말이 있어. 가훈이라면 가훈이겠지. 도망치면 하나, 전진하면 둘. 말 그대로야, 도망치면 하나만 얻겠지만, 전진하면 둘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야. 나는 슬레타에게 미오리네와 함께 전진할 수 있겠냐고 물어봤어.”

“…도망치면 하나, 전진하면 둘.”

“집안을 박차고 나갈 정도로 전진하는 걸 망설이지 않았던 슬레타도, 네 앞에서는 도망치고 만 거야. 나는 슬레타가 도망치는 걸 선택한 걸 나쁘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야. 그땐 그게 어쩌면 맞았을 지도 몰라. 그 이후로 슬레타는 꽤 힘들었거든. 후계자 내정 문제라던가, 대학에 안 가겠다고 한다거나, 아무튼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했어.”

“…….”

“있잖아, 슬레타는 슬레타 머큐리, 나는 에리크트 사마야인 이유는 꽤 복잡해. 우리집의 구성원들은 서로 화목하지만, 주변에서는 그런 꼴을 못보는 편이거든. 결국 외부 사정으로 성이 갈리긴 했지만 나는 슬레타의 하나 뿐인 언니로써 동생이 망가지는 꼴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겠더라고.”

슬레타의 근황에 대해서 에리크트는 ‘망가졌다’라고 표현했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대학도 학기 중에는 잘 다녔고, 성적도 나쁘지 않았어. 방학을 맞이하고 나서도 규칙적으로 생활해. 하지만 슬레타는 망가진 거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보면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미오리네, 제발 슬레타를 만나줘.”

에리크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푸른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정중한 부탁을 하고 있었지만, 미오리네가 느끼기에는 에리크트는 미오리네의 답을 이미 알고서 형식적인 모양새만 갖춘 느낌이었다.

슬레타와 똑 닮은 얼굴 하나만으로도 미오리네가 크게 혼란스러워 한다는 것에, 에리크트는 자신의 승세를 이미 확신했다. 에리크트는 들고 온 가방에서 비행기 티켓을 꺼냈다. 미오리네는 에리크트가 내미는 가느다랗고 긴 종잇조각을 받았다. 슬레타가 살고 있다는 도시로 향하는 비행기. 지금으로부터 딱 4시간 후에 출발하는 티켓이었다.

“웃기지 마.”

미오리네는 그 티켓을 북북 찢어버렸다. 거친 모양새로 티켓을 찢어발기는 미오리네의 모습에 내내 침착하던 에리크트도 약간 놀란 눈치였다. 미오리네는 종잇조각이 흩어진 바닥을 노려보다가, 이내 에리크트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나는 누가 등 떠밀어서 슬레타를 만나러 가는 게 아니야, 내가 슬레타를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거야. 그러니까 이 비행기 티켓은 필요없어.”

“…그렇다고 찢을 건 없지 않아?”

“내 각오를 보여준 거야. 찢은 티켓 값은 돈으로 줄게.”

지갑에서 돈을 꺼내려는 미오리네를 보면서, 에리크트는 가만히 굳어있다가 이내 아하하, 하고 크게 웃어버렸다. 눈물까지 맺힌 웃음을 터뜨린 에리크트는 미오리네에게 박수까지 쳐주었다. 난데 없는 웃음에 미오리네가 당황하며 돈을 꺼내다 만 모양새를 하자, 에리크트는 됐다고 말했다.

“됐어, 대신 좋은 걸 봤으니까. 슬레타가 어디에 사는지 알려준다고 해도 미오리네는 듣지 않겠지? 사랑의 큐피드 노릇도 꽤 어렵네.”

“맞아, 나는 그런 비겁한 찬스에 기대지 않아.”

미오리네의 말에 에리크트는 또 한 번 풋, 하고 웃었다. 그래, 그거 좋네. 비겁한 방해꾼은 이만 가볼게. 에리크트는 나가면서 이 집은 다 좋은데 너무 덥다고 말했다. 에어컨이 고장났으니까 덥겠지. 미오리네는 대충 대꾸하며 에리크트를 집밖으로 배웅했다. 나가는 길은 알지? 거의 내쫓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건성인 인사였다. 에리크트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미오리네는 엘리베이터 소리가 먹먹하게 들릴 때까지 현관 앞에 서있었다. 기세 좋게 티켓을 찢고, 어디에 사는지에 대한 정보도 필요없다고 했지만, 그것은 사실 허세였다. 하지만 허세를 부리고 싶을 만큼의 욕심이 있었다.

내가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거야.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어. 나는 내 힘으로, 슬레타 너를 만날 거야.

 

* * *

 

슬레타가 사는 도시에 미오리네가 도착했을 때에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태풍의 밤이었다. 택시에서 내리고 호텔 로비까지 걸어가는 건물 밖 거리가 제법 되었다. 미오리네는 우산을 쓰는 것이 소용이 없는 비바람에 홀딱 젖어서 로비에 다다랐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옷차림으로 미오리네는 체크인을 했다. 방금 전에 전화로 예약한 미오리네 렘블랑인데요. 그러자 호텔리어가 웃으면서 안내를 했다.

호텔 방에 들어선 미오리네는 제일 먼저 샤워를 했다. 비 맞은 생쥐꼴이 이런 걸까. 미오리네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러면 이제 그간 자신이 저질러온 일들이 감당이 되지 않아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기세 좋게 자기 힘으로 만나겠다고는 했지만 미오리네는 아버지 도움 없이는 비행기 티켓 하나 끊을 수 없다는 것이 자존심 상했다. 하지만 이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용하자고 생각하면서, 미오리네는 이 도시에 도착했다. 오로지 슬레타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하지만 마음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세상의 이치였다. 미오리네는 휴대폰을 켰다. 이 호텔을 예약한 이유는 이 근처에 슬레타가 다니는 대학교가 있기 때문이었다. 방학 중이니까 학교에 나오진 않겠지만, 그래도 그 근처에서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미오리네는 이 주변을 이 잡듯이 뒤져보기로 결심했다. 에리크트가 하필이면 미오리네의 아파트 앞에 있는 골목에서 서성거렸던 것처럼, 미오리네도 슬레타의 주변에서 맴돌기로 했다.

날씨가 궃어서 오늘은 평소보다 힘들었다. 푹 쉬고 내일은 슬레타를 만날 수 있도록 해보자. 미오리네는 이불을 덮고 누웠다. 며칠 전에 혼자서 토마토 화분을 앞에 두고 울었던 것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일 수도 있다. 아니면, 어마어마한 후퇴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구차하고 비참하게 쫓아다니는 것이 발전인지 후퇴인지 가늠이 안되었다.

이런 생각 해서 뭐해? 난 슬레타를 만날 거야. 슬레타를 만나서….

미오리네는 그렇게 잠에 빠져들었다. 슬레타를 만나서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여전히 답을 알 수 없는 채로. 

 

* * *

 

7월 10일 목요일. 슬레타 머큐리는 뺨을 얻어맞았다. 햇볕이 따사롭다 못해 따가운 여름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멀리서 보였다. 뺨을 얻어맞아 돌아간 시선이 한가롭게 하늘이나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가 아니라는 걸 아는데, 맞았다는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드디어 끝이라는 해방감 때문인지 모를 이유로 슬레타는 조금 늦게 자신의 여자친구를 내려다보았다.

슬레타보다 키가 작으면서도, 당찬 성격을 가진 그녀는 슬레타에게 좋아하니까 사귀자고 말했다. 조별 과제 때 몇 번 만났던 것 뿐인데, 자신은 슬레타의 배경을 보는 게 아니라 슬레타라는 사람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속물은 아니라고 밝혔다. 슬레타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의 고백을 받았던 당시에는 피곤한 일이 많았기 때문에, 거절하는 것이 귀찮아져서 슬레타는 사귀기로 했다. 언제부터 사귀었는지는 기억도 안 났다. 몇 주, 아니면 몇 달이겠지. 그리고 7월 5일이 다가왔다.

자신이 도망쳐 두고 온 미오리네 생각이 절실하게 났던 슬레타는 7월 5일의 데이트를 미루자고 했다. 무슨 일이 있냐는 여자친구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슬레타는 7월 6일까지 잠수를 탔다. 슬레타, 무슨 일 있어? 슬레타, 걱정되니까 연락 줘. 슬레타. 슬레타에게 남겨지는 메시지들은 무겁고, 귀찮고, 피하고 싶은 내용 뿐이었다. 이런 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슬레타는 그녀의 메시지를 전부 무시했다.

7월 8일 새벽이 되자, 드물게 에리크트한테 연락이 왔었다. 같은 대학교를 다니고 있어도, 에리크트는 신세의 후계자였기 때문에 사는 곳이 달랐다. 에리를 본 것도 되게 오래 되었는데. 언제였더라. 아, 지금의 여자친구를 만나기 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를 소개시켜줄 때  이후로 만난 적이 없었다. 슬레타는 그때 에리크트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지난 번에 본 애가 아니네.’라고.

슬레타의 성벽이라고 해야 할까, 슬레타는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사귀어왔던 여자친구도, 남자친구도 많았다. 모두 다 슬레타에게 너의 배경을 보는 게 아니라 너라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슬레타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다 새로워서, 매번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과 사귀어 왔다. 그리고 그들에게 모두 차였다. 미오리네 씨한테 그렇게 해서 벌을 받고 있는 걸지도. 슬레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저에게 가해지는 이별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차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중에 온 에리크트의 연락에, 슬레타는 무시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에리. 그러자 에리크트는 기분이 좋은 듯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슬레타, 선물을 보냈어.’

“선물? 갑자기?”

‘응. 갑자기 보내고 싶어져서. 곧 도착할 테니까 받아주면 좋을 거 같아.’

“집으로 말이지? 택배로 부친 거야?”

‘으음, 그런 거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보냈으니까 받아. 이제 바빠서 끊을게.’

에리크트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선물 이야기에 슬레타는 응, 알았어, 수고해, 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무슨 선물일까. 슬레타는 전화를 끊고서 냉장고를 살폈다. 먹을 거라면 바로 넣을 수 있게 비워져 있고, 집은 넓으니까 부피가 큰 선물이 와도 문제가 없었다.

에리크트는 같은 쌍둥이라고 해도 언니는 언니라는 느낌이었다. 슬레타에게 유하게 굴 때도 있지만, 엄격할 때도 있었다. 미오리네에 대한 일이라던가, 슬레타의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미오리네 때는 잘 몰랐지만, 슬레타의 연인들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못마땅해 하는 것이 느껴졌다.

슬레타는 휴대폰을 내려두다가 메시지 어플을 확인했다. 메시지 어플에는 벌써 30통의 메시지가 쌓여있었다. 슬레타는 최근에 온 메시지를 미리보기로 확인했다. 슬레타, 나를 가지고 논 거야? 그 말에 슬레타는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플을 켜고 답장을 보냈다. 미안해요, 며칠동안 몸이 안 좋았어요. 어처구니 없는 거짓말을 보내면서도, 양심이 찔리지도 않았다. 그러자 바로 답장이 왔다. 지금은 괜찮아졌어?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슬레타는 대충 날짜를 꼽아보다가 7월 10일에 만나자고 했다.

7월 10일. 슬레타는 여자친구를 만나고, 데이트를 잘 하다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튼, 뺨을 맞았다. 살갗을 갈기는 소리는 이 지긋지긋한 데이트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느껴졌다. 충격과 해방감으로 떨떠름한 슬레타가 그녀를 쳐다보면 악다구니가 이어졌다.

“왜 사람을 속물처럼 만들어?! 왜 나만 매달리게 만드냐고! 이제 됐어, 헤어져!”

맞은 것은 처음이라 당황한 슬레타는 그렇게 길바닥에 남겨졌고, 여자친구는 훨훨 떠나버렸다. 그 와중에도 드는 생각은 하나 뿐이었다. 미오리네 씨한테 그렇게 해서 벌을 받고 있는 거야. 슬레타는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당분간 이 거리에 오는 것은 그만두자고 생각했다. 어차피 방학이고, 학교도 안 나가도 되고, 사람을 굳이 만날 필요도 없어. 슬레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집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4시간 후, 미오리네 렘블랑은 슬레타가 뺨을 맞았던 거리에 서있었다. 숨을 헉헉거리던 미오리네는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운이 좋았던 것은 미오리네가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간 식당에서 슬레타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었다. 

‘낮에 42번가에서 뺨 맞았던 애, 슬레타 머큐리였지?’

‘맞아, 근데 때리던 애는 예전에 소문난 애랑 다르던데.’

‘엄청 외로운가봐. 아직 1학년인데 벌써 소문이 엄청나.’

미오리네는 먹고 있던 파스타를 삼키는 것을 잊을 정도로 놀라버렸다. 며칠째 대학가 골목을 뒤지고 있었디만 슬레타에 대한 단서는 찾을 수 없었는데, 이렇게 난데 없는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미오리네는 휴대폰을 꺼내 42번가를 검색했다. 거리가 제법 되었다. 그리고 저 이야기의 사건이 일어난 시간이 언제인지는 모르니 슬레타가 없을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이 확률이고 실행하는 것은 도박이었지만, 미오리네는 여기까지 온 이상 걸어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대로변에서 뺨을 맞았다고? 소문이 엄청나다고?

슬레타에 대한 대화는 미오리네의 상상을 초월했다.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온 미오리네는 42번가에 서서 슬레타의 흔적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저녁노을을 따라서 길어진 그림자만이 이리저리 얽혀있었을 뿐, 슬레타를 찾을 수는 없었다.

한 발 늦은 게 아니라 엄청 늦었겠지.

하지만 이제 와서 포기하는 것도 늦었다. 미오리네는 자신이 들었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엄청 외로운, 소문이 엄청난, 슬레타 머큐리.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그 바보. 미오리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늠이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믿고 싶지 않으니까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아직 울기에는 일러.”

미오리네는 거리를 좀 더 돌아보기로 했다. 어느새 해도 지고 깜깜해진 밤이었지만, 어쩌면 슬레타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미오리네는 골목 사이사이로 뻗어있는, 간판이 화려한 술집 거리들을 바라보았다.

‘에리크트는 슬레타가 망가졌다고 했었지.’

사람이 망가지는 데에는 알코올 만한 게 없다. 미오리네는 제일 먼저 보이는 술집부터 들어가기로 했다. 술집들은 대부분 어둑어둑 했고, 조명이 있어도 사람을 분간하기에는 어려울 정도의 색감이었다. 미오리네는 일행을 찾으러 왔다면서 술집 안을 오갔다. 슬레타로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죄다 허탕을 친 거 같고, 시간을 허투루 쓴 기분이 든 미오리네는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이러다가 망가지는 건 내가 될 거 같아.’

미오리네는 이번 술집이 오늘의 마지막이라고 각오했다. 그러나 그 술집의 구석구석을 다 뒤진 결과, 이런 술집에서는 슬레타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런 골목의 술집들은 미오리네도, 슬레타도, 전혀 취향이 아닐 것이다. 애초에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찾으려고 하니까 실패한 거겠지. 미오리네가 패인을 그렇게 찾으면서 나가려고 할 때였다.

마지막 술집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니, 미오리네는 더욱 미련해지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은 실패, 내일도 어쩌면 실패, 모레도, 그 다음날도, 성공의 동그라미는 대체 언제쯤 그릴 수 있을까. 미오리네는 딱 오늘 하루만 울고 가자는 기분으로 바Bar에 앉았다.

바텐더의 어떤 술로 드릴까요, 라는 말에 미오리네는 제일 독하고 맛없는 걸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온 술을 한 입에 털어마셨다. 목구멍이 타들어가고 뱃속이 뜨끈해지는 느낌에 미오리네는 훌쩍거렸다. 훌쩍거림은 점점 커지더니 울음으로 번져갔다.

“슬레타아, 이 바보오, 슬레타아… 어디 있어어…?”

나 왜 혼자야아. 미오리네가 청승맞게 울고 있을 무렵에, 바텐더는 오늘은 그 친구를 찾는 사람이 많다며 웃었다. 웃겨? 웃기냐고. 그렇게 따지지도 못한 미오리네는 바에 기대서 거의 흐느껴 울고 있었다. 슬레타의 이름을 부르면서, 1년 간의 그리움을 토해내기라도 하듯이.

그리고 미오리네는 진짜로 토했다. 바에서는 비명이 넘쳐났다. 시끄러운 비명 소리에 미오리네는 정신을 놓았고, 바텐더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 *

 

미오리네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술을 마셨던 그 술집이, 에리크트와 슬레타가 자주 가는 곳이었다는 게 운명의 장난일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토한 미오리네를 데려가라며 바텐더는 에리크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위스키를 킵해둘 때 받아두었던 연락처 덕분에 일어날 수 있는 우연이었다. 에리크트는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내쫓았던 미오리네가 술 먹고 토했다는 이야기에 한참을 웃다가 슬레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보낸 선물, 술집으로 도착했대. 가서 받아.’라고. 집에서 한참 늘어지게 자던 슬레타는 상황과 경우를 따지는 제 쌍둥이 언니가 대뜸 선물을 받으라고 전화를 건 것이 이상해서 그 술집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슬레타는 토사물 범벅이 된 미오리네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미오리네는 목을 가누지 못한 상태로 바텐더의 손에 덜렁덜렁 들려있었다. 귀찮아서 경찰 안 부른 걸 다행으로 여겨, 그리고 청소비, 세탁비, 오늘 장사 망친 값까지…. 찾아온 사람이 슬레타인지 에리크트인지 알 바 아닌 바텐더가 읊었다. 슬레타는 대충 들고 다니는 현금과 수표를 몽땅 꺼내서 바텐더의 손에 쥐어주었다. 바텐더는 미오리네를 슬레타에게 냅다 던져주었다.

꾸엑, 하고 미오리네가 괴상한 소리를 냈다. 목소리를 들으니 정말 미오리네였다. 슬레타는 그녀를 업고서 술집 골목을 빠져나왔다. 등에 업힌 미오리네는 실컷 게워낸 토 때문에 축축하고, 독한 술 냄새가 났고, 뜨거웠다. 슬레타가 단차라도 있는 곳을 오르내리면 흐그극,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슬레타의 목을 힘껏 조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곧 힘이 부족한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슬레타의 이름만 부르곤 했다.

“슬레타, 어디로 간 거야아. 왜 못 찾…겠지…?”

미오리네의 훌쩍거리는 소리에 슬레타는 말없이 걷기만 했다. 슬레타는 미오리네에게 빈말이라도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미오리네의 앞에서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사라진 자신이 뻔뻔하게 인사를 한다는 건, 미오리네에 대한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만하고 싶지 않은 것치고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버린 것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쫓아올 수 있는 거리로 도망쳤다는 것이 미오리네에게는 더 기만처럼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슬레타는 미오리네를 업고 있는 팔에 힘을 주며 걸었다. 다리가 아파아… 저릿저릿해…. 미오리네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슬레타는 느슨하게 팔힘을 풀었다. 입밖으로 소리 내어 대답하지 않은 대신에, 마음 속으로 소리 없이 미오리네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미오리네 씨, 제가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건가요?

제가 그리워서 술을 그렇게 마셨나요? 미오리네 씨는……

저를 아직도 좋아하시나요?

슬레타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슬레타가 살고 있는 아파트였다. 미오리네를 그대로 데리고 집으로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이런 상황을 꾸민 에리크트에게 전화를 해야 할지, 슬레타는 망설이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제 미오리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으니 에리크트 편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감정은 그러지 못했다. 슬레타는 현관 앞에서 미오리네를 업고서 서성거리다가, 결국 비밀번호를 누르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미오리네는 어느새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계속 주무셨으면 좋겠는데. 슬레타는 엘리베이터의 거울로 미오리네의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물로 퉁퉁 부은 눈가가 안쓰러웠다. 이렇게 울게 만든 사람이 슬레타 자신이라는 것은 이중적인 마음을 들게 했다. 아직까지도 슬레타가 미오리네의 안에서 유효한 사람이라는 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원인은 자신이라는 점이었다.

슬레타는 집이 꽤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갔다 들어온지 한 시간도 안 되었을 텐데. 미오리네 씨를 만나고 생각이 많아져서 그런가. 슬레타는 미오리네를 거실 소파에 앉혀두고서, 신고 있던 신발을 벗겨주었다.

아래에서 쳐다보는 미오리네의 얼굴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마른 듯 했고, 눈물로 젖어있긴 했지만 여전히 예뻤다. 미오리네가 혹시 깰까봐, 슬레타는 숨도 죽여가며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마음 속으로 부르는 소리도 크게 들릴 것 같아서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이름도 몇 번 불러보지도 못했다. 얼굴을 한참 구경하고 나서야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옷이 엉망이라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본 얼굴이 너무 예뻐서 아무것도 안 보였어….’

미오리네 씨, 내가 옷을 갈아입혀주면 불편하겠지? 아니면 이대로 자는 게 더 불편할까?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엉망이 된 셔츠를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불편…할 거야! 벗겨주는 게 더 불편할… 테지만! 저렇게 입고 자는 게 더 불편…해! 분명! 슬레타가 그렇게 각오를 더한 끝에 셔츠를 벗기려고 손을 뻗었다. 

첫 번째 단추, 클리어. 

두 번째 단추, 클리어. 

세 번째 단추, 클리어. 그리고 네 번째 단추.

“뭐… 하는 거야?”

그리고 미오리네가 눈을 떴다. 최대한 땅바닥만 보고 있으려고 했던 슬레타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들어 미오리네와 마주했다. 덜덜 떨리는 슬레타의 손을 꽉 붙잡아 오는 미오리네의 손끝은 따뜻했다. 미오리네와 슬레타의 시선이 마주치는 소리가 난다면 따악, 하고 지금 이 순간 크게 울렸을 것이다. 시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슬레타는 머릿속에서 뭔가 엄청난 것이 부서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만났네, 슬레타.”

그것은 천둥번개와 같았다. 빛이 한 번 강하게 내리치고, 그 이어서 콰앙, 쿠웅, 하고 박살나는 소리였다. 미오리네의 시선은 천둥 같았고, 미오리네의 목소리는 번개 같았다. 슬레타는 제가 이제껏 지켜온 무언가가 산산조각 나는 기분에 손을 빼고 뒤로 물러섰다.

비겁하게 슬레타가 손을 빼고 달아나는 것에 미오리네가 소리를 질렀다.

“그만 도망가, 이 바보야! 어떻게 하지도 않아!”

“그, 그치만 미오리네 씨.”

미오리네는 그제야 제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에 무언가가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가볍게는 이제야 만났다는 반가움, 무거운 이름으로는 이제 참을 수 없다는 이성의 한계가 터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뒤로 움찔움찔 바닥을 기며 도망치는 슬레타에게 미오리네는 돌진했다. 우당탕, 하고 두 여자가 바닥에서 뒹구는 소리가 들렸다. 미오리네는 흐아아, 하고 소리를 내며 자신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려는 슬레타를 붙잡고서 한 대 쥐어 박을까 하다가, 달려들던 손을 멈추었다. 미오리네가 손을 멈추자, 슬레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엉뚱한 말을 했다.

“때, 때리셔도, 되는데.”

“안 때려.”

“그래도.”

“뭐가 ‘그래도’야? 너 나한테 맞을 짓 했어? 내가 널 때려야 할 이유가 있어?!”

미오리네의 말에 슬레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미오리네는 끄덕이는 슬레타의 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오늘 뺨을 맞았다고 했는데, 그 상처가 남지는 않았는지 살피게 되었다. 악을 쓰다 말고 갑자기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미오리네의 모습에 슬레타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면서 우물쭈물 말을 이어갔다.

“미오리네 씨한테… 말하지 않고 사라졌으니까, 미오리네 씨는 화가 났을 거고, 그러니까, 저는 맞아도 괜찮아요. 그걸로 미오리네 씨의, 화가 풀린다면.”

“너 말이야, 내 화가 안 풀리면 어떻게 할 건데?”

“네? 화, 화가 안 풀리면.”

“너를 거꾸로 매달아놓고 때리거나, 아파 죽을 때까지 괴롭혀도 화가 안 풀리면 어떡할 건데?”

“……사, 사라져 드릴게요.”

슬레타가 하는 말은 전부 진심이었다. 슬레타는 ‘미오리네 씨가, 용의자로 지목당하지 않게 알리바이, 세우고서, 정말로, 사라질게요.’ 같은 말을 했다. 더듬거리면서도 할 말을 다 하는 것이 정말 슬레타 다워서, 미오리네는 헛웃음이 났다. 미오리네가 혀를 차며 하, 하고 웃는 소리에 슬레타는 몸을 움츠리며 다시 한 번 뒷걸음질을 쳤다. 미오리네는 도망치는 슬레타의 손을 잡고 제 품으로 잡아 끌었다. 슬레타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네가 사라진다고 화가 풀릴 거 같아?”

“누, 눈에 안 띄게…….”

“그래서 이번엔 진짜 수성으로 도망치게?!”

“원하시는 게, 그거라면.”

“아니잖아, 바보야! 내가 너보고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말하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

미오리네는 기세 좋게 말했다. 이제 한 마디만 더 하면 미오리네의 승리라는 걸 예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오리네가 놓친 부분이 있었다면, 미오리네는 오늘 입에 맞지도 않는 술을 과감하게 마셨다는 것과, 아직 그 알코올이 분해되기까지의 시간이 좀 더 걸렸다는 것이다.

미오리네는 갑자기 울렁거리는 속과 무언가가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욱, 우욱, 으으욱. 미오리네가 입을 틀어막고 미식거리는 배를 부여잡는 것에 슬레타가 흐아아!—하고 큰 소리를 냈다. 토, 토, 토…! 슬레타가 하는 말에 미오리네는 조용히 하라고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우웩. 우우우웩. 미오리네는 위액까지 신나게 게워냈고, 슬레타는 그 토사물을 받아냈다. 사라지겠다고 실컷 떠들은 것은 슬레타였는데, 결과적으로 사라지고 싶어지는 건 미오리네 쪽이었다.

 

* * *

 

“벗은 옷은 이쪽이 두시면 돼요. 그리고 갈아입을 옷은 여기에 두고 갈게요.”

“응.”

“아, 헤어 드라이어는 꺼내둘 테니까 바로 말리셔도 돼요.”

“응.”

“그리고 칫솔도 새로 꺼내뒀으니까 편하게 쓰시면 되고요.”

“응.”

사라지고 싶은 마음과 다르게 현실은 닥쳐왔다. 차분하게 욕실에서 쓸 물건들을 알려주는 슬레타는 어딘가 여유로워 보였다. 못 볼 꼴을 보인 것은 미오리네였고, 미오리네는 눈치 없는 제 몸뚱아리가 미워서 슬레타와 눈도 못 마주치고 있었다. 그런 미오리네를 알기라도 하는지, 슬레타는 더 이상의 이야기 없이 욕실 밖으로 나갔다. 미오리네가 더 찝찝한 상태일 테니, 슬레타는 우선 물에 적신 수건으로 닦아낸 뒤, 나중에 씻을 것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슬레타에게 먼저 씻으라고 했지만, 슬레타는 ‘미오리네 씨는 손님이잖아요.’라는 말로 일축했다.

손님. 미오리네는 손님이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옛 연인도 아니고 손님이라고 말하는 그 거리감에 미오리네는 주눅이 들고 말았다. 미오리네는 욕실에 홀로 남아 우중충한 표정인 자신이 비치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다 구겨지고 토가 묻은 셔츠를 툭툭 벗어던지고, 입고 온 옷들을 하나 둘 다 벗어던졌다.

미오리네는 슬레타가 가지고 온 새 옷들을 바라보았다. 슬레타가 입을 법한 티셔츠와 반바지, 포장을 뜯지 않은 새 팬티가 가지런히 개켜져있었다. 드라이어도 바로 놓여져 있었고, 칫솔도 새로 꺼내져있었다. 정말 지극정성한 손님 대접이었다.

“…뭘 하고 있는 거야, 미오리네 렘블랑.”

미오리네는 뜨겁게 떨어지는 물줄기를 맞으면서 중얼거렸다. 슬레타를 만날 거라는 일념으로 찾아오긴 했지만,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답을 찾지 못한 채로 만나버렸다. 그저 만날 수만 있다면, 이라는 희미한 가능성을 믿고 찾아온 게 아닌데. 난 뭔가 확실하게… 하고 싶었을 거야. 미오리네는 그 확실하게 하고픈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별을 확실하게 하고 싶은 걸까, 사랑을 확실하게 하고 싶은 걸까. 슬레타는 여전히 날 좋아하고 있을까? 여전히 사람 좋은 녀석이라 내가 그냥 불쌍해서 집까지 데려온 것 같기도 하고. 에리크트 말로는 슬레타가 망가졌다고 했지만… 너무 멀쩡하게 잘 지내고 있는 거 같은데. 아냐, 방금 전까지도 대로변에서 뺨을 맞을 정도로…… 외로운 거 아니냐는 소리도 듣고…….

샤워를 마친 뒤, 새 칫솔로 양치를 했다. 그리고 주섬주섬 슬레타의 옷을 입고, 새 속옷을 입었다. 브래지어가 없다는 게 불안했지만, 미오리네는 어차피 더 한 꼴도 보였다고 생각하며 그냥 맨가슴에 티셔츠를 입었다. 미오리네는 건성으로 헤어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렸다.

다시 뽀송뽀송해지고 개운해진 몸으로 현실을 마주하고 나면, 미오리네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용기도 나지 않았고, 오기를 부릴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실패한 겁쟁이가 되어버린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미오리네가 마음 속으로 우울한 굴을 파고 있을 때, 슬레타가 욕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미오리네 씨, 다 씻으셨나요?”

“아, 응. 곧 나갈게.”

문을 열고 나가면 슬레타가 어색하게 눈을 맞추며 웃어주었다. 이제 개운하신가요? 슬레타의 말에 미오리네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슬레타가 씻는 동안 집을 구경하고 있어도 된다고 말했다. 미오리네는 얌전히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슬레타가 씻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미오리네는 멍하니 앉아있던 거실의 소파에서 일어나 슬레타의 아파트를 살폈다.

슬레타의 아파트는 거실이 크고 넓었다. 소파와 텔레비전을 빼고는 물건이 몇 개 없어서 더 비어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거실의 반대편에는 식탁과 부엌이 있었다. 식탁 위에는 꿀물이 놓여져 있었다. 그리운 슬레타의 글씨체로 적혀있는 메모와 함께. ‘속 달랠 때 드세요.’라고 적힌 글씨는 힘주어 쓴 느낌이었다. 미오리네는 그것을 한 모금 마셨다. 지나치게 달았지만 뜨거운 것이 적당히 식어서 나쁘지 않았다. 방은 세 개 있었는데 현관 쪽에 가까운 방부터 드레스룸, 침실, 서재 순으로 되어있었다.

슬레타, 이런 곳에서 사는구나. 미오리네는 슬레타의 집이 꽤나 깔끔하고 안정적인 것이 의외였다. 어딘가 나사 빠진 것처럼 구는 것 같아도 자기 생활에 있어서는 빈틈이 없어보였다. 미오리네는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침실의 문을 빼꼼히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매일 아침 이불 정리를 하는 모양인지 반듯한 침대의 모양새에 미오리네는 어딘가 안심했다.

사실은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 슬레타가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런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는 마음을 억눌러주듯이 슬레타의 단정한 침실은 마음에 들었다. 슬레타가 혼자 사는 아파트에 아무나 데려와서 뒹굴게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미오리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문을 닫고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의외네요, 미오리네 씨가 침실을 구경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깜, 짝이야. 갑자기 뒤에서.”

“저는 계속 불렀어요, 미오리네 씨, 라고.”

“……몰랐어.”

어느새 씻고 나온 슬레타가 머리의 물기를 닦으면서 미오리네의 뒤에 서있었다. 미오리네는 ‘네가 다른 사람이랑 자고 있을 것 같은 침실을 구경했어.’라는 티가 나지 않도록 눈을 굴렸다. 슬레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웃으면서 서재는 훨씬 더 재미없죠, 라고 말했다. 슬레타의 서재는 고전문학, 경영철학서나 자기계발서 같은 것이 있었고, 인상적인 것이라고는 어머니를 가운데에 두고서 두 쌍둥이 소녀들이 서있던 가족 사진 뿐이었다. 미오리네는 겨우 그것을 떠올리며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둘 다 깨끗해졌으니 잘까요, 벌써 새벽 3시에요.”

“……나는 거실에서 잘게.”

“저 집에 담요 같은 게 없어서, 아무리 여름이래도 추울 거예요.”

“너는… 괜찮아?”

“뭐가요?”

“나랑 같은 침대 쓰는 거.”

미오리네의 말에 슬레타는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묻듯이 쳐다보았다. 의식하고 있는 것은 미오리네 밖에 없었다. 미오리네는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최대한 얼굴을 숙이고서 아무렇지 않은척 ‘그럼 같이 자.’라고 말했다. 슬레타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미오리네가 침대의 오른쪽에 눕고, 슬레타가 왼쪽에 누웠다. 멀찍이서 보기만 했던 침대에 눕게 될 줄은 몰랐어서, 미오리네는 어딘가 긴장한 상태로 슬레타를 등지고 옆으로 누웠다. 슬레타의 새근거리는 숨소리와 미오리네의 긴장하여 끊어지는 숨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그런 분위기 속에, 둘 중 누구도 잘 생각이 없어보여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슬레타였다.

“미오리네 씨.”

“응.”

“저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

단도직입 그 자체였다. 슬레타는 저에게 보이는 작은 등이 움찔거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멈칫거리는 어깨가 잘게 떨리더니 미오리네가 떨리는 숨을 참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뒤늦게 ‘응’하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미오리네가 울먹이고 있다는 것을 안 슬레타는 말을 거는 것이 두려워졌다. 미오리네를 혼자 두고 도망쳤을 때의 각오가 흐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미오리네가 등을 돌려서 저에게 안겨들면, 슬레타는 금방이라도 그녀에게 입을 맞출 것 같았다.

“슬레타.”

“네.”

“왜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어?”

“…….”

“그때처럼 그냥 가버려도 됐는데, 왜 나를 이렇게 챙겨줘?”

미오리네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슬레타가 가장 두려워하던 순간이었다. 미오리네는 슬레타의 품에 안길 것 같았다. 작게 떨리는 그 따뜻한 몸이 제게 닿으면 슬레타는 참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피하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슬레타는 몸이 굳은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미오리네의 선택에 걸고, 그것을 믿고 싶어지는 자신을 자책하면서도 환희로 차오르는 이중적인 마음이 우스울 정도였다.

“나는 아직도 네가 좋아, 슬레타.”

등을 돌려 슬레타를 향한 미오리네는 정작 시선을 나누지 않았다. 저를 쳐다보고 있을 슬레타의 시선에 응하지 않은 채로, 눈을 감고서 슬레타에게 말할 뿐이었다. 덜덜 떨리는 길다란 속눈썹 끝에 맺힌 눈물들이, 미오리네가 얼마나 애타게 슬레타를 그리워했는지를 말하고 있었다.

“네가 왜 떠났는지,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그냥 지금 내 옆에 네가 있다는 게 좋아.”

“……미오리네 씨.”

“하룻밤만이라도 좋아, 슬레타. 나랑… 나랑 있어줘.”

눈물의 젖은 미오리네의 눈이 천천히 슬레타를 담았다. 슬레타에게 다가오는 미오리네의 입술은 가엾을 정도로 떨고 있었다. 긴장으로 차가운 손끝도, 떨리는 입술도, 부들거리는 몸도, 미오리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레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슬레타는 다가오는 미오리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응시했다.

하룻밤만이라도 좋다면. 미오리네가 내건 조건은 너무 달콤한 선택이었다. 하룻밤이면 미오리네 씨를 괴롭히지 않아도 되고, 하룻밤이면 미오리네 씨에게 도망치지 말고 같이 나아가자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도망쳤을 때의 그 각오를 잃지 않아도 되는 거야.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뺨에 손을 댔다. 눈물이 살짝 흘러서 촉촉해진 그 뺨에 손바닥을 부벼서 턱을 붙잡고, 1년 전보다 더 떨리는 미오리네와의 키스를 앞두었다.

딱 한 번의 키스를 하면, 오늘 뿐인 하룻밤을 보내면, 그럼 미오리네 씨를, 곤경에 처하거나 곤란하게 만들지 않아도 되니까. 

슬레타는 눈을 가릴 뿐인 그 속임수에 속아넘어가기로 했다.

 

* * *

 

슬레타와 미오리네는 처음에는 닿기만 하는 키스를 했다. 오랜만에 하는 입맞춤은 서투르고 헛도는 키스였다. 아쉽게 느껴지는 서로의 체온이, 깊게 탐하지 못한 욕망에 서로 안달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입술에 혀를 내밀어 핥았다. 떨고 있는 미오리네의 입술이 벌어지면서 슬레타의 혀를 받아들였다. 서로 속살이 섞이고 비벼지는 소리가 조용한 침실에 울렸다. 호흡이 먼저 찬 미오리네가 잠시 숨을 고르게 해달라는 뜻으로 잠시 입을 떼어냈다. 헤에, 헤엑, 하고 미오리네가 숨을 고르는 소리에 슬레타는 더는 참지 않기로 했다.

지금 서로에게 주어진 ‘하룻밤’은 너무 짧았다. 게다가 눈앞에는 계속해서 그리워했던 미오리네가 존재하는데, 슬레타는 참을 수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슬레타는 이불을 걷어내고 미오리네의 위에 올라탔다. 호흡이 차분해진 미오리네의 입가에 짧게 키스하고 그녀의 목덜미에 흔적을 남기지 않을 만큼, 가볍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쪽쪽거리는 소리가 귓가에서 적나라하게 들리는 것에 미오리네는 민망해졌다. 이런 것을 각오하기는 했지만, 대뜸 이렇게 다가오는 건…! 미오리네는 옷을 금방이라도 벗길 것 같은 슬레타의 손을 붙잡았다.

“스, 슬레타.”

“네, 미오리네 씨. 그냥 할게요.”

“……나, 나는, 좀, 천천히.”

“천천히?”

미오리네는 자신이 처음이라는 것을 알릴까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곧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슬레타는 분명 경험이 있어보였고, 그렇기 때문에 미오리네의 위에 올라타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을 것이다. 섹스에 익숙한 슬레타가 처음인 미오리네는 배려하느라 정작 본인이 즐기지 못한다면, 그래서 미오리네와의 하룻밤이 별로라고 느낀다면. 미오리네는 감당할 수 없을 거 같았다.

‘천천히’의 다음 말을 기다리던 슬레타에게 미오리네는 자신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그게 서로에게 덜 상처가 될 것 같았다.

“천천히 하는 게 좋겠어. 너무 성급해.”

“…여유롭네요, 미오리네 씨.”

“네가 너무 초조하게 구니까 그런 거잖아.”

하지만 그것은 슬레타의 방아쇠를 자극하는 꼴이었다. 미오리네의 차분한 말투에 슬레타는 더욱 거칠게 굴어도 괜찮다는 허락을 얻은 기분이었다. 미오리네 씨는 여유롭고, 나는 이 짧은 밤이 아쉬워서 초조해지는 게,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아.

슬레타는 어두운 시야 속에서 협탁 위의 작은 조명을 켰다. 은은하지만 보일 곳은 다 보이는 빛이었다. 미오리네는 갑자기 켜지는 불빛에 당황하며 슬레타를 쳐다보았다. 이거 매너 위반이잖아,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슬레타가 한발 더 빠르게 움직였다.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앞에서 웃옷을 벗었다. 티셔츠를 벗고 나면 굵은 곡선이 드러나면서도 탄탄하게 짜여진 슬레타의 몸매가 드러났다. 미오리네에게 브래지어를 주지 않았던 것처럼, 슬레타도 하고 있지 않았다. 둥근 두 가슴이 슬레타의 움직임에 따라서 흔들렸다. 빳빳하게 선 유두와 경계가 뚜렷해진 유륜까지, 슬레타의 흥분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에 미오리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제가 초조하게 굴면 싫어요?”

슬레타는 미오리네가 입고 있는 자신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미오리네는 제 아랫배를 살살 더듬으며 배꼽 근처에서 맴도는 슬레타의 손끝에 숨을 참았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미오리네의 모습에, 슬레타는 미오리네가 자신을 거부한다고 생각했다.

—싫은 걸 참고 있는 걸까, 미오리네 씨. 초조하게 구는 게 싫어서? 성급한 게 싫어서? 천천히 하는 게 아니라서?

미오리네는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로 슬레타의 손을 버텨냈다. 그건 즐기는 반응이 아니었다. 버티는 것이었다. 미오리네가 신음 하나 내지 않고 딱딱하게 굳어서 슬레타의 손을 받아내는 것에, 슬레타는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어디까지 참을 수 있을까, 미오리네 씨는.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갈비뼈 부근을 더듬으며 그녀의 허리를 쓸어보았다. 부드러운 살결과 상황에 대한 긴장감으로 촉촉하게 젖어든 피부가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반응은 아니었다.

슬레타는 미오리네가 연인처럼 다정하게 자신을 느껴줬으면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한 자신이 어이가 없어서 슬레타는 작게 혀를 찼다. ‘연인처럼 다정하게’? 연인이 아니니까 다정함을 원하는 거야. 연인이 아니니까 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겠지. 하룻밤 뿐인 이 상황이.

슬레타의 손이 점점 위로 올라오자, 미오리네는 히익, 하는 새된 소리를 흘렸다. 슬레타의 뜨거운 손바닥이 옆구리부터 살살 올라와서 미오리네의 가슴팍까지 올라오는 것은 금방인데도, 슬레타는 뜸을 들이고 있었다. 슬레타가 미오리네를 불렀다. 미오리네 씨, 하는 목소리가 어딘가 잠겨있었다.

“참지 말아요, 미오리네 씨.”

미오리네는 무엇을 참지 말라고, 라고 말하고 싶었다. 슬레타가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쥐어오는 가슴의 느낌에 미오리네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슬레타의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느껴지는 오른손이 오른쪽 가슴을 쥐어오면서 미오리네의 유두와 유륜을 한 번에 쓸어보는 감각은 낯설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가슴을 이렇게 만지는 것은 처음이라서, 미오리네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슬레타의 손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유륜을 둥글게, 유두 끝에 닿을 듯 말 듯한 긴장을 주면서 슬레타는 미오리네에게 다가왔다. 티셔츠 옷자락이 점점 위로 밀려올라가서, 미오리네의 작고 하얀 가슴도 은은한 불빛 아래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까워진 슬레타의 체온 만큼 달아오르기 시작한 미오리네의 피부에서는 연한 붉은빛이 돌기 시작했다. 상기된 피부가 색으로 드러나는 것이 부끄러워서, 미오리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미오리네가 눈을 감아버리자, 슬레타는 어딘가 심술이 났다. 미오리네와의 딱 하룻밤이었다. 그 하룻밤의 조각도 놓치고 싶지 않았고, 그 중 미오리네의 시선이 자신을 담지 않는다면 화가 날 것 같았다. 그것을 겨우 억누른 슬레타는 미오리네가 입고 있는 티셔츠를 돌돌 말아 올렸고, 연분홍빛으로 달아오른 미오리네의 가슴팍과 마주하게 되었다.

“옷, 벗길게요.”

“…으, 응.”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티셔츠를 벗겼다. 슬레타가 성감을 부추겼던 미오리네의 오른쪽 가슴은 유두와 유륜이 통통하게 부푼 상태였다. 살짝 빨갛게 충혈되어서, 보기 좋게 익어있는 미오리네의 가슴을 보고서 슬레타는 왼쪽 가슴을 향해 과감하게 입술을 맞대었다.

미오리네는 이런 상황을 상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가슴을 빠는 것 정도야 있겠지. 미오리네는 섹스의 경험이 없을 뿐이지, 섹스의 과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미경험자에게 있어서 지금 하고 있는, 아직 본편은 시작도 안 한 섹스의 자극은 무척이나 컸다. 미오리네는 자신의 가슴이 슬레타의 입안 안쪽으로 빨려들어갔다는 것에 몸을 굳혔다. 슬레타의 입술은 따뜻하게 감싸오던 손길을 잊게 만들 정도로 뜨거웠다. 뾰족하게 세운 혀끝으로 타액과 함께 유두 끝을 부비고 유륜을 통으로 빨아들이는 것은, 미오리네를 울먹거리게 만들었다. 처음 느껴보는 쾌락과 함께, 미오리네는 제 몸에 슬레타의 가슴이 부벼지는 것도 낯설어서 흐윽, 하고 작게 신음했다.

그제서야 미오리네가 참지 않고 소리를 내는 것에, 슬레타는 미오리네가 입고 있는 반바지 위를 더듬었다. 정확히 말하면 미오리네의 성기 위를 문질렀다. 가슴보다 이쪽이 더 느끼기 좋은 것인지, 미오리네는 높으면서 짧은 신음과 함께 슬레타를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다리 사이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었고, 반바지의 재봉선을 따라 가느다란 금이 그어져 있을 미오리네의 성기를 상상하며 그 가랑이 사이를 긁었다.

“하윽, 응, 슬, 레타….”

“미오리네 씨는… 가슴이 좋아요? 아니면… 여기가 좋아요?”

가슴이라고 물을 때에는 혀끝으로 유린했던 왼쪽 가슴팍의 유두를 살짝 꼬집으면서 물었다. 미오리네는 히익, 하고 움찔거리면서 허리를 들썩거렸다. 가슴의 반응이 상당히 좋았던 미오리네는 성기 바로 위의 자극을 주자 이번에는 다리를 파드득 떨면서 시트를 그러쥐었다.

“둘 다 좋은 거 같은데.”

미오리네가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에, 슬레타는 반바지와 팬티를 잡아 끌었다. 미오리네는 순식간에 벗겨지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보고서 놀란 눈을 했다. 여린 음모와 함께 젖어든 미오리네의 성기가 슬레타의 시선 앞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미오리네가 놀라서 다리를 접어 모으려고 하는 걸 슬레타가 두 손으로 잡아 벌렸다.

“저를 피하면 안 되죠, 미오리네 씨.”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허벅지를 꽉 잡으면서 그녀의 다리 사이가 더 깊숙하게 벌어질 수 있도록 몸을 밀어넣었다. 슬레타의 시선이 점점 낮아졌다. 미오리네는 슬레타의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자신의 얕은 가슴팍과 딱딱하게 굳은 유두 끄트머리, 그리고 그 사이로 슬레타의 시선이 서서히 내려가는 것을 보며 그녀가 무엇을 할 지 알아차렸다.

“스, 슬레타, 잠깐만…!”

“괜찮아요, 기분 좋게 해줄게요.”

“슬, 레타. 잠, 잠깐, 거기, 거기 빨면…!”

미오리네는 슬레타의 숨결이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것에 울음을 터뜨렸다. 그건 싫어, 정말 싫어…! 미오리네가 울음을 터뜨리며 싫다고 말해도 슬레타는 멈추지 않았다.

슬레타는 벌어진 다리만큼 벌어진 미오리네의 성기를 시선으로 살폈다. 은은한 조명 불빛으로 슬레타의 그림자가 지긴 했지만, 미오리네의 발갛게 달아오른 속살이 훤히 드러났다. 다물려 있는 성기의 모양새가 귀여워서 손끝으로 쓸어보면 미오리네가 다리를 움찔거리면서 슬레타를 가느다란 목소리로 불렀다. 빨지 마, 부탁이니까, 그런 거, 싫어. 미오리네는 애원했다.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성기를 들여다보면서, 움찔움찔 솟아나는 작은 클리토리스를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포피에 덮여져 있지만 볼록 솟은 클리토리스는 귀여워보였다. 저기를 괴롭혀주면 귀엽게 울겠지, 미오리네 씨. 지금처럼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귀여운 소리를 내줄 거야. 슬레타는 확신을 갖고 움직였다. 클리토리스를 지나 벌어진 성기의 구멍이 작게 벌름거리는 것도 보았다. 안에서는 벌써 애액이 흘러 넘쳐서 번들거리고 있었다.

가슴을 조금 빨아주고 아래를 살짝 만진 것만으로도 미오리네 씨는 이렇게 느끼는구나. 이런 미오리네 씨를, 누군가는 알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나면 슬레타는 화가 났다. 그런 미오리네는 오로지 자신만 알았으면 했다. 설령 미오리네를 알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 하더라도, 미오리네가 앞으로 울게 되는 것은 자신의 밑에서만 울었으면 했다. 그게 좋은 기억이 되었든, 싫은 기억이 되었든, 미오리네에게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남은 밤은 짧고, 슬레타는 진짜로 초조해졌다.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클리토리스가 파묻힌 살을 더욱 벌려 통통하게 부어오른 살덩이를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이윽고 포피를 살짝 벗겨 내리고, 클리토리스를 문질러주었다. 미오리네는 클리토리스가 자극되는 애무에 눈을 부릅뜨고서 고개를 내저었다.

“으응, 으… 하, 으윽, 스, 슬레, 타…!”

“젖었어요, 미오리네 씨, 알아요?”

뻐끔뻐끔거리는 구멍에서는 보기 좋게 젖어드는 애액이 불어나고 있었다. 물기 젖은 곳을 손가락 끝으로 찌걱대면서 소리를 내주면 미오리네가 슬레타, 하고 힘없이 불렀다. 클리토리스의 자극이며, 실제로 젖어드는 성기의 감각에 미오리네는 흐느껴 울면서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못했다. 

미오리네는 계속해서 슬레타의 입술이 제 아래에 닿을까봐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 미오리네를 알아차렸는지, 슬레타가 물었다.

“여기 빨아주는 거 싫어요?”

“싫…어.”

“왜요? 손가락이 더 좋아요?”

“응, 손가락이, 좋아, 손가락으로만, 해.”

미오리네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 슬레타에게 간청했다.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대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커닐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는 걸까. 그렇다면 덮어쓰고 싶은 기분이었다.

슬레타는 그래요, 라고 말했다. 미오리네는 갑자기 멀어지는 슬레타의 기척에 그녀가 그곳을 빠는 걸 멈추었다고 생각했다.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허리와 엉덩이 사이에 베개 하나를 밀어넣었다. 그리고 더 높아진 다리의 각도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오리네는 높아진 골반의 높이와 함께 슬레타가 다시 다리 사이로 자리 잡는 것에 당황했다.

슬레타는 반바지와 속옷을 벗길 때와 마찬가지로, 거침없이 미오리네의 다리를 벌리고 든 다음에 미오리네의 클리토리스를 한 입에 물었다. 슬레타의 입안에 들어간 클리토리스는 그 흡입감에 더욱 성감을 높이며 미오리네를 쾌락으로 내던졌다.

죽고 싶을 만큼의 수치심과 숨을 곳을 찾고 싶은 부끄러움이 미오리네를 집어 삼켰음에도, 미오리네는 엉덩이 골을 타고 흐를 정도로 불어난 애액이 느껴졌다. 그러나 제일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미오리네의 클리토리스를 빨아들인 슬레타의 입술이었다. 혀끝이 클리토리스를 꾸욱꾸욱 누르기도 하고 퉁퉁 튕기기도 하는 것에 미오리네는 소리도 못 내고 헉헉거렸다.

슬레타가 더욱 세게 클리토리스를 빨아들이는 것에 미오리네는 부릅 뜬 시야가 하얗게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까맣게 점멸하는 거 같기도 했다. 빨갛게 물들었다가 색을 잃고 다시 슬레타로 채워지는 것 같았다.

미오리네의 아래를 집요하게 괴롭히면서 슬레타는 미오리네가 느끼는 얼굴을 모두 바라보았다. 혀를 추스르지 못하고 계속해서 헐떡대며 슬레타, 슬레타아, 하고 우는 미오리네의 얼굴을 한 구석도 놓치지 않고 시선으로 범했다. 슬레타는 허리를 치켜들려고 하는 미오리네의 엉덩이를 붙들은 채로 그녀의 절정을 지켜보았다.

미오리네는 시선을 맞추지 못한 채로 흐윽거리면서 다 삼키지 못한 신음을 흘렸다. 애액이 왈칵 쏟아져 나오면서 슬레타가 지분거리던 손가락을 적셨다. 슬레타는 물고 있던 클리토리스를 놓아주었다. 다 젖은 손가락을 미오리네의 숱 적은 음모에 문질러주면서 흡족하게 웃었다.

“이제 미오리네 씨가 좋아하는 손가락 차례네요.”

“시, 싫어, 잠깐… 만.”

“싫어요.”

“슬, 레타… 기분, 너무, 좋아서… 무, 서워.”

미오리네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엉망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무서운 것은 사실이었다. 클리토리스로 인한 절정으로 몸 안쪽은 불이 붙은 것마냥 뜨거웠고, 슬레타가 손가락 끝만 넣었다 빼는 질 쪽이 죄여드는 감각은 이상했다. 이상하고 낯설고 무서운 쾌락이 미오리네를 삼키려고 했다. 아니, 이건 삼키는 게 아니라, 한 입씩 베어물리는 느낌이었다. 쾌락의 편린을 맛볼 때마다 미오리네는 어딘가가 망가지는 기분이 들었다.

“망가질, 거 같아…, 이상해, 슬레타아….”

슬레타는 엉엉 우는 소리와 뒤섞여서 무섭다고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낸 미오리네를 보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엉망인 섹스라도, 미오리네의 안에서 강렬하게 남을 수 있다면 좋을 거 같았다. 미오리네가 앞으로 누군가와 섹스를 하더라도 슬레타를 떠올릴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하룻밤이라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하룻밤으로도 안되는 연정이라는 걸 알아버려서 그런 걸까.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위로 올라가며 미오리네의 가슴을 찾아 그 끝을 물었다. 방금 전까지 아래를 애무하던 입술이 자신의 애액으로 젖어 가슴을 무는 것에 미오리네는 훌쩍거리면서 몸을 버둥거렸다.

덕분에 받쳐두었던 베개가 굴러 떨어져 나가는 것에, 슬레타는 입에 물고 있던 미오리네의 유두를 살짝 이를 세워 깨물었다. 아아…! 미오리네는 따끔하게 이어지는 고통과 그 사이에도 확실하게 존재하는 쾌락에 정신이 없었다.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가슴을 빨기도 하면서 다른 비어있는 가슴을 한 손으로 쥐고서 주무르기도 했다. 손톱 끝을 세워서 유두를 긁어내릴 때마다 미오리네는 슬레타, 슬레타, 하고 울면서 슬레타에게 빌 듯이 그녀를 불렀다.

슬레타가 미오리네의 가슴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또 만족할 만큼의 성과를 얻었을 무렵에는, 미오리네의 가슴은 처음의 연분홍빛이 돌던 것이 거짓말일 정도로 빨갛게 익어 퉁퉁 부어오른 상태였다. 자신이 만든 하룻밤 뿐일 작품을 뿌듯하게 여기며, 슬레타는 이제 밀어낼 힘 조차 없는 미오리네의 다리 사이에 안정적으로 파고들었다.

슬레타 또한 미오리네에 온몸으로 닿길 원했다. 슬레타는 저 또한 흥분으로 젖은 아래를 느끼며 반바지와 팬티를 벗어던졌다. 슬레타가 거침없이 벗는 모습에 미오리네는 그것을 어물어물한 시야로 보면서 얼굴을 붉혔다. 슬레타의 알몸을 보면 미오리네는 더 뜨거워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체온이 한 차례 더 오르는 기분이었다.

심한 꼴을 당하면서, 싫다고 애원해도 들어주지 않는 상대에게, 여전히 욕정하고 있다는 것. 미오리네는 이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또한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차례의 절정이 휩쓸고 간 미오리네는 어딘가 용기가 생겼다. 슬레타와의 밤은 오늘이 끝이라는 생각이 들고 나면, 더 이상의 머뭇거림은 미오리네에게 있어서 손해였다.

어딘가 결연해진 미오리네의 눈빛에 슬레타는 불안해졌다. 미오리네를 뒤흔들어 놓고 싶었다. 미오리네가 앞으로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슬레타를 잊지 않기를 원했다. 차라리 그녀가 망가져서 아무와도 못 만나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오리네의 강단 있는 눈빛이 다시 돌아온 것을 보면 슬레타는 엇나가는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

그래도 상처 주는 것은 싫어서,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작고 동그랗게 벌어진 구멍 사이로 검지 손가락을 하나 밀어넣었다. 손가락 끝으로 느껴지는 좁은 질의 느낌이 적나라했다. 미오리네는 불어나는 애액으로 미끈거리면서도 압박감 있게 슬레타의 손가락을 조여왔다. 슬레타는 밀어넣은 손가락을 휘저으며 미오리네의 안쪽을 헤집었다.

타인의 손가락이 몸 안쪽, 그것도 질의 안쪽으로 들어온다는 경험은 미오리네에게 있어서 미지의 감각이었다. 미오리네가 숨을 참고서 그 이질감을 견뎌내고 있을 때, 슬레타는 미오리네가 뻣뻣하게 굳어있으면서도 질 내벽으로는 부드럽게 제 손가락을 죄여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기쁘게 반응하면서, 어째서 싫은 것처럼 구는 거지, 미오리네 씨. 이젠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는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슬레타는 제멋대로 미오리네의 입술에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갑자기 혀를 얽어오는 슬레타의 키스에, 미오리네는 벌어진 다리와 들쑤셔지는 아래, 억누르고 있던 신음까지 신경 쓰고 있던 모든 것들이 흐트러지는 걸 느꼈다.

“후, 하나 더 넣을게요.”

“아아, 으, 으응, 깊어…!”

“더 긴 손가락이라서요. 미오리네 씨, 제 손가락 기분 좋아요?”

“후으, 으, 조, 좋아, 좋은데, 이상, 해…!”

“망가질 거, 같아요?”

“스, 슬레, 타.”

“네, 말씀하세요, 미오리네 씨.”

“흐윽…!”

말해보라고 해놓고서 슬레타는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미오리네는 안쪽의 어느 한 지점을 꾸욱 눌리자 온몸에 소름이 돋다 못해 머릿속이 하얗게 질리는 것 같았다.

거기, 안 돼, 슬레타, 안, 돼, 아, 안 돼, 싫어, 아, 이상해, 이상해져, 슬레타, 이상해, 무서워, 하지 마, 슬레타, 흐윽, 부탁, 부탁할게, 그만, 너무, 너무 무서워, 이상해, 기분, 너무 좋아서, 이상해, 슬레타, 스, 슬레타, 슬레타, 그만, 흑, 흐응, 아, 으웃! 아, 아! 아!

미오리네가 느끼는 곳을 마구 두 개의 손가락으로 꾸욱꾸욱 눌러서 쾌감의 피치를 높혀가던 슬레타는 낮은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기분이 좋냐고 물었다. 미오리네는 머리의 어딘가가 고장날 것만 같았다. 제 몸 안에 그런 곳이 있다는 걸 처음 안 것도 부끄럽고, 슬레타의 손으로 만져지는 것도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더 참을 수 없는 건 기분이 좋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자신이었다.

“아으, 응, 우으…! 으으응…! 스, 슬레타, 나, 그만, 멈춰, 줘, 하으으…!”

“갈 거 같아요? 또?”

“가, 가버려, 갈 거 같아, 슬레타, 슬, 레타아.”

“또 제 이름 부르면서 가요, 미오리네 씨.”

“히익, 히끅, 응, 스, 슬레, 타아, 시, 싫어, 또, 또 가버려…!”

미오리네는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소리를 내면서 절정에 달했다. 마신 숨을 내쉬지 못해서 과호흡이 올 것 같았다. 머릿속이 끊어질 것 같은 찌릿찌릿한 쾌락에 미오리네가 눈을 부릅떴다. 허벅지 안쪽이 죄여들면서 슬레타의 손가락을 더욱 세게 조여오는 압박감에 슬레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미오리네는 온몸으로 절정을 느꼈다. 벗은 몸의 닿아오는 부분이 끈적거렸고, 눈물과 땀으로 범벅된 미오리네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슬레타는 이 정도로 만족하지 못했다. 미오리네에게 절정을 느낄 틈을 주었던 것은 앞으로의 일에 도움닫기 같은 것이었다. 미오리네에게 슬레타를 더욱 새겨넣고 싶다는 욕심이 슬레타를 ‘다음’으로 움직이게 했다.

미오리네는 절정의 틈에서 겨우 정신을 되찾고 있을 때, 슬레타가 자신의 질 안에 넣어둔 손가락을 천천히 찌걱이는 것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 갔단, 말이야, 지금, 갔, 는데…!”

미오리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에, 슬레타는 알고 있다고 말했다. 미오리네 씨 가는 얼굴 다 봤으니까 알아요. 슬레타는 질벽을 쑤시는 손이 아닌 다른쪽 손으로 미오리네의 바짝 서고 충혈된 클리토리스를 톡톡 건드렸다. 미오리네는 동시에 이루어지는 자극 속에서 소리를 질렀다.

“흐, 머, 멈춰, 그만, 그만 가고 싶어, 그만, 할래, 아, 아으, 안 돼, 안 돼! 슬레타, 슬레타아!”

“괜찮아…요. 계속 가면 되니까.”

“아냐, 아니야, 아, 으, 으으, 하으, 으, 스, 슬레, 타, 손, 멈춰, 이상해, 이상하다구우…!”

“좋은 거예요. 하고 싶은대로 하면 돼요. 미오리네 씨는 기분 좋은 거 뿐이니까, 나쁜 거 없어요.”

“아니, 야…! 슬레타, 제발, 부탁이야, 나, 나 이상해에…!”

미오리네가 울먹거리면서 울음을 크게 터뜨려도 슬레타는 멈추지 않았다. 클리토리스를 비비는 손과 지스팟을 찌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흥분한 슬레타에게서도 땀방울이 떨어졌다. 미오리네는 슬레타의 체액으로 젖어가는 자신이, 너무 느끼고 있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미오리네가 기가 막힌 것은 배뇨감이었다. 무언가 나올 것 같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소변이 나올 것 같아서 미오리네는 제발 멈춰달라고 슬레타에게 빌었다. 싸고 싶지 않았다. 이런 데서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슬레타, 멈춰, 그만, 제발,  부탁이야. 미오리네는 애원과 간청, 부탁과 절규를 반복하다가 슬레타에게 진실을 토로했다.

“쌀, 거 같단, 말이야, 슬레타아… 나 그러기 싫어, 제발…!”

“뭐든 좋아, 난 미오리네 씨가 싸는 거도 보고 싶어요.”

“싫어, 싫, 어, 싫어! 아, 싫어! 아앙, 아, 아아아! 슬레타, 보지 마,  보지 마아…!”

슬레타가 일부러 아랫배를 꾸욱 누르며 클리토리스를 짓누르자, 미오리네는 그 자극으로 더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미오리네의 아래에서 투명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면서 침대를 흠뻑 적셨다. 참았던 무언가를 싸버린 것 같은 느낌에 미오리네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래에서는 물이 찔끔찔끔 뿜어져 나오면서 시트가 젖는 소리가 들렸다.

“나, 나는, 싫다고, 했, 는데….”

미오리네가 끊어지는 목소리 사이로 말했다. 슬레타는 시오후키를 하면서 제 앞에서 완벽하게 무너진 미오리네를 보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그것은 그녀를 완벽하게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실제와 달랐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미오리네를 거의 능욕한 것과 다름 없는 섹스를 했는데도, 그래봤자 그것은 ‘하룻밤’일 뿐이었다.

씁쓸해진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붙들었던 허벅지를 놓아주었다. 미오리네는 질척하다 못해 척척하게 젖은 다리 사이에 울음을 터뜨렸다. 슬레타가 정이 떨어졌겠지. 이런 실수를 하는 사람에게 완벽하게 정이 떨어졌을 거야. 미오리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미안해요, 미오리네 씨,”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손을 잡으면서 한 번 더 말했다. 방금 전보다 더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정말 미안해요.”

자신의 체액으로 뒤덮인 채로, 침대에 드러누워 있던 미오리네에게 슬레타는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몸 닦을 걸 갖다 줄게요, 라고 말하는 슬레타의 말에 미오리네가 없던 힘을 쥐어 짜서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 괴롭히듯이 쾌락을 들이붓고, 뭐든 좋다고 했으면서, 그런 주제에.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너?”

미오리네가 그렇게 묻는 것에 슬레타는 대답 대신에 시선을 피하다가, 미오리네의 다시 재차 묻는 말에 겨우 한 마디를 했다.

“지금 이 상황이, 미안해요.”

“……뭐?”

슬레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미오리네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섹스를 하다가 정신이 나갈 것같은 상황에 도달하고 나서, 그 이후에는 갑자기 미안하다, 라는 내용이면. 미오리네는 자신이 무언가 실수를 했나 되짚어보았지만, 슬레타의 손길에 몸이 녹아나다 못해 고장난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설마 방금 전에, 내가, 그, 싼 거 때문이라면. 미오리네가 더듬거리면서 말하는 것에 슬레타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미오리네 씨가 기분 좋아서 느껴준 거라서 전 상관 없었어요. 그치만 싫었죠? 미안해요.”

“그럼 이제 그런 거 안 하고, 계속 하면 되는 거잖아? 미안하다는 소리는 그만해.”

“……그렇지만.”

슬레타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서, 미오리네와 눈을 마주했다. 오랜만에 보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푸른빛 시선이었다. 누구에게서도 찾을 수 없는, 미오리네만을 그렇게 바라보는 슬레타만의 시선. 미오리네는 끈기 있게 ‘그렇지만’ 뒤에 붙을 말을 기다렸다.

“안 돼요. 이제 못하겠어요.”

이어지는 말이 미오리네를 거절하는 말이라면, 기다리지 말 것을 그랬다. 미오리네는 슬레타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으나, 손 하나 까닥할 힘이 없는 상태로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슬레타를 노려보는 게 미오리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분노였다.

“뭘 못하겠다는 거야? 나랑 하는 섹스?”

“…네. 이제 못하겠어요.”

“그럼 다른 사람이랑은 할 거고? 다른 사람이랑은 하면서 왜 나랑은 안 하는 건데? 내가 별로였어?”

“아뇨, 미오리네 씨 잘못이 아니에요. 그냥, 이건 제 기분의 문제예요.”

“……그 기분이 뭔데?”

슬레타와 미오리네의 대화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 한 명이 밸런스를 무너뜨리면, 두 사람 다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바닥으로 치닫는 줄타기.

슬레타는 미오리네가 자신을 여전히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몸을 내어주면서 하룻밤을 이야기할 정도로 미오리네는 여전했다. 그래서 그 하룻밤에 미련을 갖고 응해버린 자신이 미웠다.

미오리네 렘블랑에게 슬레타 머큐리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프롬에서도 꾀를 부리지 않으면 같이 춤을 출 수도 없고, 둘을 위해 같이 전진하자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비겁한 수에 속아버린 것도 모르는 미오리네의 순정이 가엾고, 또 그녀에게 상응하는 답을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럴싸하게 굴려고 했던 자신이 역겨웠다.

슬레타가 그런 감정에 휩싸여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을 때, 미오리네는 슬레타의 뺨에 손을 뻗었다. 때린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다정하고 나긋한 손길이었다. 땀과 체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미오리네의 손이 슬레타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무슨 기분이길래 왜 그렇게 우는 거야, 슬레타.”

“제가… 울어요?”

“그래, 그럼 이게 내 땀이겠어? 네 눈물이지.”

눈물이 어느새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슬레타는 미오리네를 만나지 않겠다고 각오한 날부터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다. 에리크트에게 후계자 자리를 내줬을 때에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고, 울고 싶을 만큼의 섭섭한 감정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오늘 뺨을 맞았을 때에도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따끔함에도 눈물 없이 이별했다.

그런데 오늘 이 하룻밤에 슬레타는 그간 쌓아온 설움을 터뜨리기라도 하듯이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며 미오리네의 손을 타고 흐르는 것에, 슬레타는 당황하면서 이게, 이게 아니에요, 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터진 눈물과 함께 진심이 새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안 돼요. 저는 오늘밤으로 못 견뎌요. 정말 못하겠어요.”

“…뭐?”

“저 아직도, 미오리네 씨가 너무 좋아요. 미오리네 씨를 좋아해서, 떠난 거였는데, 아직도, 포기를 못하겠어요. 미오리네, 씨를, 못 놔주겠어요.”

“…….”

“그래서 더는 안 돼요. 미오리네 씨랑 계속 있고 싶어지니까, 나는, 그럴 수 없는데.”

“…왜?”

“왜냐하면, 전, 미오리네 씨한테……못된 짓만 할 거예요. 같이 프롬이나 파티에서 춤도 못 추고, 미오리네 씨랑, 같이 전진하자고, 말도 못할 거고. 이대로 남을 거예요.”

슬레타는 미오리네의 손을 떼어내고, 스스로 눈물을 연신 훔쳤다. 패배를 선언하는 슬레타의 모습에 미오리네는 입을 열었다.

“나는 각오했어, 슬레타.”

미오리네는 있는 힘껏 몸을 날려 슬레타에게 돌진했다. 풀썩, 하고 넓은 침대 위로 무너지는 슬레타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겹쳤다. 알몸끼리 끈적거리면서 달라붙는 느낌은 최악이었지만, 슬레타와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자체로도 최고였다. 그래, 이 품이 그리웠다고. 미오리네는 슬레타의 품에 얼굴을 부비면서 다시 크게 외쳤다.

“네가 못된 짓만 해도 좋아, 바, 방금 전처럼 또 그런 걸 해도 좋아! 프롬, 파티, 이런 데서 같이 춤 못 춰도 좋아! 네가 날 좋아해서 떠났다고 해도, 포기를 못한다는 거도 좋아…!”’

“…미, 미오리네 씨?!”

“너니까 좋은 거야, 바보야!”

미오리네가 가슴팍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슬레타는 조심스럽게 미오리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미오리네의 이야기를 곱씹었다. 그리고 천천히 되물었다. 얼굴을 보지 않고서 대화는 이어졌다. 하나 둘, 정답을 맞춰가면서. 

“제가 못된 짓만 해도 좋아요?”

“그래.”

“저랑 파티에서 춤추기 힘들어도 좋아요?”

“그래.”

“제가 미오리네 씨를 좋아해서 떠났다고 해도 좋아요?”

“그래.”

“제가 미오리네 씨, 아직도 좋아한다고 해도…, 포기를 못했다고 해도 좋아요?”

“그래, 이제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 확인했어?”

듣고 있자니 낯부끄러운 대사 뿐이라서, 미오리네는 앙칼지게 물음으로 받아쳤다. 슬레타는 거의 쉬어있는 미오리네의 목소리에 푸흐흐, 하고 웃었다. 슬레타가 늘상 짓는 바보 같은 웃음소리였다. 

미오리네는 슬레타와 눈을 마주했다. 푸른색 눈동자가 기대와 희망, 약간의 좌절, 부끄러움을 내비치면서 미오리네에게 있는 힘껏 닿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미오리네는 저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 무언가가 일렁일렁 흔들리고, 고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사랑. 슬레타와 미오리네는 겨우 서로에게 닿았음을 기뻐하는 키스를 했다. 연인으로서의 키스였으며,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다는 맹세의 키스였다.

“미오리네 씨, 저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요?”

“뭔데?”

“방금 전처럼 또 그런 거… 해도 돼요?”

“…….”

“천천히 할게요….”

미오리네는 저를 구슬리려고 하는 목소리에 겨우 숨겨왔던 사실을 폭탄처럼 터뜨렸다.

“나, 오늘이 처음이었어.”

“……아, 처음.”

처음, 처음, 처음. 슬레타는 혼자 중얼거리더니 이내 어깨를 크게 움찔거리며 미오리네를 바라보았다. 뭐, 뭐라고요?! 슬레타의 말에 미오리네는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나는 처음이었다고. 그런데도 너 막무가내였지?”

“우, 우와, 어, 어떡해, 어떡해요, 미오리네 씨?! 저 진짜, 그,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런 거 같더라. 폭주하는 슬레타. 엄청 힘들었어, 나.”

“괜찮아요, 미오리네 씨?!”

“안 괜찮아…….”

 미오리네의 늘어지는 말, 그리고 안절부절 못하는 슬레타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미오리네는 슬레타에게 목욕을 하고 싶다고 했다. 같이 목욕하고, 침대 시트 갈고, 한숨 자면 나아질 거야. 미오리네의 말을 듣고 있던 슬레타는 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미오리네는 덥썩 안겨드는 슬레타에게 말없이 그 포옹을 받아들였다. 미오리네 씨, 정말 좋아해요. 슬레타의 눈물에 젖은 고백에 미오리네는 알아, 라고 대꾸하면서, 저도 모르게 고이는 눈물을 슬레타 몰래 닦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