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브루루 / 스자<-루루
를르슈가 담배를 본격적으로 피우게 된 것은 세 번째 남자친구를 사귀고 나서부터였다. 세 번째 남자친구는 아내와 세 살 난 아들이 있는 유부남으로, 를르슈와는 체스클럽에서 만나게 된 사이였다. 그 당시 두 번째 남자친구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한 를르슈는 누구를 만날 기분은 아니었지만, 세 번째 남자친구의 눈이 ‘그’를 닮았으므로 가볍게 한 번 입을 맞추었다가 그만 일을 치르고 말았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를르슈와의 잠자리에서 그 다음을 요구하게 되는 것처럼, 세 번째 남자친구도 그러했다. 를르슈는 귀찮은 일에 또 시달리게 되었다는 생각에 그를 대충 떼어내려고 했었다.
나는 남자랑 자지만, 남자랑 연애는 하고 싶지 않아.
샤워를 마치고 나온 를르슈의 말에, 세 번째 남자친구는 ‘그러셔?’라는 말과 함께 뒤지고 있던 를르슈의 지갑을 들어보였다. 사진 포켓 속에 들어있는 ‘그’의 사진을 가리킨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너 얘 좋아하지?”
그 사진은 로로와 나나리 사진 뒤에 를르슈가 숨겨둔 비밀의 부적이었다. 둘이서 같이 찍은 사진은 많아도 ‘그’의 독사진을 구하는 것은 꽤나 힘들었기 때문에 구하는 것에 제법 공이 들어간 사진이었다. 그런 사진을 희희낙락한 얼굴로 꺼내들어보이는 남자는 웃는 낯으로 말했다.
“사진을 숨기고 다니는 걸로 봐서는 남자친구는 아닐테고. 짝사랑하는 중이야?”
“남이사, 신경 쓸 게 아니잖아.”
“우리집 애 사진도 보여줄까? 엄청 귀여워.”
“당신 가족한테나 잘해. 이제 내놔. 나갈 거니까.”
“또 보자, 를르슈.”
를르슈는 어느새 제 이름까지 알아낸 남자를 노려보았다. 지갑을 낚아채고 사진을 다시 반듯하게 집어넣었다. 호텔 밖을 나오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그’로부터 온 전화였다. 이 녀석은 왜 이럴 때마다 감이 좋은 건지. 를르슈는 목을 가다듬고서 전화를 받았다.
‘를르슈! 한참 전화했잖아. 어디야?’
“아아, 잠깐 쇼핑하러 나왔어. 왜?”
‘오늘 저녁 약속 말이야, 못 갈 거 같아서. 미안해. 혹시 준비 다 됐으면 늦게라도 갈 테니까.’
“아냐, 괜찮아. 아직 장 보기 전이니까. 여자친구 때문이야?”
일부러 알면서도 이렇게 물어보는 자기 자신도 취향이 참 별나다고 생각했다. 를르슈의 말에 ‘그’는 수줍어하듯 대답을 우물쭈물 했다. 를르슈가 남자친구를 갈아치웠던 횟수의 배의 배는 더 많은 여자친구를 사귀었던 주제에, ‘그’는 매번 이렇게 성실하게 수줍어했다.
그것이 아니꼬우면서도,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로로랑 나나리한테는 내가 잘 이야기할게. 그럼 데이트 잘 하고.”
‘응, 미안해.’
“미안할 것까지야.”
미안한 것은 오히려 이쪽일지도 모른다. 를르슈는 전화를 끊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멋대로 ‘그’와 닮은 남자들과 자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닮았으면 편의대로 연애를 한다. 그리고 나서 너무 다른 차이점을 발견하고 나면 질린 얼굴로 그 남자를 버린다. 가장 친한 친구의 남성 편력에 대해서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따로 하겠는가. 를르슈도 ‘그’의 여자친구들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을 안하듯, ‘그’도 그럴 것이다. 괜한 자의식 과잉이다. 를르슈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길거리를 걸었다. 분명 손끝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날이었지만 한없이 걷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다.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르는 채로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그 다음주 체스클럽에서 세 번째 남자친구를 만났다.
세 번째 남자친구는 를르슈와의 한 판에서 몇 수 두지도 못한 채로 체크메이트를 당했다. 그는 제법 걸었던 판돈에 대해서 아쉬움도 없는 얼굴을 하면서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한 판 더 할까? 그럴 마음도 없는 주제에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를르슈는 됐다고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 남자도 를르슈를 따라왔다.
체스클럽의 모임은 늘 똑같은 장소의 바에서 이루어졌다. 이 체스클럽은 그 바의 주인이 임의로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사실 할 일 없는 사람들의 모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던 중에 를르슈가 끼어들고 나서부터는 본격적인 체스클럽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그래도 본질은 똑같았다. 술 한 잔, 체스 한 판. 아니, 하나 더 끼자면 를르슈와의 관계까지 한 세트였다.
체스클럽의 사람들은 대부분 를르슈와의 한 판을 기대하고 있었다. 대부분 체스 한 판을 기대하고 있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섹스 한 판을 원하고 있었다. 를르슈는 누구와도 잘 수 있지만, 아무나하고 자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즐기기 위한 체스클럽에서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체스로 한정지으려고 했었다.
적어도 세 번째 남자친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세 번째 남자친구는 테라스로 나가는 를르슈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는 담뱃불을 붙이면서 를르슈에게 말을 걸었다.
“를르슈는 원래 여기선 체스 밖에 안 해? 재미없네.”
“체스클럽에서 체스를 하지 그럼 뭘해?”
“난 섹스도 해주는 줄 알고 왔지.”
“그럼 그런 가게라도 가는 게 어떨까. 그리고 난 담배 안 피우니까 저리 꺼져.”
“꺼지라니, 말이 너무하잖아.”
를르슈의 매정한 태도에도 남자는 웃는 낯이었다.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를르슈에게 한 대를 내밀었다. 어쩌라는 건지, 하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으면 남자는 말했다.
“담배까지 피우면 정말 끝내주게 야할 것 같아서 말이야. 내 로망이거든. 담배 피우는 미인.”
“당신 로망 같은 거 안 궁금해.”
“한 번만 입에 물어봐. 그럼 이제 신경 끌게.”
“…….”
평소라면 무시했을 말들이었지만, 를르슈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가 너무나도 ‘그’의 것과 닮아있었기에 를르슈는 홀린듯이 그 담배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대로 그것을 입에 물었다. 를르슈가 입에 무는 것을 본 남자는 를르슈에게 바짝 다가가더니 불을 들이밀었다.
신경 끈다더니. 를르슈는 불 붙은 담배를 들이마셨다. 익숙하게 담배를 피우는 를르슈의 모습에 남자는 흥미로워 하며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피울 줄 아네. 알려주려고 했는데.”
담배를 알려준 것은 첫 번째 남자친구였다. 를르슈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웠다. 옆에 있던 남자는 피우던 담배를 필터 끝까지 다 피우고 나서도 계속 를르슈의 옆에 있었다. 를르슈가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가만히 있던 남자는 를르슈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또 담배 피워줄래?”
뻔뻔하게 말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그’ 같아서, 를르슈는 그를 결국 세 번째 남자친구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관계는 어디까지나 몸만의 관계로, 를르슈가 그만두길 원할 때까지의 관계였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를르슈 뿐이었던 것 같았다. 를르슈는 멍든 뺨을 만지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했더니, 세 번째 남자친구였던 남자는 무식하게 손을 들었다. 를르슈는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한 대 정도 맞아주는 건 상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얼굴에 손을 댈 줄은 생각도 못했다.
를르슈의 생각으로는 그는 를르슈의 얼굴과 몸만 좋아한 줄 알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를르슈를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헤어지자는 를르슈의 얼굴을 가차없이 때릴 정도로 말이다. 그는 아직까지 들키지 않았고, 를르슈와의 궁합도 나쁘지 않은데 어째서 헤어지냐는 말을 주먹질 다음으로 쏟아부었다. 그런 말들에 를르슈가 답해줄 의리 따윈 없었다. 그저 얻어맞은 것으로 모든 위자료를 대신 했다고 치고, 를르슈는 호텔 방을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세 번째 남자친구가 뒤쫓아왔지만 를르슈는 거세게 저항했다.
그의 반항에 더 이상 세 번째 남자친구는 쫓아오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그대로 세 번째 남자친구였던 남자가 되었다.
부어오른 뺨을 하고서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저를 끔찍이 여기는 동생들이 캐묻는 것은 뻔했고, 그것에 거짓말을 하는 것은 싫었기에, 를르슈는 당분간 어디에서 머물지에 대한 고민을 했다. 평소라면 이렇게 곤란할 때에는 ‘그’를 의존했겠지만, ‘그’는 동생들과 다를 바 없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자기 인간관계의 척박함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은 몰랐다. 를르슈는 몸을 싣은 전차가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을 창밖으로 지켜보았다. 그는 종점으로만 들어보았던 정류장까지 가기로 결심했다.
그곳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나을 듯 싶었다.
도착한 곳에 떨어지자마자 를르슈는 흡연 구역을 찾았다. 그 몇 주 사이에 담배를 피우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담배 한 대를 다 태울 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를르슈는 그 주변을 둘러보았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를르슈는 믿기지 않은 사태에 직면하고 말았다.
‘그’가 있었다. 생각해보니 지금 내린 역은 겨울 바다가 예쁘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연인들이라면 겨울 데이트의 필수 코스 정도로 여겨지는 곳이었다. 도심에서 지나치게 멀리 떨어진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를르슈가 그것을 알고 있었던 이유는 ‘그’가 언젠가 여자친구와 그곳에 가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 있었다. 여자친구도 함께였다. 대체 몇 번째 여자친구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고, 마지막으로 소개 받았던 여자친구와는 전혀 다른 인상의 여자였기 때문에 를르슈는 저도 모르게 뒤로 숨어버렸다. 두 사람은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일방적으로 여자친구의 폭언을 들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시원하게 정강이를 걷어차이고, 고꾸라진 틈에 뺨까지 얻어맞았다.
를르슈는 그 일련의 과정들을 보고 있으면서, ‘그’가 한 번의 반항도 없었다는 것에 놀랐다. 게다가 ‘그’는 이런 과정이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여자친구는 플랫폼으로 바로 돌아갔고, ‘그’는 얻어맞은 얼굴을 쓱 쓰다듬으면서 역 바깥 쪽으로 걸어나왔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를르슈와 눈이 마주친 것은 순간이었다. 를르슈는 뒤를 돌아가려는 때에 ‘그’의 발소리가 빨라졌고, 를르슈는 덩달아 뛰기 시작했다. 가빠지는 숨 사이로 등 뒤에서 를르슈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더 빨리 달리고 싶었지만 물리적으로 ‘그’를 이기는 것은 무리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내딛는 발의 힘이 다할 때까지 달렸다.
역에서 멀리 떨어진 바닷가였다. 를르슈와 ‘그’는 마주보며 서있었다. 서로 얼굴에 시뻘겋게 맞은 자국을 남긴 채로.
“를르슈, 왜 도망 가는 거야?”
“너, 허억, 야말로, 후우, 왜 쫓아오는데?”
“갑자기 도망가니까…. 아니, 얼굴은 왜 그래?”
“신경 꺼….”
그렇게 달렸는데도 ‘그’는 숨 하나 거칠어지지 않았고, 를르슈는 헐떡대는 숨을 다스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다가와서 를르슈의 얼굴을 만지는 것에 피할 수가 없었다. 가까워지는 얼굴에 를르슈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진짜였다. 이제껏 닮았던 남자들과 비교할 수 없는 진짜. 를르슈는 제 멍든 뺨에 손을 대는 ‘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낮아짐을 느꼈다.
“를르슈, 누구한테 맞았어?”
가까이에 있는 그 천진한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은 싫었다. 그대로 를르슈의 마음을 읽어버릴 것 같아 무서웠다. 를르슈는 ‘그’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멀어지는 를르슈의 손을 덥썩 잡은 ‘그’와 시선이 맞았다.
“체스클럽에서 잠깐 몸 싸움이 있어서.”
“또 그런 곳을 다니는 거야?”
“그런 곳이라니, 건전한 취미생활에 왜 그렇게 참견이실까.”
“걱정하는 게 당연하잖아. 몸 싸움이 있을 정도면…!”
를르슈의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긴 ‘그’는 를르슈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걱정스러운 눈을 했다. 역시, 그 눈에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더는 어떻게 버텨야할 지 몰랐다. 나는 ‘그’에게 한없이 약하다. 이겨본 적이 없다. 그가 원한다면 원하는대로 늘 내어줬으니까. 그것이 익숙하고, 몸에 익어버린 사랑의 방식이었다. 를르슈는 쿠루루기 스자쿠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스자쿠의 맞아서 부어오른 뺨을 쿡 찌르면서 말했다.
“걱정할 거 없어, 스자쿠. 그나저나 너도 꼴이 가관이군.”
그제서야 스자쿠는 거리를 두었다. 를르슈의 지적에 저도 부끄러운지 뺨을 붉히면서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를르슈로서는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그것을 또 캐묻기엔 를르슈도 떳떳하진 못했다.
그저 그런가, 하면서 서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근데 를르슈는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겸사 겸사…. 바람도 쐬고 머리도 식히고. 너는?”
“음, 사실은 여자친구랑 왔는데. 이제 헤어졌어.”
하긴, 방금 전의 분위기는 다시 합칠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차인 주제에 스자쿠는 오히려 속이 후련한 사람처럼 웃었다. 바다라도 보러 갈까? 누군가가 한 말에 다른 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굴이 엉망인 남자 둘이서 걷는 바다는 억울할 만큼 예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양아들 를르슈와 의붓아버지 스자쿠... 로 쓰려고 했으나 유야무야
를르슈의 첫 기억은 뒤집힌 자동차에서 시작된다. 그 안에는 눈도 못 감고 죽어버린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고, 를르슈만이 무너진 뒷좌석에서 몸을 웅크린 채로 빠져나왔다. 경찰차와 구급차의 시끄러운 소리가 한참 뒤에 들려오고, 를르슈는 다른 어른들의 그림자를 보고 나서 정신을 잃었다.
그 다음 기억은, 병원에서 시작된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를르슈의 손을 붙잡고 있는 쿠루루기 스자쿠가 있었다. 그는 어린 아이를 처음 다루는 듯한 조심스러움으로, 하지만 목소리는 상냥하게, 를르슈에게 말했다.
—를르슈는 이제 나랑 같이 살 거야.
를르슈는 저를 데리고 간다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처음 보는 얼굴임을 알았다. 어른이라고 부르기에는 한참 앳되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가 자신을 맡아준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를르슈의 아무런 말도 없는 얼굴에도 스자쿠는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어디론가 가지 말고 제 옆에 있으라는 것처럼. 단단하게.
그때 당시에는 쿠루루기 스자쿠는 스무 살이었고, 이제 막 대학생이 되었던 무렵이었다. 한참이나 어렸던 그가 를르슈를 맡게 된 것은 우연의 연속이 부른 결과였다. 를르슈의 어머니 지인이 스자쿠의 아버지였고, 평소 그녀에게 신세를 지고 있었던 스자쿠의 아버지는 를르슈를 기꺼이 맡으려고 했으나, 그의 건강이 좋지 않아 입원을 하는 바람에 스자쿠가 를르슈를 맡게 된 것이었다.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들으면서,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진심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나를 데려가는 거, 귀찮은 일인데, 그냥 보육원에 보내도 되잖아. 아니면 나 혼자 있어도 돼.
그러자 스자쿠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 집은 너무 외로워. 를르슈 같이 착한 아이가 혼자서 살 수 없어.
내가 착한지 나쁜지 알지도 못하면서,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를르슈는 스자쿠가 정말 울 것 같아서 더는 말하지 않고 그의 옆을 따라 걸었다. 스자쿠의 보폭은 를르슈보다 배는 넓어서 따라가기가 힘들었지만, 열심히 뒤쫓아 걷고 있으면 스자쿠가 그를 끌어안았다. 단숨에 들어올리는 팔에 를르슈가 엉거주춤하게 스자쿠의 목을 붙잡았다. 그렇게 한동안 끌어안긴 채로 집까지 갔다.
스자쿠는 어리숙해보이던 첫인상과 다르게 보호자로써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는 를르슈의 어머니보다 더 꼼꼼하게 를르슈를 돌보았다. 다만 그런 스자쿠에게 부족한 점은 집안일에 대한 센스가 없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 쿠루루기 가문의 도련님이니 혼자서 집안일 같은 것은 해본 적도 없었을 것이고, 그런 곳에서의 자립심을 키우려고 집안에서 내쫓기듯 자취를 시작했다고 들었다. 그러면서 구해다 준 집은 나중에 딸려 들어온 를르슈가 같이 살아도 넉넉할 정도로 커다란 맨션이었다.
그런 맨션에서 살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스자쿠의 아버지가 죽었다. 평소에 앓고 있던 지병 탓이었다. 를르슈를 옆에 두고서 스자쿠는 의사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의사를 만날 때까지 한결 같이 굳은 얼굴이었다. 그 무렵의 를르슈는 아직도 스자쿠가 낯설었기 때문에, 그런 그에게 왜 그러냐고 묻지 못했다. 그저 스자쿠가 말해줄 때까지 물어보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여겼다.
장례식장에서의 스자쿠는 를르슈를 한 번 돌아보더니 혼자서 집에 있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를르슈가 어째서, 라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스자쿠는 를르슈의 어깨를 가볍게 쥐고서 말했다.
—아마 듣기 싫은 소리를 엄청 듣게 될 거 같아서…. 를르슈한테 그런 모습 보이기 싫거든.
스자쿠의 애원과도 같은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서 집에 있겠다고 말했다. 스자쿠의 맨션을 집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인가, 를르슈는 몇번이고 그런 생각을 했었다.
어차피 자기를 맡아주려고 했던 아버지가 죽었으니 스자쿠에게는 를르슈를 돌볼 의무는 없었다. 그러면 를르슈는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봤자, 어차피 또 다른 곳으로 떠나야겠지. 를르슈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직 풀지 못한 짐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야 스자쿠는 겨우 들어왔다. 한 손에는 편의점 도시락 두 개가 들려있었다. 를르슈, 밥 먹을래?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리 없는 를르슈의 대답에 스자쿠는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평소보다 조금 가라앉은 기색으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를르슈는 나랑 계속 살고 싶어?
—응?
—어른들이… 나도 어른이긴 하지만, 나보다 더 늙은 사람들이 있잖아.
—응.
—그 어른들이 나를 자꾸 다시 집으로 들여보내려고 그래. 그럼 를르슈랑 따로 살아야 되는데.
—응.
—난 를르슈랑 계속 같이 살고 싶은데, 만약 를르슈가, 싫으면…. 더 좋은 곳으로 보내줄 수 있어.
—더 좋은 곳은, 어디야?
—사실 나도 잘 몰라. 어른들이 말하는 걸 따라해봤어.
를르슈의 예상은 맞았다. 스자쿠에게는 이제 를르슈를 돌볼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주변에서도 그것을 알고 를르슈를 떼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럼 를르슈는 떠나는 것이 맞았다. 어차피 어디에 있던 간에 예전처럼 ‘집’이라고 불리는 곳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를르슈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에, 스자쿠는 편의점 도시락의 절반 가량을 남기면서 한숨을 쉬었다. 입맛이 없어, 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자쿠의 그런 모습에 를르슈도 먹던 것을 그만두었다. 더 먹었다가는 얹힐 것 같았다.
목구멍 속이 메이는 것 같아서, 를르슈는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서 스자쿠에게 말했다.
—나는 어디에 있어도 상관 없는데.
—그래?
—어디에 가도, 이제… 옛날처럼 못 살거니까.
그것은 스자쿠의 앞에서 처음으로 내보인 진심이었다.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옛날처럼’이라는 말의 의미를 아는 것 같이, 스자쿠는 를르슈를 보고서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는 자주 이런 표정을 지으며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손을 잡아왔다.
—내가 를르슈의 진짜 가족이 될 수 없다는 건 알아. 그래도 를르슈랑 있으면 행복하니까,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왜? 스자쿠한테 짐 밖에 안 될 텐데.
—아니, 행복해. 같이 있으면 외롭지 않아.
같이 있으면 외롭지 않다는 말은, 혼자 있으면 외롭다는 말인가. 를르슈는 혼자서 그 말을 곱씹어 생각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손을 붙잡고 있다가 놓았다. 그의 체온이 떨어지는 것이 어딘가 아쉽게 느껴지던 를르슈는 스자쿠의 떨어지는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를르슈의 시선에 스자쿠는 의아해하면서도 다정하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스자쿠 손이 따뜻해서.
그저 손이 따뜻하다는 말이었는데, 스자쿠는 를르슈를 끌어안았다. 갑자기 끌어당겨진 몸은 저보다 더 따뜻한 스자쿠의 체온에 녹아들어갔다. 하루 종일 춥게 있었던 것도 아닌데, 몸도 마음도 노곤하게 녹는 기분이었다. 스자쿠의 등에 손을 두르면서, 를르슈는 스자쿠 옆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한 말을 전하지 않았음에도, 스자쿠와 를르슈는 그렇게 계속 같이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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