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여행지는 정해졌다. 도시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시골 마을이고, 거기에 더 동떨어진 별장 하나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별장은 커? 네 명이서 머물 거잖아. 나나리는 따로 방이 있어야 하는데. 를르슈가 스자쿠에게 물어봤을 때, 스자쿠는 어렸을 때 살았던 기억을 떠올리더니 모르겠다고 말했다. 방은 많았는데… 집 자체는 마당에서 검도 연습을 할만큼은 됐는데, 그때는 어려서 몸이 작았으니까 가능했던 걸지도.
설명을 듣기로는 옛날에 지어진 일본식 저택이고, 그 어렸을 때 스자쿠 도련님이 머물 곳이라고 나름의 보수공사도 들어가기도 했었다니 크게 불편한 것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인터넷도 돼! 자랑스럽게 말하는 스자쿠의 목소리는 벌써 들떠있었다.
“별장까지 가는 길은 알아?”
“응. 공항까지 데리러 온대. 짐만 잘 챙겨서 가면 돼.”
“그렇군.”
“얼마나 있을까?”
“알아보니까 산도 가깝고, 바다도 가까우니까… 좀 여유있게 돌아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흐음. 난 방학 내내 있어도 좋아.”
빨대를 입에 물고서 아이스 초코를 빨아들인 스자쿠는 히죽 웃었다. 여행 가는 거, 기대 된다. 스자쿠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를르슈는 달력을 빤히 쳐다보았다. 애들 방학은 8월 한 달 뿐이고…. 애들도 계속 같은 장소에 있으면 지루하려나.
“기간은 애들이랑 말해보고 정하자. 로로랑 나나리도 일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상관 없어. 아, 둘이서 더 오래 있다가 올까?”
“애들끼리 어떻게 비행기 태워서 보낼 생각을 해?”
“걔네 고등학생이야.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아니면 나랑 같이 있기 싫어?”
“…아직은 어려. 그리고 너랑 같이 있는 건… 싫은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건 별개야.”
를르슈의 살짝 붉어진 얼굴에 스자쿠는 더 캐묻지 않았다. 흐흥, 그래. 넷이서 같이 갔다가 같이 돌아오자. 괜히 를르슈와 얼굴을 가까이 하고 있으면, 를르슈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떨어져. 괜히 뺨을 밀어내는 손에 피식 웃으면서 스자쿠는 재빠르게 를르슈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를르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카페. 점심시간도 훌쩍 지난 오후 3시의 한적한 카페 안이었다. 주변에 사람이 별로 없고 눈이 마주친 사람도 없다는 것에 안심한 를르슈는 스자쿠의 뺨을 꾸욱 잡아늘렸다.
“아, 아파!”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아무데서나…!”
“그치만 를르슈가 귀여우니까!”
“내 탓으로 돌리지 마.”
스자쿠의 뺨이 얼얼해질 때까지 쥐고 흔든 를르슈는 겨우 놓아주었다. 를르슈의 단정한 글씨체로 적힌 여행 계획서를 읽어보던 스자쿠는 기분이 좋은 듯이 웃었다.
“우리 결혼하고 나서도 이렇게 계획 짜서 여행 다닐까?”
“결혼?”
“응.”
를르슈는 펜 뚜껑을 닫으면서 냉정하게 말했다.
“난 너랑 결혼 안 해.”
“응? 왜?”
“애초에 일본에서 결혼이 되는 것도 아니고.”
“브리타니아에 가서 하면 되잖아.”
“……음, 현실적으로 말이야.”
를르슈는 여행 계획서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를르슈의 진지한 모습에 스자쿠는 괜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현실적, 이라는 단어를 입밖으로 내놓고 나니 를르슈도 말하기가 두려워졌다. 스자쿠와 연애하는 것은 즐겁다. 사랑을 나누는 행위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도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결혼은? 를르슈에게 미지의 영역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집은 그렇게 화목하지 못해. 아버지는 정부가 너무 많고, 이복형제들은 발에 치일 정도로 더 많고. 일반적인 결혼에 대한 환상도 없고, 그래서 좋은 배우자가 될 자신은 없어.”
“아, 다행이다.”
“응?”
“난 를르슈가 우리 집안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결혼 안 해준다고 하는 줄 알았어.”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대단한 사람은 너네 아버지지, 너는 그냥 일반인이니까 자의식 과잉에 빠져있지 마. 를르슈의 냉정한 지적에 스자쿠는 속없이 웃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나도 아버지랑 사이가 그렇게 좋은 편도 아니니까, 우리집도 화목하진 않아. 엄마는 어렸을 때 돌아가셨으니까 부모님 사이도 어땠는지 잘 기억도 안 나고. 를르슈랑 사귀고 나서부터 그나마 아버지랑 이야기 하게 되었는걸.”
“굳이 내가 아니었어도….”
“아니, 를르슈여야만 했어. 그래서 지금 좀 나아진 거야. 이건 정말 사실이야.”
단호한 스자쿠의 말에 이번엔 를르슈의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그것이 곧 를르슈가 패배를 시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그렇다고 하고…. 아무튼, 그거랑 별개야.”
“지금은 충분히 좋은 애인인데. 여기서 더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할 생각은 없어?”
“없어.”
“경험치도 충분한데? 바로 레벨 업인데도?”
“너는 결혼하고 싶어?”
“응.”
바로 즉답하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랑?”
“당연하지.”
왜 그러고 싶냐고 물어보고 싶진 않았다. 스자쿠는 다정하게 대답해줄 것이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스자쿠와 결혼하겠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둘까. 를르슈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여행 계획서를 가방 안으로 집어 넣었다.
“굳이 결혼이 아니어도 지금까지도 나쁘지 않잖아, 우리.”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조금 가라앉으려는 기분을 애써 다잡으며 말했다.
“를르슈는 나를 못 믿는거야?”
“정확히는 네가 아니라 나를 못 믿는 거지.”
만약 프로포즈를 한 거라면 지금 장렬하게 차였다고 생각하며, 스자쿠는 를르슈의 손을 붙잡았다. 언제나 서늘하게 느껴지는 그 체온이 제 손의 온도를 닮아가면서 따뜻해지고 있었다. 를르슈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솔직하다. 스자쿠는 시선을 맞추지 않고서 중얼거렸다.
“네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
“그래도 나한테 기회는 주면 좋겠어. 이번 여행에서 그 기회 주지 않을래?”
저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스자쿠의 모습은 드물었다. 를르슈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그를 바라보면, 스자쿠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래, 라고 대답하는 목소리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스자쿠가 원하는 대답을 바로 해줘야할지, 를르슈는 망설였다.
망설이는 를르슈를 보면서 스자쿠는 후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스자쿠, 하고 이름을 부르려는데 스자쿠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아버지랑 저녁 약속이 있어서. 밤에 연락할게.”
그럼 잘 가, 하고서 손을 흔드는 스자쿠의 뒷모습에 를르슈는 흐려지는 목소리로 인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왠지 미안한 마음에 그 등에 더 시선을 둘 수가 없었다. 를르슈는 한숨을 내쉬면서, 가방 속에 있는 여행 계획서를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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