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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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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ewell

DOZI 2026.03.20 23:46 read.157 /

사로잡힌 테리러스트 제로, 그러나 황자였던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를 괴뢰 줄리어스 킹슬레이로 만든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샤를 황제에게는 를르슈를 죽인다는 선택지는 없는 듯 했다. 그가 원하는 C.C.를 잡기 위해서는 를르슈의 생존은 절대적이라고 한다. C.C.는 를르슈라는 계약자를 포기할 리가 없을 것이라는 게 추측이었다. 죽여서도 안 되지만, 그를 ‘를르슈’로 살려두는 것 또한 안 된다.

를르슈에게는 이제 를르슈로써 죽을 수 있는 방법도 없고, 살아갈 수 있는 길도 없다.

그렇게 생각한 스자쿠는 침대에 묶여 있는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억지로 맞춘 진정제와 수면제 때문에 를르슈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새액새액 숨을 내쉴 때마다 오르내리는 를르슈의 가슴팍 같은 것을 바라보며, 스자쿠는 자신에 손에 들린 작은 약통을 바라보았다.

페어웰(farewell)은 ‘지금과 작별할 수 있다’는 마약이었다. 보통 극심한 트라우마를 가진 환자들에게 일부러 뇌 손상을 유발시켜 현재의 상처를 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마약성 약물이었다. 효과는 정량을 지켜 투여한다면, 원하는 만큼의 영구적인 기억상실이 일어나고, 부작용은 정량을 지키지 않으면 영원히 현재에 머물 수 없게 되는 기억의 부재 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이었다. 페어웰이 리플레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한 번의 복용으로도 영구적인 약효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를르슈에게 페어웰을 쓰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기어스를 쓸 수 있는 완벽한 미끼 상태여야만 한다는 조건 때문이었다. 하지만 줄리어스 킹슬레이라는 괴뢰를 내세웠던 황제의 작전을 통해 를르슈의 기어스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결론을 낳았다. 어차피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라는 껍질만 존재한다면, C.C.는 포기하지 않고서 미끼를 찾아 헤맬 것이 분명했기에, 를르슈의 기어스는 이제 필수조건이 아니게 되었다.

 

—를르슈가 자신이 기어스를 가지고 있었던 사실을 영원히 잊게 된다면. 기어스라는 악마의 힘을 가졌던 때를 잊게 된다면.

 

스자쿠는 손끝으로 페어웰을 만지작거렸다. 이 작은 약물 하나로 를르슈는 이제 자신이 살아왔던 방식을 잊게 된다. 영원히 현재로 돌아올 수 없게 된다.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 스자쿠는 자신이 사랑했던, 그 여름의 를르슈와 나나리를 떠올렸다. 그때의 소중했던 를르슈는 어디로 가고 왜 자신의 앞에는 테러리스트 제로만 남은 것인가.

아니, 이제 페어웰을 통해서 를르슈를 영원히 그 여름에 가둬놓을 때였다. 그러면 영원히 스자쿠가 지키고 싶었던 를르슈로 남아줄 것이다.

스자쿠는 의사를 불렀다. 혹시 모를 를르슈의 기어스를 방지하기 위해서 바이저를 쓰고 있는 의사가 들어왔다. 스자쿠는 그에게 페어웰을 보여주었다. 의사는 눈치가 빠르고 영리했다. 바로 주사기를 가지고 돌아왔고, 스자쿠에게 받은 페어웰을 를르슈의 손목에 연결된 링거에 꽂아넣었다. 스자쿠는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누워있는 를르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자고 있었다.

 

—안녕, 를르슈. 이게 우리의 작별이네.

 

다음날. 를르슈가 깨어났다. 스자쿠는 그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그는 패닉과 착란에 빠진 상태라고 했다. 투여된 페어웰에 대해서는 알아도 페어웰의 효과가 어디까지 진행될지는 모르기에, 스자쿠는 조금 긴장한 상태로 그의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서 나가게 해줘! 나는 돌아가야 돼, 내가 왜 이런 곳에…!”

 

소리를 지르며 발악하는 를르슈의 주변은 엉망진창이었다. 링거를 함부로 뽑았는지 피투성이가 된 팔을 보고서 스자쿠는 미간을 찌푸렸다. 를르슈는 갑자기 들어온 스자쿠를 보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무언가를 알아본 듯 했다. 를르슈의 발악은 멈추었다. 스자쿠는 그의 이어질 다음 말을 기대했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

 

스자쿠의 이름을 부르진 않는다. 그의 기억이 어디까지 지워졌는지 아직까지는 알 수 없었다. 를르슈를 진정시키고 그 정보를 알아내야만 했다. 페어웰이 얼만큼 효과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이런 상황에서 알아보는 게 신기한걸.”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왜 여기에? 설마 애쉬포드가 우릴 브리타니아에게 넘긴 거냐?!”

 

를르슈는 또 다시 큰 소리를 냈다. 를르슈에게서 애쉬포드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면 꽤나 가까운 과거로 돌아간 듯 했다. 아니면, 를르슈는 또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스자쿠는 그 가능성을 떠올리며 를르슈의 어깨를 붙잡았다. 꽤나 힘이 들어간 손끝에 를르슈가 아픈지 신음했다.

 

“애쉬포드를 알고 있군,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지?”

“질문하는 건 이쪽이다. 지금 넌 몇 살이지?”

“……그쪽에게 대답할 의무 따윈 없어.”

 

저렇게 마음 먹은 를르슈는 정말 입을 열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에, 스자쿠는 다소 비겁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네 여동생의 신변이 걱정되지도 않아?”

“…젠장, 나나리를 어떻게 한 거야!”

“그건 네 대답에 따라 달려있어. 다시 묻겠다. 지금 넌 몇 살이지?”

 

를르슈는 스자쿠를 노려보더니 겨우 입을 열어 대답했다.

 

“14살이다.”

“지금까지 있었던 곳은?”

“그건 조사했으면 다 알고 있지 않…으윽!”

“질문하는 건 이쪽이라고 말했을 텐데.”

 

를르슈의 어깨를 꽉 움켜쥐고 말하면, 를르슈는 아파하면서 스자쿠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체온은 따뜻하고, 손끝은 부드러워서, 스자쿠는 어딘가 이질감이 들었다. 를르슈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것이, 그 피의 젖은 손 주제에, 이렇게.

 

“애쉬포드 학원의 클럽하우스에서… 지내고 있다. 나나리도 함께.”

“…….”

“이제 다 대답했으니 나나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말해줘!”

“아니, 아직 질문할 게 더 남아있다.”

“뭐…? 약속이랑 다르잖아!”

“그 약속을 지켜줄 의무는 없어.”

 

스자쿠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의사를 불렀다. 를르슈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을 여전히 버리지 못한 채로, 스자쿠는 의사에게 페어웰에 대한 약효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를 확인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14살의 를르슈. 스자쿠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그 시절의 를르슈는 스자쿠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저 한 명의 브리타니아의 군인, 나이트 오브 라운즈로써 인식하고 있는 듯 했다. 14살의 를르슈가 18살의 스자쿠를 알아볼 방법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훨씬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 스자쿠는 를르슈가 자신을 그대로 알아보지 못한 채로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를르슈는 스자쿠의 뜻대로 가만히 있어준 적이 없었다는 것을, 스자쿠는 간과한 것이다.

스자쿠가 다시 를르슈의 병실에 들어간 것은 3시간 후였다. 를르슈의 병실은 누군가 치워주었는지 깔끔해졌고, 피투성이가 되었던 를르슈의 팔도 치료가 된 상태였다. 피 묻은 환자복도 한 번 갈아입은 듯 했다.

겁에 질린 듯 하면서도 주눅 든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허세를 부리는 14살 를르슈의 눈빛은 우습기 그지 없었다. 아무것도 지킬 수 없으면서, 무엇 하나 지킬 생각도 없었으면서. 그런 눈빛을 하고 있는 를르슈를 보면서 스자쿠는 옆에 놓인 간이의자에 앉았다.

 

“상황은 들었겠지. 너는 원래 18살이고, 테러에 휩쓸려 머리를 세게 부딪쳤어.”

“그래, 그리고 뇌진탕 때문에 기억상실 상태라는 것 정도는 질리도록 들었다.”

“안타깝게 되었어.”

“……이제 내가 질문해도 되는 건가?”

 

를르슈는 스자쿠를 바라보며 물었다. 스자쿠는 14살 를르슈가 물어봤자 나나리에 대해서 물어보는 게 고작일 거라고 생각했다. 스자쿠가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면, 를르슈는 고민하다가 겨우 입을 열어 질문했다.

 

“의사가 너를 쿠루루기 경이라고 부르는 걸 들었어. 그러니까… 네가 쿠루루기 스자쿠라는 게, 정말인가…? 내가 알고 있던 그 스자쿠가 맞는 건가?”

 

스자쿠는 다시끔 생각하게 된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뜻대로 가만히 있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를르슈는 긴장한 손끝을 주먹쥐면서 떨림을 감추려고 했다. 그는 겁에 질려있었다. 스자쿠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맞아. 나는 네가 기억하고 있는 쿠루루기 스자쿠다.”

“어째서 브리타니아에… 그것도 왜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된 거야? 너는, 너는 브리타니아를 싫어했잖아!”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었다. 도망치려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가 다급하게 스자쿠, 라고 이름을 불렀다. 그 부름은 처절하고 안타까워서, 스자쿠는 나가려던 문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나나리는… 괜찮은 거지?”

 

그 질문에 스자쿠는 대답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14살의 를르슈는 어리더라도 를르슈였다. 그는 자신을 감금하고 있는 상대가 스자쿠라는 것을 알고 난 뒤로, 나나리의 안전은 확보되었다고 계산한 것이다. 그 계산의 기저에는 스자쿠가 나나리를 해치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 를르슈다운 계산이었다. 그리고 그 계산과 믿음에 딱 들어맞게도, 스자쿠는 나나리의 안전을 제일 우선순위로 삼았다.

지금 눈앞의 남자가 쿠루루기 스자쿠인 것을 확인하고, 그제서야 나나리의 안전에 대해서 물어보다니. 를르슈다운 영악한 전략이었다. 를르슈는 스자쿠가 대답하지 않고서 나간 것에 대해서 또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나나리가 안전하다는 걸 확신하겠지.

정말 싫지만 를르슈의 계산대로다. 스자쿠는 미간을 찌푸리며 를르슈의 현재 상태를 적어둔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페어웰은 훌륭한 효과를 보여주었다. 를르슈는 자신이 18살의 테러리스트라는 것을 잊어버렸다. 기어스라는 힘도 잊어버린 그에게 더 이상의 페어웰 투약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까지 덧붙인 서류를 보고서, 스자쿠는 작게 혀를 찼다.

이 판단은 틀렸다. 페어웰은 한 번 더 쓰여야 한다. 나나리의 안전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한, 를르슈는 한 번 더 반역의 의지를 품을 것이다. 아니, 영원히 반역할 것이다. 나나리를 위해서 세계를 바꾸겠다는 그 마음은 꺾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스자쿠는 고개를 흔들며 잡념을 떨쳤다. 

 

—내가 있는 이상, 제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페어웰 2차 투약은 일주일 후로 잡혔다. 더 빠른 시일 내에 진행할 것을 스자쿠는 원했지만, 짧은 시간 안에 과다투약하여 사망하는 사례가 있었다고 해서 양보한 것이었다. 를르슈를 세상에서 지워내도, 를르슈를 죽여서는 안 되었으니까.

스자쿠는 나흘 동안 일에 시달렸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로써 전장에 나서야만 했고, 랜슬롯을 위해서 시간을 내야만 했다. 그 와중에도 를르슈에 대한 보고를 받는 것을 게을리 하진 않았다. 나흘 동안 를르슈는 병원 안에서 무너졌던 몸을 정비하면서, 스자쿠와 나나리에 대해서 물어보고, 신문을 읽고 싶다고 했다. 스자쿠는 체력을 회복시키는 일 말고는 어떠한 것도 대꾸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 명령은 제대로 실행된 것 같았다. 를르슈는 더 이상 요구하는 것도 없어지고, 그저 먹고 자고 움직일 뿐이었다.

를르슈가 깨어나고 닷새가 되어서야 스자쿠는 를르슈의 병실에 들릴 수 있었다. 밖은 어두운 밤이었다. 를르슈가 있는 카멜롯 안의 기밀보안유지 구역의 병실 안은 그런 낮과 밤의 흐름을 느낄 수 없는 곳이었다. 시계를 보지 않으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런 곳에 사람을 두는 것은 거의 고문과 다름없다. 제정신이었더라도 미치는 것이 당연한 공간.

그런 곳에서 를르슈는 스자쿠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스자쿠가 들어오자, 를르슈는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생각보다 늦었네. 나이트 오브 라운즈는 많이 바쁜가봐, 스자쿠.”

 

를르슈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스자쿠는 시선이 낮아져 저를 올려다보는 를르슈의 어린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기어스를 쓸 줄 모르는, 피 비린내 나는 전장을 모르는, 그저 지키고 싶은 의지만 순수하게 빛이 나는 눈. 그 시선을 피하면서, 스자쿠는 이전처럼 간이의자에 앉았다.

 

“벌써 며칠이나 지났는지 모르겠어. 여긴 시계도 없어서… 적당히 세어보는 수밖에 없네.”

“네가 눈을 뜨고 나서 닷새째야.”

“그렇군.”

“잘 지내는 거 같아서…….”

 

다행이야, 라는 말을 꺼내려다가 스자쿠는 말을 삼켰다. 무엇이 다행인지 알 수 없었다. 이틀 뒤면 를르슈는 다시 페어웰을 맞는다. 그게 다행의 끝인건가? 스자쿠가 입을 다무는 것에 를르슈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18살이 되어서도 우리는 친구야?”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두 눈을 부릅떴다. 친구라는 말이 를르슈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정신은 14살이라고 하더라도, 몸은 18살의 를르슈다. 유피를 죽였던 그 손을 가진 18살의 를르슈다. 그런 네가 친구라는 말을 입에 올려? ‘우리’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는 거야?

하지만 스자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지금의 를르슈는 14살의 를르슈.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를르슈니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역시 친구가 아닌 거겠지?”

 

를르슈는 그런 스자쿠의 반응을 보고서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14살의 를르슈는 솔직하다. 스자쿠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속상해하고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 어딘가 감추는 것도, 그것을 숨기기 위한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를르슈에게 스자쿠가 할 수 있는 말은 한정적이었다.

 

“왜… 친구가 아닐 거라고 생각해?”

 

고작 한다는 소리가 친구가 아니라고 하는 말에 꼬투리 잡는 것 뿐이었다. 를르슈는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고서, 겨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친구였다면, 네가 날 여기에 둘 리가 없으니까.”

“…….”

“친구였다면, 네가 왜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되었는지, 왜 내가 여기에 있는지 설명해줬을 거야.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고… 나를 닷새 동안 여기에 혼자 두고 갔잖아.”

“…….”

“난 너를 친구로 생각하는데, 이제 넌 아닌가봐.”

 

그건 네가 먼저 배신했기 때문이야. 나를 배신하고, 유피를 죽이고, 너는 모두를 속이고.

스자쿠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줄리어스를 앞에 두고서도 스자쿠는 그러지 못했다. 하물며 진짜 죄가 없는 14살의 를르슈에게도 소용이 없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스자쿠는 또 말을 삼켰다.

 

“그래도 네가 살아있는 걸 알아서 기뻤어, 스자쿠. 그때 이후로는 본 적이 없었으니까.”

 

스자쿠는 를르슈가 브리타니아를 부수겠다고 말했던 그때를 떠올렸다. 그때부터 그에게는 반역할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14살 를르슈에게도 여전히 그때는 살아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기억은 그때 보다 훨씬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를르슈에게 페어웰을 얼만큼 써야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예 영원히 를르슈를 잃어버려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나리한테는 내가 잘 지낸다고 전해줄래? 걱정하고 있을 게 분명하니까.”

 

를르슈를 영원히 잃어버려도 좋다. 나나리를 생각할 수 없는 를르슈가 훨씬 더 나을 것이다. 차라리 그는 껍질만 살아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편이 좋다.

스자쿠는 의자에서 일어났고, 를르슈는 그렇게 떠나는 스자쿠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병실 밖으로 나가기 직전에 스자쿠는 를르슈를 돌아보았다. 의연한 표정으로 스자쿠를 바라볼 줄 알았던 를르슈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어쩌면 속으로는 태연한 주제에 겉으로는 우는 표정으로 연기를 하는 것일지도 몰라. 스자쿠는 그런 를르슈를 뒤로 하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다음날이 되었다. 모처럼 군무가 없는 날이었고, 스자쿠는 를르슈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를르슈는 잘 자고 일어났으며, 아침 밥도 잘 먹었고, 평온한 듯 보인다고 했다. 스자쿠는 그 안에 숨겨진 거짓을 찾으려고 한참이나 그의 감시카메라의 영상을 들여다보았다. 를르슈는 정말로, 잘 자고, 잘 일어나고, 아침 밥도 잘 먹었다. 

아무도 들리지 않는 병실은 사실상 감옥과 같았음에도, 를르슈는 정말 평온한 듯 보였다. 스자쿠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금의 를르슈에게는 기어스도, 거짓도 없다는 것은 이제 입증되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나나리라는 존재가 너무나도 컸다. 그렇다면…….

 

“또 와줬네, 스자쿠. 여기는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들어오는 사람도 너 뿐인 거 같아.”

 

스자쿠는 를르슈를 찾아갔다. 무언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스스로도 가늠조차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를르슈를 찾아가면 답이 나올 것 같았다.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만에 하나 를르슈를 제로로 만드는 기폭제가 된다면, 스자쿠는 지체 않고 그를 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이 생각에 닿고 나면, 스자쿠는 자신이 쓸데 없는 짓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것은 기록으로 남지 않는게 좋다고 생각하면서, 스자쿠는 감시카메라의 녹화버튼을 꺼두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를르슈는 침대 위에 앉아서 들어오는 스자쿠를 맞이했다.

 

“아마도 그럴 거야.”

“여기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만 다니는 병원인가?”

“…….”

“대답하기 어려우면 말 안 해도 괜찮아.”

“……몸은 괜찮아?”

“아아, 응. 너무 괜찮아서 밖에서 달리기라도 하고 싶을 지경이야.”

 

물론 농담이야, 달리기는 내 장르가 아니니까. 를르슈는 덧붙여 말하면서 작게 웃었다. 웃고 있는 를르슈를 보고 있으면 스자쿠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스자쿠가 말없이 앉아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에 를르슈는 입을 열었다.

 

“스자쿠,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아직도 말해줄 수 없어?”

“응.”

“어차피 브리타니아에서는 내가 죽은 걸로 알고 있을 텐데 왜 나이트 오브 라운즈인 네가…….”

“그 질문에는 대답해 줄 수 없어.”

“…….”

 

를르슈는 스자쿠를 잠시 쳐다보았다. 노려보았다던가, 바라보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저 쳐다보는 시선에 스자쿠는 고개를 들었다.

 

“그럼 왜 왔어? 이제 친구도 아니면서.”

 

우리가 친구가 아니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를르슈의 말을 들으면서 스자쿠는 대답 대신에 떠오르는 다른 말을 했다.

 

“……넌 생각보다 냉정하구나. 4년 간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는데.”

 

를르슈는 그 말에 눈을 부릅떴다. 그는 말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는지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쏟아지는 말들은 몇 번이나 연습한 연극대사와 같이 준비된 말들이었다. 그는 이 말들을 스자쿠에게 말하기 위해서 속으로 몇 번이고 연습하고 외웠을 것이 분명했다.

 

“냉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 나를 죽일 거잖아. 그게 브리타니아의 방식이잖아. 어차피 난 이제 힘도 없고 뒷배도 없는 나약한 일반인에 불과한데…. 그렇지만 나는 이대로 죽을 수 없어. 나나리가, 나나리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나나리를 지켜야만 해. 그 아이가 또 다시 이용당하는 걸 지켜볼 수는 없어. 그건 스자쿠… 너도 마찬가지일 거야.”

“…….”

“네가 왜 나를 여기에 가두고 있는지 알 수 없어. 18살의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확인할 방법이 없어. 그냥 난 너를… 네가 나나리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만 믿을 뿐이야.”

“…….”

“설령 우리가 친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너라고 해도 그 정도는 지켜주겠지, 하면서.”

 

를르슈의 말은 아무런 정보가 주어지지 않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그럴싸한 정답이었다. 스자쿠의 빈틈을 파고들기에는 적당한 비수였다.

 

“너는 언제까지고 나나리의 핑계를 대는구나, 를르슈.”

“…뭐?”

“그 핑계를 어디까지 댈 수 있는지 궁금해.”

 

스자쿠는 를르슈의 침대에 다가갔다. 펼쳐진 간이의자 위로 푸른색의 망토를 대충 던져놓았다. 묵직한 옷자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에 를르슈는 자신의 옆으로 다가오는 스자쿠를 빤히 쳐다보았다. 스자쿠는 자켓을 벗었다. 이제 움직임이 편해졌다. 사람 하나 죽이는 데에는 어떠한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움직임은 가벼워졌다.

하지만 를르슈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스자쿠는 를르슈를 침대에서 끌어내렸다. 병실 안에서 갇혀있는 생활만 반복했던 를르슈는 무력했다. 그는 겨우 바닥에 발을 딛고서 넘어지지 않는 것이 고작이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몸을 침대 쪽으로 기대게 했다. 병실 침대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가 나면서 를르슈가 아파했다. 아프다고 말하는 를르슈의 말을 무시하면서, 스자쿠는 그의 허리부터 골반까지의 이어지는 선을 손끝으로 덧그렸다.

 

“뭐, 뭐하는 거야…!”

“실험을 하나 해보고 싶어서.”

“무슨…!”

“네 몸은 18살의 기억이 남아있을까?”

 

를르슈는 자신의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내리는 스자쿠의 손길에 몸을 움츠렸다. 14살이라면 알 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스자쿠가 하는 짓이 어떤 행위로 이어질 것인지,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를르슈가 소리를 지르려는 것에 스자쿠는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여기서 소리를 지르는 건 의미가 없어, 를르슈. 그건 알고 있겠지?”

“…하, 하지 마.”

“그런 선택지도 의미가 없어.”

“이런 걸 왜……?”

“난 정말 확인하고 싶거든, 네가 진짜 14살인지.”

 

왜냐면, 넌 지독한 거짓말쟁이니까, 나를 속이는 것 정도는 쉽잖아.

스자쿠는 를르슈의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그가 혀를 깨물지 못하도록 손가락 두 개를 입에 물려주고, 스자쿠는 다른 한 손으로는 를르슈의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하얀 살결은 아직 손자국 하나 남지 않은 채였다. 스자쿠는 자신의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내렸다. 페니스만 딱 드러날 정도로 벗은 스자쿠와 다르게 를르슈는 아래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태였다. 아직 발기하지 않은 페니스를 를르슈의 엉덩이 사이에 부비면서 스자쿠는 짧게 숨을 삼켰다.

긴장으로 달아오른 를르슈의 체온이 페니스 쪽에 생생하게 닿아오면서, 스자쿠는 가볍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페니스를 죽죽 훑으면서 를르슈의 엉덩이골을 부벼댔다. 손가락 두 개로 입이 쑤셔진 를르슈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흘리면서 반항하기 위해서 애를 썼다. 하지만 스자쿠의 힘에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는 무력했다. 를르슈는 약한 인간이다. 같은 또래의 남자 하나 걷어낼 힘 조차 쓸 수 없는, 그런 연약한 사람이었다.

그런 힘 없는 사람을 억누르고서 발정하는 자신은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가? 스자쿠는 를르슈의 애널에 자신의 페니스를 문질렀다. 꽉 다물린 애널은 무엇 하나 쉽게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것처럼 스자쿠를 거부했다. 이대로 들어가는 것은 스자쿠도 괴로울 것이다. 하지만 이 행위는 쾌락을 위한 섹스가 아니니까, 스자쿠는 그 고통 정도는 감수할 생각이었다.

 

“아, 안 돼, 들어가면, 아앗…!”

“후우, 흣…. 힘 빼, 를…르슈!”

“스, 스자쿠, 아파, 아프니까, 아읏!”

 

억지로 들이밀어진 애널은 기어이 피를 보고 말았다. 스자쿠는 자신의 페니스를 물고 있는 를르슈의 애널이 찢어진 것에 혀를 차며 남은 기둥 부분을 꾹 밀어넣었다. 안쪽을 한 번 뚫어두면 다음을 밀고 들어가는 것은 쉬웠다. 다만 긴장을 풀지 않아 느껴지는 압박감이나 젖지 않아 마른 마찰열 같은 것이 느껴졌다. 스자쿠는 이것이 쾌락을 위한 섹스가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묘하게 흥분하며 쿠퍼액을 질질 흘리는 자신의 페니스를 느꼈다.

등을 돌린 채로 쑤셔넣고 있기 때문에, 를르슈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피를 본 것으로 보아 를르슈는 스자쿠를 받아내는 법을 잊어버린, 정말 14살의 소년으로 돌아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몸을 맞대고 난 이후 꽤 오랜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그 익숙함을 잊어버려서 처음처럼 좁아진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쪽이든 그럴싸한 가설이었다. 그러나 스자쿠는 후자를 더 믿고 싶었다. 18살의 를르슈가 자신에게 아직도 거짓말을 하고 있기를 바라는 자신을 깨달으며, 스자쿠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 흐으…! 아, 아으, 아, 스, 스자쿠, 왜… 아앙…!”

“느끼는 거야? 그렇다면 네 몸은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나봐.”

“아냐, 아앗, 아, 니야, 흐윽, 윽, 우으, 으응…….”

“우리가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한 건 맞았어. 우리는 섹스를 하는 사이였거든. 그건 친구가 아니잖아.”

“흐으으, 아, 으으응! 아, 으, 스, 스자, 쿠…!”

 

우리는 몸도 마음도 통한 연인이라고 서로를 믿으면서, 그러면서 은밀하게 서로를 배신하고 있었어. 를르슈, 14살의 너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겠지. 스자쿠는 자신의 잇자국이 남은 를르슈의 목덜미를 핥아올렸다. 스자쿠의 혓바닥이 문질러지는 감각에 를르슈가 몸을 떨며 뒤를 조였다. 스자쿠는 자신이 꽤나 쌓여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를르슈의 안을 좀 더 들쑤시다가 사정했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사정에 겨우 숨을 골랐다. 입에 물려진 스자쿠의 손가락은 너덜너덜해진 채로 를르슈의 입술을 문질렀다. 타액에 젖은 손가락이 제 입술을 더듬는 것에 를르슈는 스자쿠를 불렀다. 힘이 풀려 흐물거리는 혀끝으로 겨우 발음하는 스자쿠의 이름에 스자쿠는 대꾸조차 해주지 않았다.

스자쿠는 페니스를 꺼내면서 뚝뚝 떨어지는 정액의 흔적을 손끝으로 훑어주었다. 피와 뒤섞인 분홍색 체액을 애널에 다시 문질러주면 를르슈가 몸을 떨며 거부했다. 다물리지 못한 다리가 벌벌 떨리면서 어떻게든 스자쿠를 피하려고 조여드는 것에, 스자쿠는 그 미미한 반항이 우스워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하…. 그거 알아, 를르슈? 섹스를 했다고 모두가 연인 사이인 것도 아니야.”

 

를르슈의 반항은 힘없이 끝나고 말아버렸다. 스자쿠는 페니스를 죽죽 훑어내렸다. 가볍게 쥔 압박감에 페니스는 다시 자극을 받고 발기했다. 를르슈는 애널 쪽으로 다시 느껴지는 열기에 훌쩍거리면서 침대 시트를 그러쥐었다. 스자쿠는 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자신의 밑에 있는 것이 14살 를르슈인지, 아니면 자신이 알고 있던 배신자 제로인지, 그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허리짓에 울음을 터뜨리며 쾌락을 참을 수 없어 괴로운 를르슈.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스자쿠의 강간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그 후로 를르슈는 기절했고, 스자쿠는 손수건으로 뒤처리를 하고서 옷차림을 정돈했다. 자고 있는 를르슈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시간은 어느새 하루를 넘겼고, 스자쿠는 시계를 보고 이제 곧 를르슈의 페어웰 2차 투약이 다가오고 있음을 확인했다. 병실 밖을 나선 스자쿠는 를르슈의 몸을 깨끗하게 한 뒤, 투약할 준비가 마치면 자신을 부르라고 했다.

 

두 번째 페어웰을 맞는 를르슈는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스자쿠와의 섹스에 대한 여파가 상당했다. 스자쿠는 페어웰이 들어간 후에 를르슈에게 진정제와 수면제를 반복해서 투여하도록 명령했다. 를르슈가 눈을 뜨는 것은 몸이 어느 정도 회복하고 나서가 좋겠다고 말하는 나이트 오브 세븐의 명령에 모두들 고개를 조아렸다.

그 이후로 스자쿠는 바빴다. 들이닥치는 군무 사이로 를르슈의 회복까지 나흘이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어날 때마다 그는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를 찾으면서 엉엉 울부짖었다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도와달라고 빌었다고 했다. 아직 좋지 않은 몸 상태 때문에 그때마다 진정제를 투여했기에 큰 난동은 부리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스자쿠가 언제쯤이면 를르슈를 다시 만나러 갈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을 때는 어느덧 사흘이라는 시간을 넘겼다.

일주일이 지난 것이다. 스자쿠는 를르슈를 만나러 가겠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그를 만나러 바로 움직였다. 군무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고, 를르슈를 느긋하게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번엔 어떤 를르슈를 만날 수 있을지, 두 번째 페어웰은 어디까지 를르슈로부터 나나리를 지웠을 지가 궁금했다.

를르슈의 꼴은 참혹했다. 계속해서 발작과 패닉을 반복했기 때문에, 혹시 를르슈가 스스로를 자해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팔다리를 모두 묶어놓은 상태였다. 부드러운 천으로 덧대놓긴 했어도 거칠게 움직인 탓에 손목과 발목엔 쓸린 상처가 가득했다. 스자쿠는 잠들어 있는 를르슈를 보고서 그의 팔다리를 묶어둔 끈을 풀어주었다. 그 잠깐 스치는 스자쿠의 손길에 를르슈는 감았던 눈을 떴다. 조심스럽게 떠오르는 보라색 눈동자에 스자쿠는 잠시 긴장했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

 

그건 14살의 를르슈가 처음 스자쿠를 만났을 때 했던 말과 똑같았다. 어떠한 기억 속에서도 나이트 오브 라운즈를 알아보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어머니가 나이트 오브 식스 출신이기 때문이겠지. 스자쿠는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를르슈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를 알아보면서도, 스자쿠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기억은 10살 이전으로 돌아간 것일까. 스자쿠는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하지만 너무 간절하면 이루어질 것도 그르치게 되는 법이다. 스자쿠가 잠시 입을 열려던 찰나, 먼저 말을 뗀 것은 를르슈였다.

 

“나를, 구하러… 온 건가?”

“…….”

“마, 맞아. 어머니가, 어머니가 나를 버렸을 리가 없어!”

 

스자쿠는 어머니를 찾는 를르슈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스자쿠가 알고 있던 를르슈는 어디까지나 나나리를 생각하며, 그녀를 우선순위로 움직이는 남자였다. 어머니를 언급하며 어머니에게 의존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를르슈는 어머니를 찾으면서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제 스자쿠에게는 확인의 시간이었다. 스자쿠는 눈물을 닦느라 정신이 없는 를르슈의 턱을 붙잡아 자신을 향하게 했다. 18살의 얼굴을 하면서도, 눈빛만큼은 어린 아이로 돌아간 를르슈의 표정은 이질적이었다. 공포를 감추지 못하고, 당황을 숨기지 못하는 그 어린 모습에 스자쿠는 혀를 차고 싶어졌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지금 넌 몇 살이지?”

“무, 무엄하다. 감히 황족의 몸에…!”

“대답해.”

“…….”

“대답하지 않으면 험한 꼴을 보게 될 거야.”

 

를르슈는 겁에 질린 얼굴로 자신의 나이를 말했다. 7살. 그 나이는 스자쿠를 만나기 훨씬 이전, 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났던 테러를 겪기도 전이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대답이 진짜라고 생각했다. 페어웰은 생각 이상으로 약효가 뛰어났다.

 

“지금까지 살던 곳은?”

“…브리타니아 황궁 안에 있는 아리에스다.”

“같이 사는 사람들은?”

“어머니와 나나리…….”

 

나나리의 이름이 나오자 스자쿠는 자신이 굴렸던 룰렛이 꽝으로 돌아간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았다. 아직 를르슈에게 나나리가 세상의 중심이 되기 이전이다. 어머니와 여동생만으로도 세상이 완벽했던 이 7살 아이인 를르슈에게 스자쿠는 조금 가혹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7살이어도 를르슈는 를르슈다. 스자쿠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기로 했다.

 

“정신을 차린 것 같아서 다행이야. 를르슈.”

“……무슨 소리야?”

“의사를 부를 테니 얌전히 있도록 해.”

“나는 아, 아리에스로 돌아가는 건가?”

“…….”

 

스자쿠는 자신을 하대하는 어린 를르슈 황자를 보면서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 다정하게 웃어주는 미소와 다르게 아무런 대답도 없이 병실 밖을 나가는 스자쿠를 보면서, 를르슈는 그를 부를 수도 없었다. 그가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에.

의사를 부르고 손발의 상처를 치료 받은 를르슈는 스자쿠가 들어오는 것을 기다렸는지, 병실 안에 스자쿠가 들어오자마자 바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스자쿠에게 오려는 것을 스자쿠가 손을 들어 거리를 두자, 를르슈는 불안한 듯 스자쿠의 망토 끝자락을 잡았다. 마치 떼를 쓰는 어린 아이처럼.

 

“너는, 나, 나이트 오브 라운즈잖아. 나를 구하러, 온 거지?”

 

를르슈는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자기가 떨어진 곳은 자신이 만든 지옥이라는 걸 모르는 를르슈. 안타깝다면 안타깝고, 그의 업보라면 당연한 그 이치를 알려주고 싶기도 하면서도, 모르는 척 영원히 농락하고 싶기도 하고. 스자쿠는 이번에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를르슈는 말 없는 스자쿠에게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제 그만, 아리에스로 돌아가고 싶어….”

 

스자쿠의 망토를 쥔 채로 힘없이 중얼거리는 를르슈는 신선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도 나나리가 존재했다. 어머니를 잃었던 테러 사건이 아니더라도 를르슈에게 나나리가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다시 를르슈는 일어서고 말 것이다. 몇 살이든 간에, 를르슈는 를르슈였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스자쿠는 를르슈가 움켜쥐고 있는 망토를 풀어 그에게 내밀었다. 18살의 몸을 하고서 7살의 시선으로 스자쿠를 바라보는 를르슈는 어딘가 연극 속의 한 주인공 같기도 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스자쿠의 망토를 받은 를르슈는 이것이 무슨 의미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네 말대로 나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맞아. 나이트 오브 세븐이지. 이름은 쿠루루기 스자쿠.”

“…나이트 오브 세븐?”

“너는 지금 7살이라고 했지?”

“그, 래.”

“아니, 넌 사실 18살이야. 네 어머니는 테러 때문에 죽었고, 너의 나나리는 다리와 눈을 못 쓰게 되었지. 너는 그 나나리를 지키기 위해서…….”

 

제로가 된 거야. 스자쿠는 그 말을 삼켰다. 를르슈는 스자쿠가 하는 말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나나리가… 왜 그렇게 된 거야? 벌어진 작은 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를르슈의 말들에 스자쿠는 어딘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더 망가지면 좋겠다. 를르슈가 더 못쓰게 되면 좋을 것 같았다. 페어웰이 아니어도 를르슈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괜찮은 모양이 나올 것 같았다.

스자쿠는 패닉에 빠진 를르슈의 손에 들린 자신의 망토를 다시 빼앗았다. 그리고 그것을 바닥에 내던졌다. 를르슈는 텅 비어버린 제 손을 보고서 당황하며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옷자락이 무겁게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를르슈는 동시에 침대에 머리를 처박힌 꼴이 되었다. 스자쿠는 를르슈를 완벽하게 제압했다.

그러고 보니 14살의 를르슈도 이 꼴로 당했다지. 스자쿠는 를르슈가 입고 있는 옷을 벗겼다. 당황한 를르슈가 반항하면 그 옷이 찢겨나가도 상관없었다. 알몸이 된 를르슈는 스자쿠의 앞에서 안 된다고 소리를 질렀다. 이번에는 그 입이 어디까지 지껄일지 궁금해져서, 스자쿠는 굳이 를르슈의 입을 막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회복이 된 를르슈의 애널은 다시끔 꽉 다물려 있었다. 애널이 만져지자 를르슈는 방금 전과 비교도 안 되게 다리를 휘적거리면서 스자쿠에게 반항하려고 했다. 스자쿠는 움직이는 를르슈의 뺨을 한 대 때렸다. 뺨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그의 따귀에 를르슈는 몸을 움츠렸다.

 

“자, 잘못했어요….”

 

그는 곧바로 용서를 빌었다.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 앞에서 쉽게 굴복했다. 하지만 상대가 스자쿠였다. 아무리 를르슈가 용서를 빌어도 용서해주지 않을 쿠루루기 스자쿠.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를르슈는 스자쿠의 시선을 마주하지도 못한 채로 벌벌 떨면서 잘못했다고 몇 번이고 빌었다.

 

“정말로 잘못했다고 생각해?”

“흐, 흐윽….”

“묻잖아, 를르슈. 대답해.”

“잘못, 했, 으윽, 아, 아우, 으아아앗…!”

 

스자쿠는 무자비하게 를르슈의 애널에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거의 쑤시다시피 한 손가락의 이물감에 를르슈가 비명을 질렀다. 스자쿠는 두 번째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를르슈의 젖지 않은 애널은 벌써 한계였다. 스자쿠의 페니스가 들어갔다가는 또 다시 피를 보게 될 것이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축 늘어진 페니스를 손끝으로 감쌌다. 둥근 고리를 만들어 그 사이로 페니스를 흔들어주면 를르슈가 당황하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쾌락은 를르슈에게 공포로 작용한 듯 했다. 게다가 자신의 몸이면서도 자신의 몸 같지 않은 이 위화감에서도 그는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계속 용서를 빌면 그가 멈춰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몇번이고 잘못했다고 말했다.

스자쿠가 억지로 사정을 시켰을 무렵에는, 를르슈는 울면서 탈진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스자쿠는 협탁 위에 놓인 물을 입술로 먹여주었다. 그걸로도 를르슈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그는 들고 있던 물을 전부 를르슈의 얼굴에 흩뿌렸다. 를르슈는 얕은 물에서도 익사하는 사람처럼 숨을 헐떡거렸다.

숨을 쉬고 있다면 살아있는 거다. 그렇게 판단한 스자쿠는 를르슈의 정액을 애널 위로 덧바르면서 그의 안에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어차피 피를 봐도 상관 없는 몸이니까 굳이 이런 정성을 들이지 않아도 됐는데……. 스자쿠의 페니스 끝이 애널에 닿는 느낌에 를르슈는 안된다고 소리를 질렀다.

 

“아, 안 돼…! 안 돼, 아, 아으, 으, 으응, 흐아아…!”

“할, 때마다… 오랜만이라 힘드네, 를르슈.”

“아파, 아프니까, 너무, 너무 아파, 어머니, 어머니… 아! 으윽! 아, 아파…!”

“어차피… 누구를 불러도 아무도 오지 않을 거야.”

“아니야, 어, 어머니, 도, 도와주세요, 흑, 잘못… 잘못했어요…!”

 

들이밀고 억지로 몸을 열었을 때 를르슈는 기절도 못한 채로 스자쿠에게 붙들려 있었다. 그의 눈은 자신의 아랫구멍에 박힌 스자쿠의 페니스를 보고 있었다. 스자쿠는 를르슈가 잘 느끼는 곳을 부드럽게 쳐올렸다. 아랫배에서 밀어올려지는 쾌감과 함께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기분에 를르슈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다고 우는 를르슈에게 스자쿠는 더 이상의 대꾸없이 그를 강간했다. 무참하게 를르슈를 저지르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몇 번이고 사정한 애널은 다물리지 못한 채로 스자쿠의 정액을 질질 흘렸다. 를르슈는 과호흡이 온 착란 상태에서 스자쿠의 사정을 계속해서 받아내고, 억지로 사정되는 감각에 빠져야만 했다. 시선이 아예 맞지 않는 를르슈는 안타까울 정도로 가엾은 얼굴이었다. 스자쿠의 폭력을 모두 받아낸 그 몸은 18살이지만, 그의 정신은 7살의 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것을 생각하면 스자쿠는 그의 목을 조르고 싶어졌다. 그가 숨이 멎을 때까지 조르고 싶어졌다.

하지만 를르슈는 살려둬야 한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목을 조르는 대신에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면서 생각했다. 페어웰이 한 차례 더 필요할 것 같았다. 를르슈에게 아직 나나리가 남아있었다. 그녀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지워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를르슈가 아예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스자쿠는 껍데기만 남은 흉한 를르슈를 생각했다. 일그러뜨리고 싶을 정도로 흉측한 를르슈. 차라리 없어지는 게 좋을 지도 모를 그 를르슈를 생각하고 나면 스자쿠는 그의 목을 조르고 싶지 않아졌다.

 

세 번째 페어웰을 맞은 를르슈는 이제 더 이상 를르슈가 아니었다.

그는 말을 할 수 없었고, 움직이는 것조차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었다. 팔다리를 축 늘어뜨리고 침대 위에서 숨만 새액새액 내쉬는 를르슈를 보면서 스자쿠는 처음으로 안심할 수 있었다. 이로써 를르슈에게 나나리는 완벽하게 지워진 것 같았다. 를르슈의 기억이 어디까지 지워졌는지 이제 더 이상 확인할 방법도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스자쿠는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를르슈의 눈에 자신이 비치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스자쿠를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손과 발이 미세하게 떨리긴 했지만, 그것을 반항 같은 의지를 가진 행동으로 보기에는 어려웠다. 를르슈의 텅 비어있는 손 끝에 스자쿠는 자신의 손을 쥐어주었다.

를르슈는 아기처럼 그 손을 꽉 움켜쥐었다. 스자쿠는 자신의 손을 붙들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스자쿠는 그의 시야에 들어가긴 했지만, 무엇으로도 정의되지 못한 상태인 듯 싶었다. 를르슈는 스자쿠가 세상에서 유일한 것인양 그의 손을 붙잡은 채로 우우, 하고 작게 울음소리 같은 것을 내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넘겨 주었다. 하얗게 드러난 를르슈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키스를 받고도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렇겠지. 넌 이제 아무것도 모를 거야. 나나리도, 나도, 모두를 잊은 채로. 스자쿠는 를르슈의 귓가에 속삭였다.

 

를르슈, 이제 영원히 안녕.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