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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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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 스자쿠 X 를르슈 전하

DOZI 2021.01.22 21:35 read.421 /

쿠루루기 스자쿠의 왼쪽 손목, 옷자락에 드러나는 부분에는 길게 서너 번 그어진 칼 자국이있었다. 아무렇게나 그은 듯 하더라도, 누가 보아도 그것은 자살 시도의 흔적이었다. 스자쿠가 칼부림을 하던 그 다음날, 스자쿠는 교토의 본가로 쫓겨나듯 짐을 옮겼다. 그리고 한 발자국도 나오지 말고 숨만 붙은 채로 살라는 아버지의 명을 따라, 그는 그렇게 살고 있었다. 저택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채로, 숨만 붙은 채로, 아무것도 바라는 것도 없이, 원하는 것도 없이 무의미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조금 달랐던 것 같았다. 주변의 기대에 맞춰서 모든 것을 다 해내려고 했었다. 공부라면 공부, 운동이라면 운동.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의 대가가 돌아왔다. 부족한 없는 삶이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과 아버지가 조금 엄격한 것만 빼면, 스자쿠는 인간으로서는 아쉬움 없이 완벽한 삶을 살고 있었다. 아마도 모두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쿠루루기 가의 유일한 후계자였지만, 지금은 쿠루루기 겐부의 수치로 남았을 것이다. 고장난 인형. 그것은 스자쿠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어차피 인형은 혼자서 움직이지 못하니까, 고장이 나든, 완벽하든 똑같아.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 스자쿠는 자신이 이제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완전하게 끝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실패한 패배자를 아버지는 용서할 리가 없었다. 요양이라는 이름으로 교토로 보내졌다. 하지만 요양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들 쉬쉬하고 있을 뿐이다.

일주일에 한 번 찾아오는 의사와 의미 없는 상담. 사용인들이 저를 두고 하는 소리들. 하는 것 없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혹은 여자를 안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그래도 스자쿠는 아버지의 말을 따랐다.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으며, 숨만 붙은 채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우스웠다. 스자쿠는 언제나 아버지의 말에서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숨만 붙은 채로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새삼 다를 것 없는 인생이다. 스자쿠가 두 번째 자살을 결심한 날이었다. 

 

스자쿠가 교토 본가로 오고 나서, 사용인들이 가장 분주해보이는 날이었다. 스자쿠는 칼을 찾기 위해서 저와 자주 어울리던 여자 사용인 하나를 부르려고 할 때였다. 과일을 먹고 싶은데 네가 옆에서 깎아주지 않을래, 라고 말하면서 칼을 빼돌릴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목덜미를 찔러서 더 이상의 지체 없이 죽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 사용인은 쉽게 보이지 않았고, 스자쿠는 복도를 돌아다녔다.

그날따라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고, 쓸고 닦으며 물건을 정비하는 소리가 자주 들렸다. 스자쿠는 저택 바깥 쪽 창문에 몸을 기대며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다.

 

“브리타니아 손님이 왜 교토까지 오시는 거래요?”

“교토6가 사람들을 만나려고 오는 거겠지, 뭐.”

“스자쿠 도련님이 계시는데 괜찮을까요?”

“도련님이야 뭐, 원래 있는 듯 없는 듯 하시는 분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있는 듯 없는 듯하다. 그것이 스자쿠에 대한 이야기였다. 스자쿠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돌아섰다. 브리타니아에서 손님이 온다면, 그 손님이 교토에 올 때까지는 아버지가 그를 안내할 것이다. 거의 일 년 반만에 만나는 아버지는 저를 찾아올 것인가. 확실한 것은 오늘은 일을 치르기엔 글러먹은 날이라는 것이었다.

또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스자쿠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당으로 나가면 아무도 없었다. 담배나 한 대 태우기 딱 적당했다.

 

*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는 생각보다 높은 대문과 커다란 쿠루루기 저택에 놀라고 있었다. 도쿄에 있던 저택은 완벽하게 브리타니아식이었던 것에 비해, 교토에 있는 본가는 완전한 일본식이었다. 몇 개의 문을 넘고 넘어가는 와중에 쿠루루기 겐부가 입을 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제 우식이 지금 여기서 요양을 하고 있지만 아픈 몸이라 전하께 인사드리긴 어려울 듯 합니다.”

“그건 괜찮다. 그나저나 엄청… 커다란 건물이군.”

“전하께서 머무시는 동안에 불편함이 없게 하겠습니다. 지금 비공식적 방문인지라 따로 호텔을 이용하기도 어려우시다고 하셨으니.”

“아아, 고맙군. 교토에는 인맥이 영 없어서 말이야.”

 

를르슈의 말에 겐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를르슈의 이번 일본 방문의 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방에 도착하고 나면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게 되었다. 독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듯 겐부가 먼저 잔을 들었다.

 

“그나저나 전하께서는 어리신데도 수완이 훌륭하시군요.”

“할 줄 아는 걸 할 뿐이다.”

“훌륭하십니다. 제 아들놈도 전하와 같은 나이지만… 약아빠져서는.”

 

를르슈는 어렸을 적에 자주 아팠던 여동생을 떠올렸다. 그녀의 건강을 늘 염려했던 를르슈와 다르게, 겐부는 자기 아들의 건강에 대한 염려보다 귀찮음이 역력해 보였다. 잔을 내려놓고 혀를 차는 겐부는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머무시는 동안, 그놈이 얌전히 있길 바랄 뿐입니다. 전하가 머무신다는 말은 전하겠습니다만… 부족한 놈인지라 실례를 끼칠까 걱정이 되는군요.”

“하하, 그래도 쿠루루기 겐부의 아들이라면 자부심이 있을 텐데.”

“그럴 그릇이 못되는 놈입니다.”

 

차를 한 잔 다 비우고 나면 겐부는 를르슈에게 집안을 한 번 구경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 뒷문이 열리면서 사람이 나왔다. 나이가 지긋한 여자가 를르슈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전하의 짐은 미리 다 정리해두었으니 따라오시면 됩니다. 그 말에 를르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겐부는 저 역시 일정이 있기 때문에 금방 도쿄로 떠나야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머지는 를르슈가 알아서 하라는 이야기였다. 쿠루루기 겐부는 예상대로의 남자였다. 저에게 유용한 패를 쓰는 듯 하면서도, 결정적인 때에는 발을 빼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브리타니아가 교토6가 사람들과 커넥션을 갖는 것은 오로지 를르슈의 몫이라는 것이었다.

를르슈가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던 중에, 중앙 정원이라고 소개한 곳에서 어떤 남자가 서있는 것을 보았다. 집안을 소개해주던 여자는 고개를 숙여 그 남자에게 인사했다. 

 

“스자쿠 도련님, 일어나셨습니까? 지금 겐부 님과 손님이 오셔서 인사드리는 중입니다.”

“아버지가 오셨구나. 그래. 그쪽이 손님?”

“네, 그렇습니다.”

 

간단한 대화였다. 를르슈와 눈이 마주친 스자쿠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에게 이름을 묻거나, 다른 것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어딘가 어린듯해 보이는 인상은 그가 자신과 동갑이라는 것을 겨우 상기시켰다. 녹색 눈동자가 저를 보고서는 휘어지게 웃고는, 그는 손을 흔들었다. 날씨가 제법 추운데도 유카타 자락만 팔랑거리고 있었다.

 

“난 여기 더 있다가 들어갈게. 손님한테 잘 소개시켜 드려.”

 

그리고는 를르슈에게서 등을 돌렸다. 흔들거리는 손, 그것이 를르슈에 대한 인사였다. 여자가 당황한 듯이 스자쿠를 불렀지만, 스자쿠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옅은 담배냄새가 났다. 곧 스자쿠가 있는 곳에서 담배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서 를르슈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인사는 됐으니 방으로 안내해 주면 좋겠군.”

“네, 알겠습니다….”

 

여자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도련님이 원래 저러진 않았어요’라는 말을 했다. 를르슈는 쿠루루기 겐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요양을 취할 정도로 아픈 몸, 약아빠진 놈, 그럴 그릇이 못되는 놈. 하지만 실제로 만나보면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정신머리가 아파보였다. 특히 그 웃는 눈이 기분 나빴다.

그런 놈과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를르슈는 해야할 일이 많았다. 교토에 있는 시간을 최대한 유용하게 써야만 했다. 

 

*

 

스자쿠는 제 방에 찾아온 아버지를 보고서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녀오셨어요, 아버지. 스자쿠의 인사에 겐부는 보기 싫은 것을 보듯한 시선으로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브리타니아에서 손님이 왔다.”

“알아요, 방금 전에 만났으니까.”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전하다. 교토에 머무는 동안은 여기서 지내기로 하셨으니까 실례를 끼치지 말도록 해라.”

“…실례라면, 어떤 실례를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쓸데 없는 짓거리 하지 말고 얌전히 지내라는 이야기다. 알겠어?”

 

쓸데 없는 짓.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버지는 할 말이 끝났는지 그대로 돌아서 나가버렸다. 스자쿠는 자리에 누워서 한숨을 쉬었다. 브리타니아에서 온 손님,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전하, 그렇다면 황족이겠군, 얌전히 지내라는 이야기, 어떻게 이 이상 얌전히 지낸단 말인가. 스자쿠는 만사가 귀찮아졌다.

사람들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런 와중에 술을 내달라는 말을 하기에도 미안했다. 어쩔 수 없다. 오늘은 맨 정신으로 자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