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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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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dulum 2

Re:play / DOZI 2025.01.15 11:48 read.16 /

기세 좋게 뛰쳐나온 기차의 복도는 추웠다. 정말 추웠다. 겉옷도 걸치지 않은 채로 무턱대고 나와버린 것이 후회가 될 정도였다. 매섭게 지나가는 설풍의 덜컹거리는 소음이며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깥풍경 같은 것에 줄리어스는 하얗게 숨을 토해냈다. 흩어지는 숨을 바라보던 줄리어스는, 두 눈으로 보는 세상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한쪽 눈으로만 보았던 세상이 사라졌음이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C.C.를 한 번 죽이고, 그녀가 살아나는 것을 한 번 보고, 그리고 느껴지지 않는 쿠루루기 스자쿠의 기척 같은 것에 줄리어스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의 전부였던 황제폐하의 시대는 이제 끝이 나고, 알 수 없는 역사의 혼돈 속에서 줄리어스 킹슬레이가 또 다시 살아난 이유에 대해서 곱씹고 또 곱씹었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폐적된 그 황자는 자신인 것 같았다.

제로. 사로 잡힌 테러리스트 또한 자신이 틀림없었다.

줄리어스 킹슬레이. 이 또한 자신이 분명했다.

 

줄리어스는 문득 복도에서 멈춰서서 기차의 어둑한 창문에 비치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차분한 검은 머리, 한쪽 눈을 가리는 안대 없이 빛나는 두 눈, 검은 옷을 뒤집어 쓰고 부랑자의 행태로 돌아다니는 자신을.

이걸 줄리어스 킹슬레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인가. 황제폐하의 군사 답지 않은 모습인데. 줄리어스는 황제 샤를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평소와 같이 자신을 짓누르던 무거운 두통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끔씩 타는 듯한 갈증 같은 것도 사그러들었다. 신체의 컨디션은 어느 때보다 좋았음에도, 기분은 알 수 없는 사실들에 대한 나열로 가라앉고 있었다.

 

‘C.C.라는 여자는 누구이며, 나는 왜 내가 아닌가?’

 

줄리어스는 스스로 내던진 질문이 쓸데 없이 철학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식당 칸까지 남은 마지막 문을 열고 나섰다. 으슬한 찬 바람이 불어오고, 줄리어스는 비어있어야 할 문앞에서 서있는 한 남자와 마주쳤다.

 

“아, 이런. 식당 칸은 지금 닫았대요.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코트를 여미고, 목도리를 꼼꼼하게 두르고 있는 남자는, 흐트러진 갈색 곱슬머리에, 반짝이는 초록색의 눈을 하고…… 마치 쿠루루기 스자쿠와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줄리어스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줄리어스를 힐끔 쳐다보았던 남자는 그를 보더니 아하하,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 웃음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것이었지만, 쿠루루기 스자쿠의 목소리와 똑같았다.

줄리어스는 그동안의 생각과 고민, 시뮬레이션 끝에 지금은 쿠루루기 스자쿠가 다시 살아있을 시대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줄리어스가 살아있는 이유는 그 죽지 않고 살아난 불가사의한 여자 C.C.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눈앞의 남자는… 쿠루루기 스자쿠일 리가 없을 텐데도, 줄리어스는 그를 보고서 얼어붙은 것마냥 굳어버렸다.

 

“배가 많이 고팠나봐요?”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는 그 남자의 목소리는 정말 쿠루루기와 닮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쿠루루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쿠루루기는 줄리어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줄리어스가 그의 시선에서 떨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줄리어스는 분하지만 자신이 쿠루루기 스자쿠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아니, 상관 없어. 배가 고파서 온 게 아니라 머리를 식히려고 나온 거니까.”

 

그러니까 비키라는 말이었다. 줄리어스의 말에 남자는 잠시 멈칫하며 줄리어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위아래로 줄리어스를 훑어보다가 이내 시선이 마주치자 바로 ‘미안, 미안’하며 사과했다. 정중하게 굴었던 존댓말은 어디로 가고 대뜸 짧아진 말투가 신경쓰였다. 마치 꼭 줄리어스를 알아보고 나서 바뀐 태도인 것 같아서.

 

“사실 나도 머리를 식히러 나왔어.”

 

덧붙여서 ‘에헤헤’ 웃는 실없는 웃음소리에 줄리어스는 더욱 기분이 상했다. 어느새 말을 놓아버리면서 경박하게 웃는 이 남자는 줄리어스의 기억 속에 있는 쿠루루기 스자쿠와 정 반대였다. 

그 녀석은 좀 더 보수적이다 싶을 정도로 꽉 막힌… 그런 고지식한 말투였는데. 날 언제까지나 킹슬레이 경이라고 부르고. 그리고 나에게 웃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아, 그래? 선객이었군.”

“뭐, 선객도 맞는 말이지만, 뜻하지 않은 곳에서 사람을 사귀는 것도 여행의 묘미니까.”

 

남자는 불이 꺼진 식당 칸의 문을 열어주며 줄리어스에게 손짓했다. 들어가라는 뜻이었다. 줄리어스는 들어가는 것 대신에 그를 한 번 쳐다보았다. 의심의 눈초리를 받은 남자는 익숙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자기소개가 먼저겠네. 나는 쿠루루기 스자쿠라고 해.”

 

그 말에 줄리어스는 세상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너는?”

“…….”

 

자신을 폐적된 황자의 이름으로 부르고, 제로라는 테러리스트였다고 말하며, 그러면서도 줄리어스 킹슬레이를 몰랐던 그 여자 C.C.에게 따지고 들고 싶었다. 지금 눈앞의 쿠루루기 스자쿠는 그럼 뭐냐고.

하지만 줄리어스는 그런 것을 묻기 위해 다시 C.C.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눈앞의 쿠루루기 스자쿠가 그 사이에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져버렸다. C.C.는 모르는 여자지만, 쿠루루기 스자쿠는 자신을 호위하던 사내였다. 익숙한 이쪽이 훨씬 더 의지가 될 것이라고 제멋대로의 결론을 내려버렸다.

그런 줄리어스는 식당 칸으로 걸어가며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줄리어스, 줄리어스 킹슬레이다.”

 

그럼 쿠루루기가 뭐라고 알아봐주지 않을까, 희미한 기대가 있었다. 줄리어스의 이름을 들은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뭔가 눈치채줄까, 알아봐줄까, 기대에 부푼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래, 줄리어스라고 불러도 될까?”

 

물론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겠다는 그 말에, 보기 좋게 산산조각 난 기대였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하니. 

줄리어스는 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 식당 칸의 좌석 적당한 곳에 걸터앉았다. 어둑한 테이블은 달빛만으로도 충분히 환하게 느껴졌다. 스자쿠도 줄리어스의 앞에 앉으면서 싱글거리며 웃었다. 

 

“그래서 줄리어스는 어디로 가는 중이야?”

“…몰라.”

“응?”

“그러는 너는 어디로 가는 중인데?”

 

줄리어스의 되묻는 말에 스자쿠는 턱을 괸 채로 웃으며 말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눈으로 웃는 것에 줄리어스는 순간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짧은 후회가 들었다. 이 스자쿠는 자신이 알고 있는 쿠루루기가 아닌데도, 대체 뭘 기대하면서….

스자쿠는 줄리어스를 바라보며 웃는 낯으로 다시 물었다.

 

“줄리어스, 누구랑 왔어? 혼자 온 건 아닌 거 같고.”

“왜 그렇게 생각하지?”

“보통 머리를 식힌다는 말은 혼자 있을 때 안 하거든.”

 

그렇게 유추하는 스자쿠는 꽤 영리했다. 줄리어스는 혼자 왔다는 거짓말을 하려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하지만 순순히 대답하는 것도 성미에 맞지 않았다.

 

“맞아, 혼자 오진 않았어. 마녀랑 함께 있지.”

“마녀?”

“그래. 마녀. 정말 이상한 여자야.”

 

줄리어스는 C.C.를 마녀 취급한 것에 은근한 통쾌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 순간도 찰나였다.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줄리어스는 여자친구랑 왔구나.”

“아니, 너는 상식적으로 여자친구를 마녀라고 부르는 편인가?!”

“아니긴 하지만… 꽤 독특한 애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스자쿠의 천연덕스러운 말투에 줄리어스는 기운이 빠질 것 같았다. 쿠루루기는 원래 이런 느낌이 아닌데. 대체 이 쿠루루기 스자쿠는 뭐란 말인가. 줄리어스의 쿠루루기는… 정말 아주 오래 전에 죽었고, 그렇다면 이 쿠루루기 스자쿠는 무엇일까.

 

“그래서 마녀랑 함께 하는 중인데, 무슨 일이 있었길래 머리를 식히려고 하는 거야?”

 

줄리어스를 바라보는 눈빛은 진지했다. 무슨 말이든 다 들어줄 것 같았다. 이상하지, 나는 이런 쿠루루기를 본 적이 없는데. 왜 이런 눈빛이 낯설지 않고 오히려 더 의지하고 싶어지는지 영문 모를 일이었다. 줄리어스는 테이블 위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다가 입을 열었다.

 

“뭔가… 이상하거든, 지금.”

“그래?”

“내가 믿어왔던 것들이 전부 다 사라지고, 없어졌다고 하는데.”

“응.”

“그럼 내게 남은 건 이제 아무것도 없는 건가, 싶어서.”

 

줄리어스는 이 가짜 쿠루루기 스자쿠의 앞에서 이런 이야기까지 하고 있는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속으로 몇번이고 정리한 결론들과 사실들을 입밖으로 정의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압박감을 주었다.

줄리어스의 전부였던 황제폐하는 이제 없고 죽었으며, 이름 모를 여자만 남아, 줄리어스 곁에서 그녀만이 진실이라고 하는 공포가 무섭게 느껴졌다.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울렁거리는 속을 겨우 다스리며 줄리어스는 눈물을 떨어뜨렸다. 

눈물? 그래, 눈물. 나는 울 정도로 나약해졌다. 천하의 줄리어스 킹슬레이가, 무섭다고.

가득찬 눈물이 시야를 가리는 것에 줄리어스는 허탈하게 웃었다. 스자쿠는 그런 줄리어스에게 손수건을 건네면서 말했다.

 

“줄리어스, 다음 역에서 내릴래?”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보통 울지 말라던가,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거 아닌가. 상식이 결여된 건가, 이 쿠루루기 스자쿠는. 현실감이 없어도 너무 없다. 줄리어스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다음 역에서 내릴 거야.”

“…그래서?”

“그래서 줄리어스도 내릴 거냐고 묻고 있어.”

“왜?”

“싫으면 말고.”

 

이유도 설명하지 않는 주제에 스자쿠는 안쓰럽다는 듯이 목소리를 다정하게 낮추며 말했다. 

 

“줄리어스는 의외로 마녀랑 여행하는 용사 타입이구나.”

 

정말 위로가 안되는 말이었다. 이 쿠루루기 스자쿠는 정말 겉 껍질만 쿠루루기 일 뿐, 알맹이는 눈치 없는 성격에 빈말도 못하는 성의 없는 자식이다. 

 

“나는 용사가 아니다, 나는 줄리어스 킹슬레이라고!”

 

줄리어스가 우는 목소리 사이로 발악하는 것에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완전히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모습에 줄리어스는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그치고 말았다.

 

“뭔가 더 이야기하고 싶긴 하지만, 나는 곧 다음 역에서 내리니까.”

“…갑자기?”

“응, 갑자기 정했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말한 주제에, 갑자기 행선지를 정해버리다니. 스자쿠의 즉흥적인 결정은 거의 배신처럼 느껴졌다.

 

“줄리어스를 만나서 즐거웠어.”

 

멋대로 끝내버리는 대화까지. 이 스자쿠는 정말 제멋대로다. 줄리어스는 자신이 이렇게 휘말리는 상대가 있었는지 생각했고, 그리고 그 상대가 스자쿠라는 것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손수건은 가져도 돼, 라고 말하는 스자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줄리어스도 그를 따라 어두웠던 식당 칸을 벗어났다.

덜컹거리는 기차의 복도를, 스자쿠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는 코트를 단단히 여미면서 줄리어스를 돌아보았다.

 

“줄리어스는 남은 여행 즐겁게 해. 그리고… 음, 방금 전에 울었던 거 말이야.”

 

스자쿠는 줄리어스에게 자신이 하고 있던 목도리를 둘러주면서 말했다.

 

“남아있는 게 없진 않을 거야. 나랑 이렇게 헤어져도 목도리는 남잖아? 아, 손수건도.”

“……도로 가져가.”

“괜찮아. 줄리어스가 가져. 계속 기차를 타면 더 추워질 거야. 이 기차가 도착하는 도시는 엄청 춥거든.”

 

엄-청 추워. 진짜야. 스자쿠는 웃으면서 말했다. 줄리어스는 역에 서기 위해서 느려지는 기차의 속도를 느끼면서 스자쿠에게 물었다.

 

“다른 짐은 없어?”

 

이번 역에서 내린다는 스자쿠의 두 손은 비어있는 채였다. 스자쿠는 헤헤, 웃으면서 말했다.

 

“응. 이게 전부야.”

 

스자쿠는 줄리어스에게 그럼 안녕, 이라고 말했다. 이대로 안녕인 것이다.

그가 진짜 쿠루루기 스자쿠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아니, 어쩌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황당무계한 꿈이 다 있을까. 추위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꿈 같은 건 듣도 보도 못한 것인데. 현실감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를 꿈 속에서 줄리어스는 쿠루루기 스자쿠와 이별하고 있었다.

그렇게 줄리어스는 플랫폼에 도착한 기차에서 천천히 내리는 스자쿠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서 계단으로 걸어내려갔다. 삐익, 하고 기차의 출발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신호삼아, 줄리어스는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공지 <부활의 를르슈> 스포일러 있는 글은 * 2019.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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