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르슈는 피곤했다. 도쿄까지 오는 비행기에서도 업무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교토로 오는 길에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쿠루루기 저택으로 몸을 옮기고 나서도 저택의 소개를 받고 저녁까지 먹고 나서야 겨우 쉴 수 있었다.
안내 받은 방은 일본식이었지만 드디어 혼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하니 그 마저도 감지덕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외부 손님용 객실이었기 때문에 욕실도 따로 준비되어 있다는 점에서 편리했다. 를르슈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서 잠자리에 들었을 때는 이미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침대가 아닌 곳에서 잔다는 것이 낯설긴 했지만 잠자리는 편안했다. 다음날 아침, 아직까지도 시차에 대한 적응 때문에 몸이 무겁긴 했지만 아주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주어졌고, 를르슈는 그 안에 자기가 맡은 바의 임무를 해내야한다고 생각했다. 단 일 초의 시간도 허투루 쓸 수가 없었다.
를르슈의 일본 방문은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제국에서 함께 온 호위 인력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형제들이 를르슈가 일본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 불안함을 표했지만, 를르슈는 그런 호위 인력이 없더라도 자신이 있었다. 쿠루루기 겐부는 친 브리타니아적 인물이었고, 브리타니아 제국의 황자를 인질로 삼아 전쟁을 벌이는 그런 멍청이는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를르슈를 죽인다고 하면 승산 없는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고, 를르슈가 목적을 달성하고 브리타니아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일본과 브리타니아 제국 사이가 더욱 긴밀해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어느 쪽으로 보아도 를르슈에게는 아쉬울 것이 없었다. 그리고 만약 죽는다 하더라도 쉽게 죽어줄 생각도 없었다. 그런 살벌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를르슈는 문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대답했다.
“무슨 일이지?”
“전하, 아침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따로 식당에 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
를르슈는 제 몫의 밥상이 들어오는 것에 신기했다. 도쿄에 있었을 때에는 주로 호텔에서 머물렀고, 그때의 생활도 브리타니아와 다를 바 없었다. 방 안에서의 식사를 마치고 나면 또 밥상을 가져다주었던 사람이 치워주었다. 모든 생활이 다 방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를르슈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하지만 낯선 일에 하루 종일 신기해할 틈은 없다. 를르슈는 어제와 같이 옷을 갖춰 입은 채로 나왔다. 평소보다 더 얌전한 수트 차림이긴 했지만 이 저택에서는 꽤나 튀는 복장이었다. 스스로도 느껴지는 그 위화감에 를르슈는 한숨을 내쉬었다.
기나긴 복도를 지나가며, 중앙정원이라고 소개 받았던 그 곳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어제 ‘도련님’이라고 불렸던 남자가 또 다시 서있었다. 오늘도 담배를 피울 모양인지 담뱃불을 붙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를르슈는 그런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전하.”
그는 담뱃불을 붙이는 것 대신에 를르슈에게 인사했다. 전하, 라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부르는 것이, 어제 겐부가 말한 대로 를르슈의 정체를 들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전하라고 불러놓고 나서 하는 행동은 손을 흔드는 것이었다. 팔랑팔랑 흔들리는 손끝에 를르슈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 이런. 죄송해요.”
전혀 죄송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를르슈는 저에게 여전히 고개 한 번 숙이지 않고서 흔들던 손을 내려두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아, 이름은 스자쿠였지. 그 아버지의 그 아들 같은 이름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아버지의 기백을 닮기는커녕 어제보다 더 맥없어 보이는 것 같았다.
“길이라도 잃으셨나요? 도와드릴까요?”
“아니, 괜찮다. 혼자서도 나갈 수 있어.”
“뭐… 그러시다면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저에게 자기소개도 하지 않고 또 다시 인사는 손으로 흔드는 것으로 대체해버리는 이 불경한 놈. 를르슈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것을 따지려고 드는 것도 시간 낭비였다.
그래, 이 남자와 얽히면 모든 것이 시간 낭비다. 를르슈는 최대한 그에게서 멀어지기로 결정했다. 쿠루루기 가문의 후계자라고는 하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 했고, 교토6가와는 크게 관련도 없어보였다. 만약 있다고 하면 그건 오히려 교토6가의 수준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오합지졸이라면 이쪽에서 사양이었다.
를르슈는 어제 들어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나갔다. 똑같아 보이는 복도와 벽 뿐이었지만 를르슈는 그정도에서 길을 잃을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에 온 그 자체도 똑같았다. 아무리 막연해보이는 일이더라도, 를르슈가 못해낼 것은 없었다.
*
점심을 먹고 한참 후, 저녁을 먹기 직전에 를르슈는 쿠루루기 저택으로 돌아왔다. 잔뜩 찡그린 인상이 오늘의 결과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스자쿠는 심심풀이로 중앙정원에 담배를 피우러 나왔다가 어린 여자 사용인들과 말을 섞던 중에 를르슈와 마주치게 되었다. 를르슈는 어떤 길을 가더라도 중앙정원을 꼭 지나쳐가는 것으로 보아, 이쪽으로 향하는 길 밖에 모르는 듯 했다. 하긴 이 저택은 미로처럼 넓고 헤매기가 쉬우니 조금 돌아가더라도 단순한 길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방학이면 매년 교토에서 보냈던 스자쿠는 여러가지 루트를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를르슈에게 말해줄 의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를르슈는 스자쿠를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스자쿠 역시 를르슈가 좋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눈이 마주쳤는데 그에게 인사를 안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스자쿠는 손을 흔들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전하. 외출은 잘 하셨나요?”
“…신경 써줘서 고맙군. 이쪽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우선 손님이시니까 신경을 안 쓸 수는 없는 거죠.”
스자쿠는 같이 떠들고 있던 여자 사용인을 다시 부엌으로 돌려보냈다. 그럼 오늘 밤에 부탁할게, 라는 말을 속삭여주면 그녀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달아났다.
를르슈는 그 모습을 보고서 질린 듯이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조금 의아한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그가 저에게 정이 없다는 것은 눈치껏 알고는 있지만 그래봤자 어제 오늘 잠깐씩 보았을 뿐인데, 조금 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을 다 일일이 수정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도 다 떠난 중앙정원에서 스자쿠는 뒤늦게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무래도 이 겨울에는 유카타 차림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감기라도 걸릴 것 같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스자쿠는 작은 소리로 웃었다. 감기에 걸린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다음날. 를르슈는 또 중앙정원 쪽을 지나쳐서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리고 스자쿠는 또 다시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 중앙정원에 나와있었다. 를르슈는 스자쿠를 마주하자마자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스자쿠는 그 모습에도 또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전하.”
“…너는 매일 이 시간이면 여기에 있는 건가?”
“우선은 그렇죠. 규칙적인 생활이 필요하다고 의사가 그랬으니까요.”
“…….”
그는 뒤늦게 스자쿠가 ‘요양’ 온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린 것 같았다. 하지만 스자쿠도 알고 있었다. 자신은 보통의 아픈 사람들과 달라보이며, 요양 보다는 꾀병에 가까운 의지박약이라고 아버지가 못을 박았다는 것도.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의사의 방문마저도 늘 정상이라는 말만 늘어놓으며, 나머지는 스자쿠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런 사람들과 를르슈도 크게 다를 바 없어보였다.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담배부터 끊는 게 어때? 건강에 좋아보이진 않는데.”
“그럼 하루 종일 방 안에 있는다고 아버지가 뭐라고 하셔서요.”
“운동이라도 하는 건?”
“지겹거든요.”
“외출을 한다거나.”
“이래보여도 아파서.”
스자쿠는 마지막 말에 왼쪽 손목을 들어보였다. 유카타 자락이 들려올라가며 드러나는 손목에는 지워지지 않은 자상의 흉터가 가득했다. 를르슈가 있는 거리에서도 보일 정도의 큰 흉터였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손목을 보고서 순간 입을 다물었다.
스자쿠는 그런 그의 반응에 역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손을 내렸다. 이로써 를르슈가 저에게 하는 참견은 좀 잠잠해질 것 같았다.
“전하는 이쪽 길 밖에 모르시죠? 중앙정원 쪽으로만 다니는 길로만 다니시는 걸 보니까.”
“이쪽 말고 다른 길이 있나?”
“있습니다. 조금 복잡하지만 더 빠르게 지나가는 길이죠. 이쪽으로 다니면 단순해서 외우기는 쉽지만….”
그런 대신에 나를 계속 만나야 할텐데, 라는 말을 삼켰다. 를르슈는 그 뒷말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럼 그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은 하나였다. 그 길은 어디냐, 안내해라— 정도일 것이다. 조금 귀찮지만 스자쿠가 한 번 안내하면 그는 이제 중앙정원 쪽으로 다니진 않을 것이다.
“그 길, 알려드릴까요?”
를르슈가 그런 말들을 꺼내기 전에 스자쿠가 먼저 나섰다. 담배는 길을 알려주고 나서 자신에게 주는 포상으로 주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를르슈는 고개를 저었다.
“됐다. 어차피 그 길이나 이 길이나, 들어오고 나가는 데에는 문제될 건 없으니까. 그리고 남의 집을 속속들이 아는 취미도 없고.”
“……그럼 계속 저를 만나셔야할 텐데요.”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허, 하고서 혀를 찼다. 그리고는 스자쿠에게 말했다.
“네가 뭐라고, 내가 널 피해야 하지?”
피하고 싶으면 네가 피하라는 말이었다. 스자쿠는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를르슈의 시선이 닿자, 그것을 피하지 않고서 말했다.
“그러게요. 제가 뭐라고.”
마치 나는 주제를 잘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스자쿠의 무기력함에, 를르슈는 더는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졌다. 같이 있으면 덩달아 기운이 빠진다. 그가 두르고 있는 것은 여유의 분위기가 아니라 패자 특유의 나태함이었다.
를르슈는 더는 대꾸하지 않고 제가 머무는 방이 있는 길목으로 돌아갔고, 스자쿠는 그런 를르슈의 다소 거친 발걸음 소리에 소리 죽여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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