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무엇보다 저돌적인 슬레타 머큐리는 그 외의 분야에서는 거의 아무런 생각이 없는 편이었다. 생각이 없다는 건 꽤 무서운 일이었다. 아는 것도, 알지 못하는 것도, 슬레타는 생각 없이 결정했다.
그걸 옆에서 보고 있는 미오리네 렘블랑은, 그녀가 생각보다 질이 나쁜 여자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생각이 없을 수 있는 것은, 슬레타 스스로가 자신이 날 때부터 누리고 있는 힘을 알고 있고, 또 그 힘을 쓰는 것에 망설임이 없도록 교육을 받아온 것이다.
그래서 슬레타는 정의로울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못 얻어내는 불공평한 것들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 그것이 ‘옳기 때문에’ 라는 이유로, 거침없이 돌진해버리는 슬레타의 모습에 모두가 흔들린다. 그것이 가치관, 이성, 관계 혹은 사랑이라는 감정.
그래서 슬레타는 모두에게 사랑스러운 것이다.
미오리네는 그녀를 사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 중에 한 명이었다.
슬레타가 사는 맨션 앞에서, ‘머큐리’ 라고 적혀있는 문패 앞에서 미오리네는 초인종을 눌렀다. 아마도 지금으로 7번째 호출이었고, 6번째에 이어서 슬레타는 문을 열어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모처럼 슬레타가 꾀어준 주말이었다. 그녀와의 주말 약속으로 기대감에 부푼 미오리네는 최근 쇼핑한 옷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옷으로, 힐까지 신었다. 그리고 그런 차림으로 남의 집 문앞에서 30분 넘게 대기 중인 상태였다.
'대체 왜 내가 이렇게 비참한 기분이어야 하는데?!’
미오리네는 눈을 부릅뜨며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하고 길게 울렸다. 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오리네는 한숨을 내쉬면서 들고 왔던 토마토가 담긴 봉투를 흔들어보았다.
'누구 때문에 이런 무거운 거까지⋯.’
문이라도 발로 차줄까 했지만, 미오리네는 그러지 않았다.
문 너머에는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던 익숙한 풍경들이 있을 것이다. 거의 다 벗은 슬레타, 겨우 옷을 꿰어입고 나오면서 ‘미오리네 씨!’ 하고 웃어주는 한결 같은 모습, 그리고 그 뒤에서 멋쩍은 표정으로 나오는 속옷 차림의 남자, 혹은 여자.
미오리네가 문짝을 뚫어버릴 기세로 두들겨 팼을 때, 기진맥진해진 상태에서 마주했던 그때의 모습들은 끔찍했다. 미오리네는 없는 체력을 쥐어 짜내가면서 슬레타를 겨우 깨워놓고, 그런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그냥 이렇게 비참하게 약속을 바람맞는 편이 훨씬 낫다.
'아, 싫다. 머릿속이 시끄러워.’
미오리네는 문고리에 토마토를 걸어두고, 올라왔을 때 탔던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 엘리베이터에 올라올 때는 즐거움에 벅찼었는데, 지금은 비참함에 울어버릴까 생각이 들었다.
거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미오리네는 눈물 대신에 한숨이 나왔다. 예쁘게 한 화장이 오늘따라 더 울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런 거, 한두 번도 아니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미오리네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미오리네는 주머니에 늘 넣고 다니는, 저와 어울리지 않는 색의 립스틱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그 립스틱은 슬레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것이었다. 미, 미, 미, 미오리네 씨랑⋯ 자, 자, 잘 어울릴 거예요! 그렇게 말한 주제에, 미오리네가 직접 발라보면 처참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아서, 슬레타는 울어버렸다.
'그랬었지, 립스틱 선물 하나 똑바로 하지 못했던 슬레타 머큐리 주제에.’
그런데 지금은. 지금의 슬레타 머큐리는.
미오리네는 1층에 도착했다는 전자음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립스틱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주머니에서 빼냈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맨션의 가장 높은 층에 사는 슬레타의 집 쪽을 한 번 쳐다보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미오리네는 떠났다.
이럴 때면 샤디크가 귀신 같이 연락을 한다. 미오리네는 그가 부르는 술자리에 따라 나서기로 했다. 모처럼 차려입은 옷이 아깝고, 예쁘게 한 화장도 지우기 싫었으니까. 그렇게 만나고 나면 샤디크의 이상한 질문공세가 이어졌다.
언제부터 좋아했어?
미오리네가 슬레타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날 보니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녀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음을 인지한 날만이 있었을 뿐이다. 어쩌면 처음 만난 순간부터 좋아했을지도 몰라, 라고 말할까 하다가, 미오리네는 하이볼을 들이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샤디크는, 미오리네가 답없이 하이볼만 마시는 것에 웃을 뿐이었다.
“정말 좋아하는구나.”
“응.”
“그럼, 하나 더. 왜 고백하지 않아?”
고백하지 않는 이유? 미오리네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얼마든지 그런 기회는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회에 올라타서 슬레타와 사귀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 얼마든지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싫은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나는 얼마든지 있는 애인이 아니라, 일생에 딱 한 번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거라고!
미오리네의 억지에 가까운 이야기에 샤디크는 ‘하하하!’하고 크게 웃어버렸다. 그리고 방금 전에 했던 말을 또 했다.
“정말 좋아하는구나.”
“그래.”
“그럼 지금처럼의 관계가 좋은 거네.”
지금처럼의 관계.
평범하게 고등학생 때부터 친구, 우정 키링도 나눠 갖고, 좋아하는 음식을 나눠주고. 언젠가 서로 애인이 생기면 당연하게 차순위로 밀리는 그런 관계.
좋을 리가 있겠냐?!
“하하, 옛날부터 생각하지만⋯ 미오리네는 가진 거에 비해서 의외로 겁쟁이야. 어쩌면 수성쨩도 미오리네한테 관심이 있을 수도 있잖아?”
“걔가 나한테 관심이 없겠어? 당연히 있지.”
“하지만 그쪽은 아니라는 거야?”
“그래.”
“그럼 그쪽으로 관심을 돌려보면 되잖아.”
“그게 말처럼 쉬웠으면.”
내가 이렇게 울고 있겠냐고.
미오리네는 울었다. 샤디크는 아니나 다를까 우는 미오리네 앞에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어줄 뿐이었다. 샤디크는 위로의 안주를 권했다. 꼬치 하나 더 시킬까? 미오리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고백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괴로운 이 마음을 가라앉히는 방법을 몰랐으니까. 그런데 너무나도 흔한 전개로 미오리네는 마음을 다잡아야만 했다. 슬레타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고, 슬레타도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했고, 미오리네는 그녀와 더 이상 등하교를 할 수 없게 되었고, 그렇게 멀어졌다.
한 달의 연애를 한 슬레타는, 한 달만 사귀었던 연인에게 여전히 다정했지만, 그 연인이었던 사람은 견디지 못하며 슬레타를 보며 괴로워했다. 슬레타는 계속해서 연애를 했다. 뭔가의 결핍이 있는 사람마냥 계속해서 사람을 사귀고, 사귀고, 사귀고,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았고, 그러면서, 사랑에 무뎌져가는 거 같았다.
그걸 알아낸 것은 우연이었다. 미오리네는 계속해서 멀어지는 슬레타의 모습에, 상처를 받으면서 어느날 한 번 물어봤을 뿐이었다.
'오늘 헤어졌다며.’
'아아, 네.’
'그 사람, 좋아⋯했지?’
'음⋯⋯ 모, 모르겠어요.’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면, 슬레타는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름 기간도 길었던 상대였다. 슬레타는 그 사람과 두 달이나 사귀었고, 분명 섹스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슬레타는 정말 ‘모른다’는 얼굴로, 미오리네를 보면서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사귀는 거야?’
'그, 그, 그래도, 좋다고⋯ 했어요.’
'뭐?’
'조, 좋아하지, 않아도, 사귀어, 달라고⋯ 한 거였으니까요.’
슬레타는 그렇게 말했다. 미오리네는 그제서야 그녀가 이제까지 사귀어온 사람 모두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좋아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슬레타에게 고백하게 되면 자신 또한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이 되는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런 건 죽어도 싫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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