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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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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처증 남편과 의부증 아내

DOZI 2026.02.25 13:02 read.105 /

스자쿠가 를르슈의 침대에서 눈을 뜬 것은 오랜만이었다. 거의 보름 만이었다. 좁은 세미 더블에서 다 큰 성인남자 둘이서 서로 끌어안고 자는 건 거의 좋아 죽을 사이가 아니면 없을 일이었다. 스자쿠와 를르슈는 서로 좋아 죽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요즘은 ‘좋아’하는 사이보다는 ‘죽는’ 사이에 가까워진 것 같았다.

먼저 눈을 뜬 스자쿠가 엉망이 된 뒤통수를 벅벅 긁으면서 하암, 하고 하품을 하고 있을 때였다. 스자쿠… 하고 옆에서 를르슈가 어렴풋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뭐어… 하고 늘어지는 대답하고 나면 를르슈는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냈다. 어딘가 신경질적인 손짓이었다. 스자쿠는 ‘또 왜 저러지?’라는 생각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를르슈는 어마어마한 말로 아침을 열었다.

 

“내 방에서 당장 꺼져, 이 강간범.”

 

사랑하는 사이에 강간범은 좀 너무하지 않아? 어젯밤은 좀 억지를 부리긴 했어도 강간은 아니었다. 분위기를 읽을 줄 모르고 눈치가 없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막무가내라는 것 정도는 스자쿠도 알고 있었다.

 

“어제 했던 걸 강간이라고 하는 거야? 를르슈도 즐겼잖아. 마지막엔 안에 싸달라고 조르기까지 하고.”

“너는 그런 점에서 더더욱 강간범이다. 반성의 기미가 없어.”

 

를르슈의 쉰 목소리 치고는 또렷한 발성에 스자쿠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이건 내 잘못은 아니잖아, 라고 를르슈에게 대꾸했다. 스자쿠를 쳐다보던 를르슈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게 느껴졌다. 스자쿠의 말이 황당한 표정이었다.

 

“를르슈가 먼저 내 사생활을 침해했잖아. 내 휴대폰 해킹해서 멋대로 메시지 읽고.”

“해킹? 네가 단순하게 네 휴대폰 비밀번호를 710125로 해둔 게 문제지. 나는 우연히 그 번호를 누른 것 뿐이다.”

“우리집 도어락 비밀번호랑 똑같이 한 거잖아!”

“그래서 혹시나 열릴까 하는 마음에 눌러본 것 뿐이야!”

“그러니까 내 휴대폰은 왜 열어보려고 했는데?!”

 

를르슈는 이번엔 대답 대신에 이불을 뒤집어썼다. 대답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항변이었다. 스자쿠는 어이가 없었다. 마음대로 사람을 의심하고 물증 잡겠다고 휴대폰이나 해킹하는 주제에 나를 강간범이라고 불러? 스자쿠가 중얼중얼거리는 소리에도 를르슈는 대꾸 하나 하지 않고 뒤집어 쓴 이불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시간을 보면 벌써 오후 1시였다. 늦은 점심을 먹고 오후에 있을 아르바이트를 가야했다. 스자쿠는 벗어둔 티셔츠와 트레이닝복 바지를 꿰어입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침대에서 몸을 둥글게 하고 있는 를르슈에게 물었다.

 

“를르슈, 점심 먹을거야?”

“너랑은 안 먹어.”

“왜? 밥상 차릴 때랑 설거지 할 때 한 번에 하게 같이 먹자.”

“…그러니까 더 먹기 싫어.”

“내가 강간범이라서?”

“그래.”

 

를르슈는 스자쿠가 강간범이라는 의견을 완전히 굳히려는 듯 했다. 스자쿠는 를르슈를 더 달래볼까 하다가 포기하기로 했다. 아무리 그래도 강간범은 너무하잖아. 어젯밤은 좀 심하긴 했어도 강간은 아니었다고. 오히려 를르슈가 먼저 다리 벌리고 위에 올라타기도 했으면서 무슨 강간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스자쿠는 속으로 꿍얼대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를르슈는 넓어진 침대 면적 만큼 꿈지럭거리면서 침대에 편하게 누워있었다.

부엌으로 나온 스자쿠는 를르슈가 어제 저녁으로 차려놓았던 카레를 먹기로 했다. 하루 묵힌 카레는 더 깊은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아마도 기분 탓이겠지만. 스자쿠는 혼자서 카레를 입에 욱여넣으면서 맛있게 먹었다. 그래도 혼자서 먹는 건 좀 쓸쓸하긴 했다. 를르슈는 고집쟁이야. 이상한 데서 자기 주장이 강하고. 스자쿠는 혼자서 씩씩하게 설거지까지 마쳤다.

외출을 위한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스자쿠는 근 12시간 만에 자기 방에 들어갔다. 나갈 때 엉망으로 해둔 것치고는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는 를르슈가 정리를 한 번 해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남의 방 청소를 왜 자꾸 하는 거야, 를르슈는. 나도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는데.

어차피 자기 방에 있을 를르슈에게 들리지 않을 한숨을 팍팍 내쉬던 스자쿠는 옷을 갈아입고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오늘의 아르바이트는 술집 아르바이트였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계속해서 일하는 고된 아르바이트였지만 그래도 시급이 좋았다. 이번 달 월급을 받으면 를르슈랑 여행 갈 자금도 어느 정도 모일 것 같았다.

정작 같이 여행 갈 를르슈는 나를 강간범 취급하고 있지만. 스자쿠는 자신이 나가는 길에도 배웅조차 하지 않는 를르슈가 야속했다. 그래도 를르슈한테 들리도록 인사는 하고 나왔다. ‘강간범 일하러 간다—!’ 하고.

 

“스자쿠 군 휴대폰은 신기해.”

“뭐가?”

“여기, 항상 초록색 불이 들어와 있잖아.”

“음…? 원래 그런 게 아니야?”

 

손님이 한적해진, 마감에 가까워진 새벽이 되어서야 같은 아르바이트생과 시시덕거리며 놀 시간이 되었다. 대충 테이블을 정리하면서 가끔씩 휴대폰을 하고 있을 때였다. 스자쿠 외 다른 아르바이트생은 스자쿠와 를르슈가 다니는 학교의 근처에 있는 여대에 다니는 대학생으로, 등록금을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성실한 여자아이였다. 그런 그녀와 휴대폰 번호를 교환한 게 엊그제 일이었다. 아르바이트의 대타를 맡길 때나 연락하자고 교환한 것이었다.

휴대폰을 하고 있던 스자쿠에게 그 아르바이트생은 ‘초록색 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스자쿠는 한 번도 신경써본 적이 없었다. 이 초록색 불은 휴대폰을 개통할 때부터 계속 켜져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 휴대폰은 어떤지 모르겠네. 스자쿠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아르바이트생은 자기 휴대폰을 보여주었다.

 

“이거 봐, 평소에는 꺼져있어. 초록색 불은 카메라가 켜질 때만 들어와.”

 

그 말은 사실이었다. 스자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난 맨날 초록색 불이 켜져있는데? 그럼 평소에도 카메라가 계속 돌아가고 있다는 건가…? 스자쿠의 말에 아르바이트생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면 휴대폰 오류일 수도 있고. 그런 대답을 듣고 나니까 스자쿠도 납득할 수 있었다.

이 휴대폰은 스자쿠의 예전 휴대폰을 박살낸 를르슈가 사다준 것이었다. 케이스와 액정필름까지 단단하게 붙어있는 새 휴대폰은 스자쿠가 금방이라도 쓸 수 있게 모든 게 정리가 된 상태였다. 스자쿠의 예전 휴대폰을 ‘너 또 여자 만났지?!’라는 이유로 박살냈던 를르슈는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스자쿠에게 사준 것이었다. 박살낸 휴대폰의 정보를 어떻게 옮겨왔는지는 몰라도 스자쿠는 원래 쓰던 예전 휴대폰과 다를 바 없는 초기 설정값에 그냥 써왔다.

그냥 휴대폰 오류일 수도 있으니까… 라고 생각했지만, 스자쿠는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를르슈가 관련된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퇴근한 스자쿠는 를르슈의 방문을 두드렸다. 를르슈, 자? 스자쿠의 물음에도 를르슈는 답이 없었다. 설마 아직도 화가 났나? 부엌의 카레는 줄어든 기색도 보이지 않았고, 를르슈는 밥도 안 먹고 하루 종일 침대에서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닿자, 스자쿠는 어제 했던 섹스가 진짜 강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를르슈가 하지 말라고 23번 정도 말하긴 했지만 난 그게 다 좋아서 하는 말인 줄 알았으니까…! 그리고 하지 말라고 하면서 발기하고 사정했으니까 당연히 좋은 건 줄 알았지! 아, 진짜 강간이었나봐. 어떡해. 를르슈! 그래서 엄청 힘든 거 아니야?! 

스자쿠는 묵묵부답인 를르슈가 걱정되어서 더 이상 참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잠겨있지 않은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를르슈의 침대 위에도 를르슈는 없었다. 를르슈, 어디에 간 거지? 그러고 보니 집에 들어올 때 신발장에 를르슈의 신발이 있었던가? 스자쿠는 나가려고 고민하다가, 갑자기 어떤 불빛에 이끌렸다.

그 불빛은 를르슈가 자주 쓰는 컴퓨터의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왔다. 평소라면 전기세를 아껴야한다는 이유로 컴퓨터 전원까지 철저하게 관리하는 를르슈 답지 않았다. 스자쿠는 대신 꺼줘야겠다는 생각에 모니터 앞까지 다가갔다. 잠금이 걸려있을 줄 알았는데 잠금도 안 걸려있는 채였다.

 

[스자쿠의 iPhone]

 

스자쿠는 모니터에 띄워진 어떤 창의 화면이 까맣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게 뭐지? 스자쿠의 iPhone? 이게 무슨 프로그램이지? 스자쿠는 자기도 모르게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러자 이번엔 어둑한 모니터 불빛에 비친 스자쿠의 얼굴이 드러났다. 초록색 불이 들어와있는 스자쿠의 휴대폰 카메라에 비치는 풍경들이 고스란히 를르슈의 컴퓨터 모니터에 떠다니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스자쿠는 오늘 아르바이트생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평소에는 꺼져있어. 초록색 불은 카메라가 켜질 때만 들어와.’

‘근데 난 맨날 초록색 불이 켜져있는데? 그럼 평소에도 카메라가 계속 돌아가고 있다는 건가…?’

 

스자쿠의 휴대폰 카메라는 평소에도 계속 돌아가고 있던 것이었다. 그것도 를르슈의 컴퓨터로 감시당하면서! 

설마 이러려고 휴대폰 박살내고 새로 사준 거야?! 스자쿠는 당황하면서 컴퓨터에 연결된 마우스로 그 창을 닫았다. 닫고 나면 다른 파일들이 보였다. suzaku_BackUp이라는 파일을 눌렀다. 파일 용량이 제법 되는지 딜레이가 걸렸지만 파일은 곧 정체를 드러냈다.

 

[suzaku_BackUp_260225]

[suzaku_BackUp_260125]

[suzaku_BackUp_251225]

[suzaku_BackUp_251125]

[suzaku_BackUp_251025]

.

.

.

 

 

다 열어보면 무언가 알 수 없는 파일들이었지만, 스자쿠는 낯익은 [사진] 폴더를 클릭했다. 그러자 스자쿠의 휴대폰 앨범에 있던 사진들이 전부 다 백업되어 있었다. 설마 내 휴대폰을 멋대로 계속 백업해둔 거야?!

스자쿠는 가볍게 소름이 돋았다. 를르슈는, 를르슈는 나를 감시하고 있었어! 나를 못 믿고 내 휴대폰을 해킹하고 내 휴대폰을 멋대로 들여다보면서…!

스자쿠가 황당함에 넋이 나가있을 때, 현관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를르슈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스자쿠는 이 비밀을 알아버린 이상 를르슈를 가만두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과 동시에, 이걸 알아버렸으니 를르슈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 사이에 를르슈는 스자쿠가 있는 자기 방까지 다가왔다.

 

“뭐야, 스자쿠. 남의 방에서….”

“르, 를르슈.”

“뭐하고 있는 거야, 내 컴퓨터 앞에서? 아무리 사귀는 사이라지만 그래도 프라이버시는 지켜달라고.”

“그거, 그거….”

 

그거 내가 할 말 아니야?!

뻔뻔하게 다가오는 를르슈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스자쿠는 분노가 치밀었다. 나의 믿음을 배신하고 나를 의심하고 나를 무시한 를르슈…! 그런 너에게 나의 분노를 알게 해주마.

그렇게 스자쿠는 다음날에도 다시 강간마라는 소리를 듣는 아침을 맞이하고, 분노한 를르슈 앞에서 휴대폰을 박살내고, 두 번 다시 자기를 감시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멍청하게도 다시 사과와 함께 새 휴대폰을 건네주는 를르슈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또 다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