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제국의 황제,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에게도 역경과 고난 정도는 존재했다.
정치적, 군사적, 물리적… 아무튼 모든 분야에서 를르슈 황제에게 고민이 되는 부분은 많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황제’로써의 를르슈가 갖고 있는 고민이었다. 지금부터 말하는 것은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가 사적으로 갖고 있는 역경과 고난이라는 점에서, 그는 황제의 가면을 잠시 내려두기로 결심했다.
를르슈 황제의 유일한 검, 나이트 오브 제로라고 불리우는 남자, 쿠루루기 스자쿠는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브리타니아 출신이 아니었다. 쿠루루기 스자쿠가 고향이었던 일본을 떠나고 브리타니아에 충성을 다하고 산지도 어연 10년도 훌쩍 넘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스자쿠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를르슈 황제에게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자신의 의견을 부딪칠 수 있는 기사의 마음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황제’에게만 향하는 것이었다.
사적인 관계—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의 연인으로써의 스자쿠는 항상 어딘가 자신을 억누르고서, 를르슈에게 부담이 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기사와 황제의 관계에서는 가감하지 않고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주제에, 연인 관계에서는 를르슈를 과보호하거나, 혹은 그에게 제대로 전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은 게 아닌가.
그래서 를르슈는 그런 고민에 빠져있었다. 쿠루루기 스자쿠의 진심을 알 수 없다는 고민에 흔들리고 있었다.
쿠루루기 스자쿠는 훌륭한 기사다. 이것은 의심할 것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남자를 연인으로 두고 있는 것도 를르슈의 자랑이다. 이것 또한 진실이다.
그러나 그 남자가 를르슈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스자쿠가 진심으로 원하고 있지만, 를르슈에게는 차마 전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황제 를르슈가 아닌, 연인 를르슈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를르슈에게는 억울한 일이었다. 스자쿠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은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를르슈에게도 존재했다. 게다가 그에게는 그럴 수 있는 권력이 있었고, 다소 억지를 부리는 부탁이라도 들어주고 싶은 애정이 있었다. 그렇지만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았고, 를르슈는 그것이 항상 불만이면서도 불안했다.
기사 스자쿠가 황제 를르슈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했지만, 연인 스자쿠가 연인 를르슈에게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연인으로써 기대할 수 없는 상태로 보이고 있다는 것인가, 라는 가설에 도달하고 나면 를르슈는 심란해지고 말았다.
오늘도 그런 생각에 빠져, 한숨을 내쉬면서 들여다보고 있던 서류에 서명을 건성으로 하고 있을 때였다. 황제 를르슈의 일은 늘 예상대로 돌아갔으며,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이트 오브 제로의 활약으로 무마되는 편이었다. 무엇 하나 일그러질 것이 없는 를르슈의 일상에 이레귤러가 생긴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이트 오브 제로 때문일 것이다.
정작 그 나이트 오브 제로는 그럴 의도가 없었겠지만, 사랑이라는 것은 언제나 의도대로 되지는 않는 법이다. 를르슈의 사랑이 그러하듯이.
‘그러니까 네 고민의 요지는 이거잖아. 쿠루루기 스자쿠가 어리광을 부려줬으면 좋겠다는… 그런 징그러운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거지.’
“어, 어디가 징그러운 건데?!”
‘다 큰 성인 남성에게 어리광을 요구하는 건 쉽지 않은 취향이다, 를르슈.’
황제 를르슈로서는 비빌 언덕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스자쿠와 인간관계의 풀이 거의 완벽하게 겹치고 있는 를르슈에게, 딱 한 명, 를르슈의 공범자를 자처하는 그 여자 C.C. 밖에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은 꽤나 슬픈 일이었다.
나이트 오브 제로가 랜슬롯의 정비를 위해서 잠시 자리를 비울 때였다. 를르슈는 C.C.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냐, 를르슈. 피자라도 만들어 줄 셈인가?—라고 뻔뻔한 대응을 하던 C.C.에게 를르슈는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쿠루루기 스자쿠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아 고민이라고.
C.C.는 를르슈의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는 다른 곳에서는 머리가 잘 돌아가다못해 악마적인 재능을 갖고 있지만, 연애적인 면에서는 도움도 안 되는 자신에게 매번 상담을 요구할 정도로 바보 같고 어리숙한 면이 있다. 그 쑥맥 같은 점을 쿠루루기 스자쿠는 좋아하는 거겠지. 하지만 C.C.는 그런 취향도 아니거니와, 매번 똑같은 레퍼토리의 고민을 들고 오는 게 지겨울 정도였다.
‘쿠루루기 스자쿠가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안 부리는 거 아니야?’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니…. 나이트 오브 제로라는 위치 때문에 그런건가?”
‘그럴 수도 있고. 그 남자는 어렸을 때부터 브리타니아에서 버텨오는 게 쉽지 않았으니 어리광 같은 것은 아주 예전에 졸업한걸 수도 있지.’
“…….”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 너한테 뭔가 요구해주길 바란다고.’
“그런 건 부담이 될 게 분명하잖아. 나는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스자쿠가 의지해주길 바라는 것 뿐인데.”
‘그런 마음이 더 부담스러운데.’
“그건 너니까 그런거고! 스자쿠는 다르다!”
‘아아, 알겠으니까 이제 그 잘난 쿠루루기 스자쿠한테 가서 이야기 해.’
C.C.가 전화를 끊을 것처럼 말하자, 를르슈는 다급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니까 스자쿠가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면 된다는 거지? 상황이 문제라면 말이야. 듣고 있던 C.C.는 를르슈가 이상한 곳에 꽂혀서 그것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너네의 관계가 문제인 거겠지…. 그런 말을 해주려고 하다가, 이내 귓등으로도 안 들을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말을 삼켰다.
‘그래, 그럴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시뮬레이션은 네 특기잖아?’
“좋아, 알겠다. 드물게 도움이 되었어.”
‘넌 말 한 마디를 잘못 보태서 늘 여자한테 미움을 사는 스타일이지, 를르슈.’
“나 싫다고 한 여자는 본 적이 없는데?”
‘지엄하신 황제폐하의 고백을 어떻게 거절하겠냔 말이다.’
더 이상 이야기했다가는 농담 따먹기로 변질될 고민상담이었다. 를르슈는 가차없이 전화를 끊었다. C.C.는 자기 볼 일이 끝났다고 전화를 매정하게 끊어버리는 이 어린 동정 남자를 어떻게 놀려줄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안 그래도 사랑의 고민을 심란하게 하고 계시는 와중에 잘못된 방향으로 해결책을 찾으셨으니 굳이 C.C.가 나서서 재미를 볼 필요는 없을 듯 싶었다.
그렇다. 를르슈는 지금 엄청나게 잘못된 방향으로 해결을 보려고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상황’이라는 이상한 단어에 꽂혀서 나이트 오브 제로를 위해서 무언가를 할 속셈이었다. C.C.에게는 돈을 주고 봐도 아깝지 않을 를르슈만의 지랄이 시작되려고 할 때였다.
그리고 나이트 오브 제로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일본으로 가신다고요?”
“그래. 사쿠라다이트와 관련된 협정도 있고, 내가 즉위한 이후로 일본에 들른 적도 없던 거 같아서.”
“그렇다면 화상회의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일본은 가는 데도 시간이 걸리고… 무엇보다 폐하의 컨디션이 걱정됩니다.”
“그렇게까지 약골이진 않아.”
“굳이 일본에 가고 싶은 이유라도 있으신 겁니까?”
쿠루루기 스자쿠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10년 동안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고향에 이런 식으로 가게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를르슈는 떨떠름할 거라고는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달가워하진 않을 줄은 몰랐다. 적당한 핑계로 사쿠라다이트 협정을 꺼내들었지만, 이것은 스자쿠의 말대로 화상회의로도 충분했다. 일본은 예전부터 친브리타니아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제 와서 굳이 얼굴을 내밀고 우호적인 관계라고 퍼포먼스를 취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스자쿠의 말마따나 를르슈의 컨디션도 긴 비행 시간 동안 무너질 수도 있었다.
딱히 댈만한 핑계가 더 이상 없었다. 그럼에도 를르슈는 일본행을 강행할 생각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쿠루루기 스자쿠는 고향이라는 그리운 곳에 돌아가서, 자신이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는 그 편안하고 자연스러움 속에서 를르슈에게 의지하고 의존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한마디로, 스자쿠가 일본에 간다면 를르슈에게 어리광을 부릴 것 같았다는 생각이었다.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의 황제를 연인으로 삼고 있는 주제에 쿠루루기 스자쿠는 패기도 없고, 교태를 부릴 줄도 모르고, 원하는 것을 말하지도 않는다. 스자쿠는 이것이 를르슈의 불만이라고 생각도 못할 것이다.
“나이트 오브 제로는 굳이 가고 싶지 않은 이유라도 있는 건가?”
“…아닙니다. 폐하가 가시는 길에 함께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달에 갈 수 있도록 준비를 부탁하지.”
“Yes, your majesty.”
그렇게 3월 11일. 좀처럼 펜드래곤 밖을 나가지 않는 황제 를르슈의 일본행 전용기가 하늘을 날았다. 그 전날까지도 국내외로 들이닥치는 일들을 처리하느라 를르슈는 밤새도록 일을 해야만 했다. 전용기 안에서도 쉬기도 했으나,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나이트 오브 제로는 이 바쁜 와중에도 일본에 가는 일정을 취소하지 않은 자신의 폐하를 보고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스자쿠가 를르슈에게 ‘일본 안 가면 안 돼?’라고 말했다면 를르슈는 일본행을 취소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스자쿠는 그런 제멋대로인 어리광을 부리지 않는다. 를르슈가 그런 것을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음에도, 스자쿠는 그의 옆에서 묵묵하게 를르슈의 뜻을 이행하려고 한다. 그런 것이 믿음직스러우면서도 불안한 것이다.
한쪽만 일방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관계는 언젠가 다른 쪽이 무너지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가? 를르슈는 그러한 일반론에서 벗어나고자, 이번 일본행이 의미가 있기를 바랐다. 스자쿠가 보다 를르슈를 더 의존하고 믿어줄 수 있는 방향으로.
“그러고 보니 일본에 가는 건 오랜만이구나.”
“그렇죠. 폐하께서도 감회가 새로우실 것 같습니다.”
“……아아, 그렇지. 너는 오랜만에 일본에 가는 게 좋지 않아?”
“그러네요. 폐하와 함께 가니까 그나마 좀 나은 것 같습니다.”
그나마 좀 나은 것 같다? 그 말은 꼭 스자쿠는 일본에 가기 싫었다는 것처럼 들렸다.
를르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스자쿠는 더 이상 대답해주지 않았다. 때마침 를르슈에게 들어온 일이 있어서 이야기는 타이밍이 안 좋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서류를 내밀었고, 를르슈는 얼떨결에 쥐어진 서류를 읽으면서 그에게 더 물어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새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일본에 좋은 추억은 스자쿠 말고는 하나도 없었다. 를르슈가 힘 없던 황자 시절에 인질로 내던지듯 쫓겨난 나라가 일본이었다. 그곳에서 스자쿠를 만나고, 다시 브리타니아로 돌아갔을 때에는 스자쿠가 함께 있어 주었기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우연과 필연이 쌓이고 겹쳐서 를르슈가 황제가 되는 그때에도 스자쿠가 옆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은 인질로 있었던 나라였기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스자쿠에게는 일본은 고향이 아니던가? 왜 저렇게 달갑지 않아 하는지, 를르슈의 계산과는 다른 반응인 스자쿠가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하루를 꼬박 전용기에서 보내고 난 다음날이었다.
3월 12일.
오전 11시경에 브리타니아 황제의 전용기가 일본에 도착했다.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회담은 아니었지만 과한 환영은 바라지 않는다는 를르슈의 요청대로 진행되었다. 일본에서는 스메라기 카구야라는 카드를 꺼내들고 를르슈를 맞이했다. 를르슈는 제 앞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카구야의 모습에 새삼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10년이라는 세월은 스자쿠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던 카구야를 정중한 매너를 갖춘 일본 대표로 만들어준 것이었다.
“오랜만이네, 카구야.”
“오랜만입니다, 를르슈 폐하.”
를르슈가 반가운 표정을 짓자 카구야는 곧잘 짓던 밝은 미소로 응했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눈치를 살폈다. 카구야는 스자쿠의 친척으로, 예전부터 왕래가 제법 있었던 관계였다. 고향에서 피붙이를 만나서 조금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스자쿠는 시종일관 나이트 오브 제로의 얼굴로 를르슈의 뒤를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즐겁지 않은 건가? 모처럼 가족을 만나는 건데도?
를르슈는 무언가 이상하게 일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벌려놓은 일은 수습될 생각도 없이 흘러가기 시작했고, 를르슈는 누구에게도 SOS를 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곱씹을 뿐이었다.
카구야가 안내하는 호텔까지 가는 길이었다. 카구야는 옛날 추억을 꺼내기도 하면서, 때때로 브리타니아와 일본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들을 꺼내기도 했다. 대화의 주제가 다채롭고 그녀다운 선택지가 많아서 를르슈는 초조했던 마음을 잠시 내려두고 대화에 응했다.
“그러고 보니, 쿠루루기 총리께서는 내일 저녁 만찬 때 뵙자고 하셨는데, 폐하의 일정으로는 괜찮으실까요?”
“일정은 비워뒀으니 괜찮다. 그렇지, 스자쿠?”
“아, 예. 폐하. 그렇습니다.”
“그 만찬에 스자쿠도 함께할 생각인데, 괜찮은가?”
“흐음…….”
스자쿠가 함께해도 괜찮냐는 말에 곧잘 대답하던 카구야가 말을 망설였다. 무언가 계산하고 재보는 듯한 느낌에 를르슈가 의아해하자, 카구야는 솔직하게 말할게요, 라면서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은 좀 우습지만… 만찬 때에는 쿠루루기 스자쿠로서 참석하는 건가요, 나이트 오브 제로로서 참석하는 건가요?”
“어느 쪽도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데.”
“아뇨, 이건 폐하께 여쭤본 게 아닙니다. 그쪽의 생각을 묻는 거예요.”
그쪽, 이라고 지목 당한 스자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면 스자쿠는 어렸을 때부터 카구야에게 이런 식으로 당하기 일쑤였다. 체력적인 면에서는 따라잡을 수 없던 스자쿠를 카구야는 논리로 무너뜨리고 어른들을 통한 정치질 계략을 펼쳤다.
평소라면 부드럽게 웃고 있을 나이트 오브 제로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에, 를르슈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쿠루루기 스자쿠나, 나이트 오브 제로나, 어차피 같은 사람 아닌가? 그러나 스메라기 카구야와 쿠루루기 스자쿠에게는 서로 다른 문제인 듯 자못 진지해졌다.
한편, 현재 쿠루루기 총리는 스자쿠의 아버지라는 것을 떠올리면 를르슈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나는 아들로 참석할 것인지, 아니면 비즈니스 상의 관계로 만날 것인지를 묻고 있는 걸까? 를르슈 또한 스자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입을 연 것은 카구야였다.
“괜찮습니다. 당신은 항상 그런 사람이라는 걸 새삼 다시 알게 되었네요. 어느 쪽이든 상관 없습니다. 를르슈 폐하의 안전을 위해서 이쪽도 만전을 다할 생각이지만 나이트 오브 제로의 호위는 절대적으로 중요하거든요.”
카구야는 스자쿠의 대답 따위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했다. 스자쿠는 더 이상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사이에 있던 를르슈만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를르슈는 그제야 자신의 일본행이 스자쿠에게는 의미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자쿠에게 일본이란 돌아가고 싶은 곳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자, 를르슈는 괜한 짓을 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굳이 일본에 가고 싶냐고 물어보기까지 했으니까… 스자쿠는 할 만큼의 방어는 다 한 듯 싶었다. 를르슈의 억지 때문에 스자쿠는 참고 와준 것이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아, 아아…. 괜찮아, 무슨 일이었지?”
“이제 호텔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자리를 옮기시죠.”
어리광을 부려줬으면 했던 마음이 잘못되어, 정작 자신이 쓸데 없는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니, 를르슈는 머릿속이 꼬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완벽한 황제 를르슈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스자쿠에게는 일부러 너 때문에 일본에 왔다고 이야기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를르슈는 스자쿠의 호위를 말없이 받을 뿐이었다.
카구야는 긴 비행 시간 동안 지쳤을 를르슈에게 쉬는 시간이 필요하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스자쿠와 를르슈는 단 둘이 방에 남았다. 두 사람은 제도에 있는 황궁과는 다른 느낌이지만 브리타니아식의 건축법을 따르고 있는 방을 둘러보았다. 를르슈는 자신의 패착을 알았으니 이젠 더 이상 일을 진행시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스자쿠는 일본에 가족이 있어도, 일본이 고향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구나. 그걸 이제까지 몰랐다는 것도 놀랍지만, 한 번도 일본에 대해서 이야기해본 적 없었던 것도 의외였다. 그러고 보면 스자쿠는 언젠가 일본에 가자고 말해준 적도 없었다. 그런 것은 모두 일본에 가기 싫었던 스자쿠의 내면심리가 투영된 것이 아닌가. 왜 그걸 몰랐을까.
를르슈는 창문 너머, 널리 뻗어보이는 도로 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를르슈의 한숨에 스자쿠가 물었다.
“를르슈, 혹시 피곤해? 저녁 만찬은 모레로 미룰 수도 있어.”
“아니, 피곤하진 않아. 그냥 좀… 생각할 게 많아서.”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별 건 아니고…….”
스자쿠는 비겁하게 이럴 때에는 나이트 오브 제로가 아닌 연인 스자쿠로 닿아온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어깨에 기대면서 나오려던 한숨을 삼켰다. 네가 일본에 가는 걸 싫어하는 걸 알았으면 오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안 될 줄은 몰랐다.
“너는 안 피곤해?”
“피곤하기 보다는, 좀 짜증나는 정도야.”
“짜증이 나? 뭐 때문에?”
“카구야 말이야. 여전하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더 질이 나빠진 기분이 들기도 하고.”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를르슈한테는 그런 모습을 안 보이니까 그런 거겠지. 네 앞에서는 열심히 잘 보이려고 하거든, 걔.”
“…….”
“그래봤자 의미없지. 어차피 를르슈는 내 거니까.”
스자쿠는 를르슈의 꼭꼭 잠겨있는 황제복의 목깃을 쓸었다. 그곳은 스자쿠가 밤이 되면 입을 맞추고 이를 세우는 곳이었다. 하얀 를르슈의 피부에 자국을 남기는 걸 좋아하는 스자쿠 때문에 를르슈의 황제복은 더욱 철저하게 흔적들을 감춰야만 했다. 스자쿠가 쓰다듬는 것에 를르슈가 몸을 움츠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어딘가 경계하면서도, 기대하고 있는 듯한 를르슈의 시선에 스자쿠는 낮은 목소리로 목을 울리며 웃을 뿐이었다.
“아직 너의 일정도 남아있으니까 아무것도 안 할 거야.”
“그거 참 고맙군.”
“알아주니까 영광이야, 황제폐하.”
를르슈는 지금 이 곳이 일본이 아니라 펜드래곤의 황궁이었다면 스자쿠가 더 편하게 웃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결론은 애매했다. 황궁에서도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바란 적은 없었으니까. 일본에 왔다고 해서 그것이 더 나아질 거라는 보장은 없었음에도, 를르슈는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 보기 좋게 떨어져나가는 희망이었지만.
“를르슈는 왜 그렇게 일본에 오고 싶어 했어? 별로 좋은 추억이 있는 곳도 아니잖아.”
“일본은 너를 만난 곳이야. 나에겐 의미가 깊어.”
“후후, 그렇구나. 를르슈한테는 그런 의미가 있구나.”
“너는… 일본에 온 게 별로야?”
를르슈는 조심스럽게 스자쿠에게 물었다. 를르슈의 질문에 스자쿠는 대답을 망설이는 듯 했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스자쿠는 이내 말 대신에 한숨을 내쉬었다.
“를르슈를 만난 곳이니까 나한테도 의미는 있어. 그렇지만…….”
스자쿠는 말을 아끼는 듯 했다. 를르슈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자신의 앞에서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를르슈는 언제든 스자쿠에게 뭐든지 터놓고 이야기 하는데, 어째서 스자쿠는 무엇 하나 편하게 말해주지 않는 걸까. 기사일 때는 거침없이 하면서, 연인일 때는 왜 말을 하지 않는 것인지.
를르슈의 재촉하는 시선을 느낀 것인지, 스자쿠는 그렇게 보지 마, 라고 중얼거렸다. 를르슈는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아마 초조한 표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이던 간에 를르슈는 스자쿠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지만’ 다음이 뭔데?”
“그렇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나는 를르슈의 옆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그래도 너의 고향이잖아.”
“난 너의 기사야. 난 너를 지키는 사람이지, 그걸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아니야.”
“…….”
스자쿠의 말을 듣던 를르슈는 감동을 받아야 할지, 아니면 고향에 대한 무심한 스자쿠의 심경을 이해해줘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너무 어렸을 때 일본을 떠나와서 고향에 대한 애착이 없어진 것일 수도 있다. 브리타니아의 문화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노력했던 스자쿠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제멋대로 굴 수 있었던 시간도 빨리 끝났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전부 다 를르슈를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를르슈는 이번 일본행은 스자쿠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는커녕,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아, 실패했어.”
“뭐를? 아직 회담도 협정도 진행되지 않았는데?”
“아니, 개인적인 목표를 실패했다는 뜻이다. 뭐, 신경쓰지 않아도 돼. 나이트 오브 제로는 바쁠 테니까.”
“너 만큼 하겠어?”
두 사람의 휴식시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카구야와 쿠루루기 총리가 붙여둔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고 나타났다. 12일의 일정은 가벼운 관광 코스를 즐기는 것 뿐이었지만, 를르슈는 마음이 썩 편하진 않았다. 카구야의 옆에서는 날을 세운 나이트 오브 제로가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있었고, 카구야는 그런 나이트 오브 제로를 못본척 하며 를르슈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두 사람은 원래 이렇게 사이가 안 좋았던가? 하지만 10년씩이나 만나지 않았는데… 오히려 애틋하지 않나? 를르슈는 의문이 들었지만 일부러 그 둘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다.
일정이 모두 끝나고 나서 다시 호텔로 돌아왔을 때였다. 두 사람은 평소보다 더 피곤한 느낌이 들었다. 호위와 안전 상의 문제로, 스자쿠의 방은 를르슈의 방과 이어져있었기 때문에, 스자쿠는 소파에 앉아있는 를르슈와 마주할 수 있었다. 손 하나 까딱 하기 싫은 느낌으로 를르슈는 스자쿠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도 체력이 더 있었던 것은 스자쿠였다.
“내가 씻겨줄까?”
“됐다.”
“그럼 안아서 욕실까지 데려다줄까?”
“됐다고.”
씻겨주는 것도, 안아서 데려다주는 것도 모두 사양했던 를르슈였지만, 스자쿠는 기어이 를르슈를 안아서 욕실까지 데려다주었고, 그의 옷을 모두 벗기고 씻는 걸 돕기 시작했다. 를르슈는 귀찮게 굴지 말라고 소리를 한 번 질렀지만, 스자쿠가 막무가내로 샴푸를 들이붓는 것에 얌전히 그에게 몸을 내주었다.
목욕을 돕는 스자쿠는 정성스럽게 를르슈를 다룬다. 어디 하나 빠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닦고 문지르고 씻겨주는 것이다. 를르슈와 금방이라도 섹스를 할 것 같이 굴지도 않는다. 섹슈얼한 분위기라고는 전혀 없이, 정말 를르슈를 씻겨주기 위해서 움직인다. 스자쿠가 노곤노곤한 마사지까지 해주고 나면, 를르슈가 샤워가운 차림으로 침대에 뻗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사이에 스자쿠도 재빠르게 씻고 나오고, 를르슈가 입고 있던 샤워가운을 벗기고서 속옷부터 정중하게, 그리고 파자마 단추까지 꼭꼭 잠가준다.
를르슈는 자신을 애지중지 다루는 스자쿠의 모습에 질리지도 않냐고 물었다. 나 혼자서 샤워할 줄도 알고, 옷도 입을 줄 아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키득거렸다.
“뭐든지 혼자 할 줄 아는 를르슈가 나한테 맡기는 건 기분이 좋거든.”
“그런 건 대답이 하나도 안 돼.”
“내가 납득했으니까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아.”
이대로라면 스자쿠 없이 사는 삶이 힘들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스자쿠는 그걸 원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를르슈를 어리광쟁이로 만드는 건 너무 쉽게 하는 스자쿠가 부럽기도 하면서, 어딘가 지는 기분이 들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바라는 걸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를르슈에게는 꽤나 깊은 상처인 듯 싶었다.
잘 자, 를르슈. 스자쿠가 를르슈를 끌어안으면서 중얼거렸다. 스자쿠 쪽으로 몸을 돌린 를르슈도 그 말에 맞춰 눈을 감았다. 잘 자, 스자쿠. 서로를 끌어안고 잠을 청해도,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은 멀리 떨어진 기분이었다. 모처럼 일본에 와서 기뻐하는 너의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되서 속상해. 그렇게 생각하던 를르슈는 스자쿠의 팔이 제 허리를 감싸는 것에,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서 잠에 빠져들었다.
3월 13일.
낮에는 카구야의 도움을 받아 쿠루루기 겐부 총리와 만난다. 사쿠라다이트 관련 회담을 한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를르슈의 옆에 있던 나이트 오브 제로는 자신의 아버지를 10년 만에 만나는 데도 고개 한 번 끄덕이지 않았다. 쿠루루기 겐부 또한 나이트 오브 제로와의 만남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카구야와 스자쿠의 관계 만큼이나 삭막한 교류가 부자(父子) 사이에도 오가는 듯 싶었다.
저녁 만찬 전까지 시간이 남았기에, 스자쿠와 를르슈는 호텔 밖 정원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일본식으로 꾸며진 정원은 브리타니아에서 보기 드문 풍경이라 를르슈는 꽤나 즐거웠다. 스자쿠는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를르슈에게 아는 만큼 대답해주면서 그의 곁을 지켰다.
“생각보다 아는 게 많잖아, 스자쿠.”
“를르슈한테 뭔가 가르쳐줄 수 있다니, 의외야.”
“나라고 해서 뭐든지 아는 건 아니니까.”
그래, 를르슈라고 해서 뭐든지 아는 건 아니었다. 오늘 낮에 있었던 스자쿠와 쿠루루기 겐부 사이의 냉랭했던 분위기 같은 것도, 를르슈의 상정 외의 일이었다. 카구야와는 그래도 공적인 관계에서는 일을 하기 위해 말을 하는 편이었지만, 아버지를 만나는 자리에서도 스자쿠는 겐부와 눈 한 번 맞추지 않고서 를르슈를 호위할 뿐이었다.
를르슈가 알기로는 쿠루루기 스자쿠의 유일한 가족은 쿠루루기 겐부 한 명 뿐이었다. 10년 만에 만난 유일한 가족에게 그런 태도는 좋지 않은 것 같기도 하면서, 그런 가족사에 를르슈가 끼어들어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스자쿠가 가족들과 그런 관계가 된 것은, 를르슈를 지키기 위해서 브리타니아로 건너왔던 그의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를르슈를 위해서 스자쿠는 변한 것이다. 변해버린 스자쿠에게 이제 와서 달라졌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런 기분을 며칠째 담아두고 있는 를르슈는 속이 영 편치는 못했다. 스자쿠가 편해져서 자기한테 어리광을 부려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아무것도 그의 뜻대로 되고 있지 않고, 오히려 역효과만 나고 있다는 점에서 속상할 뿐이었다. 를르슈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에, 스자쿠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역시 저녁 만찬에는 제가 안 가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폐하.”
방금 전까지는 웃으면서 잘 이야기하던 스자쿠가 나이트 오브 제로의 얼굴로 를르슈에게 말했다. 그것은 연인 스자쿠가 아닌 기사 스자쿠가 하는 말이었다. 를르슈는 그의 말을 듣고서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왜 갑자기 저녁 만찬에 안 가는 편이 좋다고 말하는 거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를르슈의 시선이 그렇게 묻고 있는 것에, 스자쿠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애당초 저는 쿠루루기 총리… 그러니까 저의 아버지나 카구야와 함께 동석하고 싶을 만큼의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폐하께서 모처럼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주셨는데 제가 그 자리를 망칠 것 같아서 걱정이 되거든요.”
“무슨 소리야? 네가 없으면 그 자리도 없었을 텐데. 네가 중요한 자리야.”
“아뇨, 폐하를 위한 자리입니다. 저는 식사 대신에 호위에 집중하겠습니다.”
“…스자쿠.”
“예, 폐하.”
기사 스자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거침없이 말한다. 하지만 연인 스자쿠는 아무것도 를르슈에게 바라지 않는다.
그것이 피부로 와닿는 순간이었다. 를르슈는 주먹을 움켜쥐고서 스자쿠에게 무어라 한 마디를 쏘아붙이려고 하다가, 저와 시선을 맞추지 않고서 땅바닥을 향해 있는 스자쿠의 모습에 힘이 빠져버렸다. 그 어떤 싸움에서도, 그 어떤 전장에서도, 를르슈의 기사라는 이름을 단 이후부터 한 번도 져본 적 없던 그 나이트 오브 제로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밥 한 번 같이 안 먹는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를르슈는 섭섭하고 속상했다. 스자쿠는 제 시선이 계속 땅바닥에 박혀있던 것을 고개를 들어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폐하,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이 어떤 얼굴이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를르슈는 스자쿠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자 스자쿠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또 기사로써 를르슈를 막을 셈인가 싶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연인의 다정한 부름이었다.
“를르슈.”
“됐어.”
“…혹시 내가 뭔가 잘못했어?”
“아니라니까.”
“거짓말 하지 마. 나한테 숨기려고 하지 마.”
그건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고, 를르슈는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억누르며 괜찮다고 몇번이고 말했다.
“그냥 좀 놀랐을 뿐이야, 네가… 고작 식사 하나에 이렇게 어쩔 줄 몰라하는 게.”
“……그렇지.”
“그렇게까지 카구야나 네 아버지를 어려워할 줄은 몰랐어.”
“어려워하기 보다는 피하고 싶은 거야.”
“결국 같은 말이잖아.”
“조금 다르다고 생각은 하는데.”
스자쿠는 힘없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를르슈는 그 미소에 넘어가기로 했다. 그가 원하는대로, 사람을 불러서 나이트 오브 제로 몫의 식사는 필요하지 않다고 전했다. 전화를 받은 카구야는 ‘그럴 줄 알았습니다.’ 같은 말을 했다. 를르슈는 무엇을 알았냐고 물어보려다가, 스자쿠에게도 더 캐묻지 않은 것을 카구야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찬은 시작되었다. 스자쿠는 만찬이 이루어지는 별실의 밖에서 호위를 하고 있었다. 별실 안에는 이미 확인된 호위 병력이 있었다. 나이트 오브 제로가 황제 를르슈의 곁을 떠나는 것은 드문 일이었지만, 안팎으로 를르슈를 지키는 사람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쿠루루기 겐부와 스메라기 카구야가 를르슈에게 무언가 해를 끼칠 짓은 안할 것이라는 알 수 없는 확신도 있었다. 그런 것에 의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 스자쿠는 카트에 실려오는 음식들을 확인했다.
를르슈의 몫의 식사로 나오는 것들을 스자쿠가 한 번 맛을 보고 확인한 다음에 들여보내는 식으로 만찬은 이루어졌다. 음식이 오가는 사이에, 안쪽에서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를르슈의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릴 때마다 스자쿠는 신경이 쓰였다.
를르슈가 왜 갑자기 일본에 오고 싶어 했는지, 스자쿠는 아직 그 이유를 모른다. 물어보기에도 무섭고 겁이 났다. 설마 일본에 스자쿠를 두고 가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었다. 나이트 오브 제로는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를르슈를 위한 세계 최강의 기사인데, 이제 와서 버리는 체스말 취급을 한다면 를르슈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를르슈에게 버림 받는 일이 없도록 스자쿠는 애를 쓰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를르슈 또한 일본에 온 뒤로 스자쿠가 억지로 들어주는 시중 같은 것을 얌전히 받아주고, 같은 침대에서 자게 해주고 있다. 버리고 가는 것은 아닌 듯 싶었다. 그럼 대체 왜 일본에 오고 싶어한 거지? 브리타니아와 일본 사이의 우호조약을 견고히 하겠다는 것은 정말 핑계라는 것 쯤은, 스자쿠도 알 수 있었다.
를르슈가 일본에 오고 싶은 이유가 있었을 텐데… 왜 나는 모르는 걸까? 스자쿠는 마지막 코스요리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귀에 꽂은 인터컴에서 무전이 들려왔다.
‘나이트 오브 제로, 호텔 측에서 게이트 A를 지나가려고 합니다만.’
“안 된다. 아직 만찬이 진행 중이야. 폐하의 퇴실이 확정될 때까지 호텔 측과는 이야기가 되어 있을 텐데?”
‘그렇습니… 으윽! 아악!’
무전은 그렇게 끊겼다. 예상 밖의 일이기도 하면서, 예상 내의 일이었다. 를르슈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사람들은 전세계 어딜 가도 있었다.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스자쿠가 있는 것이다. 스자쿠를 비롯한 무전을 듣고 있던 별실 안팎의 모두가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스자쿠는 가장 중요한 말을 빼먹지 않았다.
“지금 상황을 폐하께는 알리지 않는다. 침입자를 바로 색출해서 생포해라. 필요 시에는 사살해도 좋다.”
를르슈가 있는 별실 앞을 지키기 위해서 스자쿠는 총을 꺼내들었다. 호텔리어의 옷을 입은 사내가 스자쿠 쪽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저 남자가 무전을 끊기게 한 장본인일 것이다. 그의 손끝에는 날카로운 나이프가 들려있었다. 살인기술에 숙련된 자는 총보다 칼이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스자쿠가 괜히 나이트 오브 제로인 것도 아니다. 그는 모든 상황에서 를르슈를 지키기 위한 기사였다.
스자쿠는 달려드는 남자를 걷어찼다. 나이프를 빼앗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남자의 두 다리의 인대를 모두 그가 들고 왔던 나이프로 끊어놓았다. 총을 쓰는 것이 빠르긴 했어도, 총 소리가 들리면 별실 안에 있을 를르슈가 놀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폐하께 알리지 않는다’는 전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피 비린내가 진동하는 별실의 출입구를 보고서 스자쿠는 혀를 찼다. 숨을 껄떡대는 남자가 자결하지 못하도록 입에 총을 쑤셔넣고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빨리 이 곳을 치우고 나서, 를르슈에게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해야만 하는데…. 호위병들이 달려와서 스자쿠의 지시대로 피투성이가 된 남자를 옮겼다. 호텔 쪽에서는 피에 젖은 카펫을 모두 갈아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준비했다.
스자쿠도 피가 튄 옷을 갈아입었다. 모든 것은 빠른 시간 안에 이루어졌다. 스자쿠는 인터컴 너머로 별실 안쪽의 호위에게서 들리는 진행상황에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트 오브 제로, 만찬이 끝났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나가십니다.’
“알겠다. 폐하께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말도록. 아무 내색도 하지 마.”
‘알겠습니다.’
를르슈가 별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웃으면서 쿠루루기 겐부와 스메라기 카구야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스자쿠는 겐부와 카구야와 함께 즐거웠다고 악수를 하는 를르슈를 보고서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졌다. 두 번 다시는 안 보고 싶었던 사람들과 를르슈가 친하게 지내는 모습은 생각보다 괴로웠다.
쿠루루기 겐부와 스메라기 카구야는 스자쿠가 브리타니아에 가겠다고 결심했을 때 격렬하게 반대했던 사람들이었다. 그깟 힘 없는 브리타니아 황자의 개가 되려고 너를 그렇게 키운 줄 아냐고 겐부의 고함은 아직도 생생했다. 스자쿠의 소식을 듣고서 달려온 카구야가 일본을 위해서 하는 선택도 아니고, 개인적인 이유로 가는 브리타니아행이라면 자신도 반대한다며 스자쿠를 타박했다. 스자쿠의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도구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에게서, 스자쿠는 벗어나기 위해서 를르슈를 선택한 것이었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유일한 구원이었다.
—그래, 나는 그때 했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나이트 오브 제로는 내 자리야. 를르슈는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이고.
“많이 기다렸지, 나이트 오브 제로.”
“아닙니다, 폐하.”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져서 말이야….”
를르슈는 스자쿠의 옆에 서면서 즐거웠던 만찬의 한때를 곱씹는 듯 했다. 스자쿠는 입술을 굳게 닫은 채로 를르슈의 옆에 서있을 뿐이었다. 겐부와 카구야가 떠나는 것을 배웅하고, 스자쿠와 를르슈 역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스자쿠는 오늘 있었던 일을 나중에 문서로 보고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피곤해졌지만, 그런 자신보다 더 피곤한 만찬을 다녀온 를르슈에게 지금 당장 보고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 판단은 를르슈의 기사로써는 옳은 것이다. 스자쿠는 를르슈가 걸치고 있는 황제복을 벗기면서 속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그가 황제로 있을 시간은 끝이 났다. 스자쿠는 연인 를르슈를 깨끗하게 씻기고, 따뜻하게 만들어서, 끌어안고 잘 생각이었다.
“내가 혼자서 벗는다니까.”
“오늘은 를르슈가 고생했으니까 내가 대신 벗겨줄게.”
“어제도 그런 식으로…!”
“어제도 좋았잖아? 를르슈, 잠도 잘 잤고.”
“어물쩡 넘어가려고 하지 마!”
를르슈의 바지를 벗기려고 할 때였다. 바지 주머니 속에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스자쿠가 의아해 하면서 무엇인가, 하고 그것을 꺼냈다. 작은 틴케이스에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스자쿠의 손에 들린 그 틴케이스를 본 를르슈가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게 뭐야?”
“카구야가 준 거야. 내일은 화이트데이라면서? 일본에서는 꽤 유명한 이벤트라고 하던데.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을 주는 날이라고.”
“…이거, 사탕이야?”
“응. 무슨 한정판 사탕이라고 해서. 맛있대. 스자쿠도 먹어보는 게 어때?”
이 폐하는 자신이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 제99대 황제라는 자각이 있기는 한 걸까. 스자쿠는 머리를 감싸고 싶은 것을 겨우 억누르면서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달그락거리는 작은 틴케이스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알록달록한 색깔의 사탕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쉽게 볼 수 있는 브랜드의 사탕이었다. 스자쿠도 어렸을 적에 몇번 물고 다녔던 싸구려 사탕. 그런 것을 카구야가 를르슈에게? 카구야는 순수한 의도로 주진 않았을 것이다. 분명 를르슈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주었겠지만, 그 속내에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뭔가가 있었을 것이다. 를르슈의 호의는 그것에 이용당한 것이고.
그리고 그 를르슈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먹어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웃기지도 않았다. 스자쿠는 틴케이스의 뚜껑을 닫고서 바로 쓰레기통에 그것을 내던졌다. 깔끔한 호선을 그리면서 들어가는 사탕을 보고서 를르슈는 놀란 눈을 했다.
“뭐하는 짓이야?!”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는 걸 함부로 드시게 할 순 없어요.”
“카구야가 그럴 리가 없잖아! 너는 사람을 뭐로 보고…!”
“스메라기 카구야를 뭐로 봐야 할까요? 굳이 그러고 싶진 않은데요.”
스자쿠는 일부러 기사의 말투를 쓰면서 를르슈의 바지를 끝까지 벗겨냈다. 검은색 비키니 속옷 하나 차림이 되어버린 를르슈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카구야가 네 친척동생인건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피가 싫을 정도로 섞여있죠. 너와 나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아는 거지?! 그건 몰랐지만 딱히 알려주고 싶지도 않네요.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 나이트 오브 제로의 모습에 속옷 차림의 를르슈는 이불을 뒤집어 쓰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을 막고서 스자쿠가 그의 두 팔을 붙잡아 눌렀다. 침대에 드러눕혀진 를르슈는 제 위를 올라탄 스자쿠를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를 어떻게 할 셈이야, 나이트 오브 제로.”
“어떻게 할 생각도 없어. 그냥 를르슈가 자각을 좀 했으면 해서.”
“무슨 소리야?”
그렇다. 를르슈는 자각을 해야만 한다. 를르슈라는 인물에 대해서 모두가 얼마나 탐내고 있는지, 스메라기 카구야가 준 그 사탕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그런 를르슈를 자신의 것으로 묶어두기 위해서 스자쿠가 얼만큼 노력하고 있는지를.
“그러고 보니, 내일 일정은 비어있지?”
“응? 아아, 오늘 자정까지 호위팀에 보내기로 했으니까.”
“그럼 정해졌네. 를르슈는 내일 컨디션 난조로 호텔에서 하루 종일 쉴 거야.”
“뭐? 내가 왜?”
“화이트데이를 앞두고서 다른 여자한테 사탕을 받아온 남자친구를 멀쩡히 보고 있을 사람은 드물거든.”
“무슨… 사탕을 받아온 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를르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스자쿠에게 있어서 화이트데이라는 단어는 어딘가 낯간지러웠다. 한 번도 챙겨본 적이 없는 이벤트였다. 그런 일본의 이벤트 ‘화이트데이’를 공부하는 를르슈라니, 예상 외로 귀여운 조합이지만, 그 사탕이 카구야에게서 온 거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나빴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훤히 드러난 가슴팍을 시선으로 훑으면서 중얼거렸다.
“를르슈, 나 섹스하고 싶어.”
“…….”
“섹스하고 싶다니까?”
“하, 하면 되잖아. 어차피 내일 일정도 마음대로 짜놨으면서.”
“마음대로라니, 합의 하에 한 거라고 해줘.”
“……네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어, 난.”
를르슈는 붙잡은 힘이 느슨해진 팔을 들어올리면서 스자쿠의 뺨을 어루만졌다. 네가 하는 제멋대로인 섹스, 난 나쁘지 않다고 봐. 를르슈가 그렇게 속삭이는 것에 스자쿠는 얼굴이 붉어졌다. 를르슈가 씻고 싶다고 말했지만, 스자쿠는 옷을 벗으면서 필요없다고 말했다.
“땀 냄새 나잖아?!”
“더 흥분되니까 조용히 해, 를르슈.”
“난 싫어!”
“내가 좋아.”
“스자쿠!”
스자쿠, 라고 부르는 입술을 키스로 틀어막았다. 를르슈의 얇은 입술을 핥으면서 그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넣었다. 엉겨붙는 를르슈의 혀를 빨아들이면서 스자쿠는 그의 타액을 삼켰다. 우응, 응, 스, 스자쿠. 를르슈가 신음하는 사이로 스자쿠의 이름을 불렀지만 스자쿠는 그 안타까운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그의 젖꼭지를 만지는데 집중했다.
차마 다 삼키지 못한 타액을 질질 흘리는 를르슈를 보고서 스자쿠는 다시 한 번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쪽쪽거리는 소리가 몇번이고 울리도록 하는 베이비 키스였다. 끈적해진 입가를 닦아주면서 를르슈의 입술에 키스를 퍼붓고 나면, 를르슈의 젖꼭지는 어느새 빳빳해진 채로 스자쿠의 손끝에서 튕겨지고 있었다.
그의 가슴 끝에 혀를 굴리면서, 다른 한쪽도 혀와 비슷한 움직임으로 타액에 적셔서 만져주었다. 그러면 를르슈는 헐떡거리면서 스자쿠에게 가슴을 내밀었다. 젖꼭지, 계속 빨면… 시, 싫어. 를르슈가 끊어지는 숨 중간에 하는 말에 스자쿠는 를르슈의 유두를 꼬집었다. 빨아서 싫으면 꼬집을까? 꼬집어서 아픈 게 를르슈는 더 좋으려나? 스자쿠의 짓궂은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저었다.
“아, 빨리, 아래… 아래도 만져.”
“아래? 여기?”
스자쿠는 를르슈의 뜨겁게 달아오른 페니스 기둥을 붙잡으며 물었다. 벌써 딱딱해지다 못해 사정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를르슈의 페니스는 프리컴으로 끝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번들거리는 귀두 끝을 매만져 주고 나면,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스자쿠의 손에 제 페니스를 묻고서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스자쿠의 손이 주는 따뜻함과 압박감에 를르슈는 우는 소리를 내면서 그에게 몸을 비벼댔다.
자신의 손을 이용해서 자위를 하는 를르슈가 발정이 난 것마냥 구는 걸 본 스자쿠는 거침없이 그의 페니스를 주물러주었다. 를르슈, 가고 싶지? 응, 가고, 싶어, 아, 스자쿠, 스자쿠…! 정액 잔뜩 싸는 를르슈 보고 싶어. 보여줄 거야? 응, 보, 여줄게, 그러, 니까…! 가는 얼굴도 보여줘. 를르슈 갈 때마다 야한 얼굴 하니까. 으응…! 아, 스자쿠, 너무, 세, 아, 아파, 앙, 기분 좋아…!
그리고 를르슈의 사정이 이어졌다. 꽤 오랜만에 한 섹스라서 그런지, 를르슈의 사정은 길고, 정액은 양이 많고 진했다. 스자쿠는 제 손바닥에 쏟아진 를르슈의 정액을 보고서 키득거렸다. 이 정도면 젤도 필요없겠다. 아니, 필요하면 내가 핥아줄게. 를르슈는 핥아주는 것이 어디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만큼은 싫다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나 다를까 를르슈의 애널은 정액만으로 푸는 데에 무리가 있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허리를 받치고서 그의 애널을 넓히기 위해서 정액으로 적신 손가락을 쑤셨다. 진짜 핥으면 안 돼? 를르슈는 절대로 안 된다면서, 핥으면 바로 끝이라고 말했다. 끝이라니, 뭐가 끝인지 알고서나 하는 소린지. 하지만 스자쿠는 오랜만에 하는 섹스에 초를 치고 싶진 않았다. 분위기를 못 읽는 천연 남자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어도, 섹스할 때의 눈치 만큼은 발군인 스자쿠였다.
타액을 주욱 흘려서 를르슈의 애널에 찌걱거리는 소리를 더했다. 이미 스자쿠의 페니스 모양대로 길들여진 를르슈의 애널은 조금 더 적셔졌다고 바로 페니스를 기다리며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스자쿠도 웃옷과 바지를 벗고서 달려들었다. 입고 있던 자신의 속옷 끝이 프리컴으로 젖어 있는 것을 본 스자쿠는 쓰게 웃었다. 를르슈의 애널에 들어간 손가락은 어느덧 세 개가 되었고, 찔걱거리는 소리를 따라서 안쪽을 쑤셔주면 를르슈가 높은 목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흐으응, 응, 으응, 아, 우으…! 스, 스자, 쿠, 아으, 하…!”
“후, 이제 넣을게.”
“아! 아아아! 으, 윽, 커, 너…무 커!”
“오랜만이잖아.”
“흐아, 앙, 아! 아앙! 아, 스, 자쿠, 갑자기, 움, 직이면, 아, 아으, 응, 후으, 읏…!”
오랜만에 하는 섹스라서 그런지, 를르슈는 기특한 소리만 했다. 스자쿠는 힘들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페니스를 받아내는 를르슈의 애널 안쪽이 완전히 익숙해져 있는 것이 좋았다. 마냥 좋기만 한 섹스는 오랜만이었다. 허리를 거칠게 흔들어대면서 를르슈의 벌어진 다리 사이를 더욱 깊게 파고든다. 를르슈를 치고 받을 때마다 덜렁거리는 를르슈의 페니스 끝에서는 정액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가고 있는 를르슈의 오르가즘에 스자쿠는 키득거리면서 그의 페니스를 붙잡고 흔들어주었다. 갑자기 페니스와 애널에 동시에 가해지는 쾌락에 를르슈가 베개를 붙잡고서 엉엉 울었다. 그래도 스자쿠는 멈추지 않았다.
를르슈의 엉덩이를 붙잡고서 더욱 안쪽으로 쳐올릴 때마다 를르슈는 허억, 윽, 하고서 신음하며 스자쿠가 안쪽까지 들어가는 것에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안 돼, 거기, 들어가면, 싫어, 싫어…! 무서, 워! 스자쿠, 스자쿠, 그만, 그만, 아, 아앙, 하으, 으응…!”
“으응, 를르슈. 여기도 좋아하잖아.”
“이상해, 이상해지니까, 싫어, 아, 아으윽…!”
뱃속 안쪽을 꽈악 눌러오는 스자쿠의 페니스가 어딘가를 박아오는 것에, 를르슈는 차마 소리도 내지 못하고 목을 젖히면서 눈을 부릅떴다. 아, 이거, 이거 안 돼. 정말 안 돼. 를르슈는 안된다는 생각만으로 가득해져버린 머리와, 하얗게 변한 시야와, 스자쿠의 페니스가 안쪽에서 귀두로 쳐올리는 그곳의 생생함이 느껴졌다. 스자쿠의 페니스가 를르슈의 막다른 곳까지—소위 말하는 결장이라는 부분까지 안으로 들어설 때마다 를르슈는 기절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쾌락에 휩쓸려야만 했다.
몸이 덜덜 떨리고, 온몸에 소름이 돋아서, 스자쿠가 붙잡은 팔의 힘 마저도 쾌감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를르슈는 제 가슴을 적시는 투명한 액체가, 다리 사이를 흥건하게 적시다 못해 침대 시트까지도 척척하게 만든 것에 고개를 흔들었다. 스자쿠의 페니스가 결장을 꿰뚫을 때마다 를르슈는 버릇처럼 분수를 싸는 것이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나, 싫다고, 했…는데!”
“응, 귀여웠어. 좋았어. 를르슈의 야한 얼굴. 응, 좋아.”
스자쿠는 또 쪽쪽거리는 베이비 키스를 퍼붓는다. 질척해진 몸뚱아리를 끌어안고서 스자쿠가 계속해서 섹스를 이어가기를 원했다. 침대, 다 젖었는데. 를르슈가 훌쩍거리면서 다 젖은 침대 시트를 그러쥐고서 중얼거리는 것에, 스자쿠가 웃으면서 말했다. 다 끝나고 나서 내 침대에서 자면 되잖아. 를르슈 침대는 안타깝게 되었지만. 그건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스자쿠가 움직일 때마다 를르슈의 신음이 한 번씩 짓눌려 흘렀다. 신음하는 를르슈의 목소리가 엉망진창이 되어가는데도 스자쿠는 그가 더 울어버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를르슈의 몸을 주물렀다. 그가 좋아하는 애널, 살집이 겨우 붙은 엉덩이, 매끈하게 빠진 허리, 덜덜 떨리고 있는 안타까운 다리나 팔, 붉어진 귀두 끝으로 계속해서 정액과 분수를 반복해서 싸는 귀여운 페니스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체액으로 젖어서 엉망이 된 를르슈의 얼굴에 키스를 한다. 입술 안쪽에서 혀가 섞이다가 숨을 따라가지 못하는 를르슈 입밖으로 혀를 내밀어 섞으면 스자쿠는 그 귀여운 키스에도 응해주었다.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를르슈에게 가감하지 않고서 마음대로 해버린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를르슈의 뻐끔거리는 애널에서 스자쿠의 정액이 흐르고, 스자쿠는 를르슈의 입안에 제가 지금까지 박고 있었던 페니스를 물려주고 있었다. 를르슈, 이거 좋아하지? 스자쿠가 물어오면, 를르슈는 제 체액과 정액으로 젖어있는 스자쿠의 페니스를 입술 끝으로 쪽쪽 빨아올리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에 다 들어가지 않는 부분은 젖은 손끝으로 애무하면서 문질렀다.
펠라치오를 하는 내내 페니스가 들어갔던 애널은 뻐끔거리면서 그 허전함을 채우고 싶어서 안달이 났고, 스자쿠의 페니스가 담겨있는 입은 성기처럼 변해서 스자쿠의 사정을 기대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좋아, 채워지고 싶어. 스자쿠로 가득해졌으면 좋겠어. 를르슈는 자신의 다리 사이에 있는 페니스를 죽죽 훑으면서 스자쿠의 페니스를 한가득 입에 물었다. 목구멍 가득 들어차는 페니스가 짙은 정액을 한 차례 사정하는 것에 를르슈는 필사적으로 삼키려고 애를 썼다.
그 이후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침대에서 눈을 떴다. 저 건너편에 엉망이 된 를르슈의 침대가 보였다. 스자쿠는 어디 있지? 평소라면 를르슈의 옆에서 끌어안고 있어야 할 그 남자가 보이지 않자, 를르슈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스자쿠는 냉장고 쪽에서 생수 하나를 꺼내어 마시고 있었을 뿐이었다. 를르슈는 심통이 난 얼굴로 스자쿠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마치 강아지를 부르듯이.
“뭐야, 너무하잖아, 를르슈. 내가 개도 아니고.”
“말 안 통하는 건 개랑 비슷하잖아.”
스자쿠가 내민 생수를 만족할 만큼 마시고 난 뒤였다. 를르슈의 옆에 스자쿠가 따라 누웠다. 어느새 깨끗해진 몸이나, 평소처럼 입혀진 파자마 같은 것이 격렬했던 섹스가 꿈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 같은 근육통 같은 것이 그것이 현실이었음을 깨닫게 했다.
“아, 참. 를르슈의 내일 일정은 내가 방금 전에 보고해뒀어.”
“컨디션 난조로 호텔에서 쉬는 거?”
“응, 안타깝게도 그렇게 됐네.”
“정말 아무것도 못하겠어. 진짜 컨디션 난조야.”
“엄살 부리지 마. 좀 심하게 했지만… 그래도 좋았잖아?”
좋았긴 했다. 를르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쉽게 인정하는 를르슈의 모습이 낯설어서, 스자쿠는 조금 당황했다.
를르슈는 스자쿠가 ‘좀 심하게’ 했던 것이 좋았다. 좀처럼 자기 욕망을 부딪치지 않는 스자쿠가, 섹스할 때만큼은 제멋대로 구는 모습이 나쁘지는 않았다. 평소에는 안 그러다가도, 섹스할 때만큼은 솔직해지는 거라면. 그런 거라면 를르슈는 스자쿠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남자가 된 게 아닐까.
사실 섹스할 때 말고도 그렇게 귀여운 부탁을 하면 좋을 텐데. 를르슈는 아쉬운 마음과 충족되는 마음으로 스자쿠에게 말을 걸었다.
“나니까 너 받아주는 거야. 알아, 스자쿠?”
“그거 참 영광이네요, 폐하.”
나이트 오브 제로의 가면을 쓴 척, 스자쿠는 를르슈의 허리를 감싸고 다시 잠을 자자고 했다. 어차피 내일 일정은 없으니까. 를르슈는 아직 잠이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잠이 안 오면 잠이 오는 이야기를 하면 돼. 무슨 이야기 할까. 다음 달에 있을 유로 브리타니아에서의 연설 준비를 해보는 건 어때? 스자쿠의 놀리는 듯한 목소리에 를르슈는 싫다고 말했다.
잠이 오지 않는다고 일 이야기를 하면 잠이 더 오겠어, 아니면 잠이 더 깨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겠어? 스자쿠는 를르슈가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당연히 장난이지. 스자쿠는 를르슈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아기를 달래듯 재울 심산인 듯 싶었다.
어이가 없게도, 규칙적인 박자에 를르슈가 잠에 빠져들려고 할 때였다. 그때 스자쿠가 생각난 것이 있는 것처럼, 약간 눈치를 보듯이 무언가를 질문했다.
“를르슈, 근데 나 궁금한 게 있어.”
“뭔데?”
“왜 그렇게 일본에 오고 싶었어?”
“……일 때문에.”
“그건 핑계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를르슈가 일본에 오고 싶었던 이유를 난 모르겠더라고.”
스자쿠는 를르슈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중얼거렸다.
“나를 일본에 돌려보내는 게 아닐까 걱정까지 했단 말이야.”
“뭐? 그럴 리가 없잖아. 너는 나의 나이트 오브 제로야. 내 옆에 있어야지!”
“그렇지?”
“당연한 소리를.”
스자쿠는 를르슈의 대답에 흡족한 듯이 웃었다. 머리 위에서 스자쿠가 쿡쿡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리자, 를르슈는 그가 나름대로 불안했음을 깨달았다.
사실은 스자쿠가 고향이라는 편한 상황에서 자신을 의지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일본행을 선택한 것을 알면, 스자쿠는 황당해 할까, 아니면… 그 마저도 를르슈다운 이야기라고 웃어줄까. 를르슈는 스자쿠의 품을 파고들면서 어느 쪽이든 좋다고 생각했다. 어느 쪽이든 스자쿠가 를르슈를 선택해주는 것이다.
를르슈가 자신을 일본에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었다는 대답을 들은 후에 스자쿠는 안심을 했는지, 를르슈보다 일찍 잠들었다. 바보 같고 단순한 자식. 나 같으면 기왕 물어본 김에 끝까지 다 물어봤겠다. 를르슈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잠든 스자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다가도,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들기도 하는 이 변화무쌍한 남자는, 어딘가 꽉 막혀있는 보수적인 규칙주의자 주제에…… 를르슈를 제멋대로 사랑한다. 를르슈는 그런 스자쿠가 좋았다. 잠들어있는 스자쿠의 품을 당당하게 파고들면, 스자쿠가 를르슈의 몸을 끌어 안았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넘어섰고…
3월 14일.
스자쿠와 를르슈는 일본에서 극적인 화이트데이를 맞이한 것이다.
<끝>
| 공지 | <부활의 를르슈> 스포일러 있는 글은 * | 2019.05.12 |
| > | 화이트데이 2026 | 2026.03.13 |
| 425 | All's Well That Ends Well | 2026.02.26 |
| 424 | 의처증 남편과 의부증 아내 | 2026.02.25 |
| 423 | 지노카렌의 프로포즈 대작전 | 2026.02.23 |
| 422 | 세기의 사랑 | 2026.02.21 |
| 421 | 스자루루 릴레이 소설 2026 | 2026.02.21 |
| 420 | 컨트보이 를르슈 2 | 2026.02.15 |
| 419 | 발렌타인데이 2026 | 2026.02.14 |
| 418 | 바니걸 스자루루 | 2026.02.10 |
| 417 | 임신한 쇼타 오메가 황자님과 나이트 오브 세븐 1 | 2026.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