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뒤따라온 줄리어스를 보고서 스자쿠는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그럴 줄 알았다면서 줄리어스를 보면서 웃기만 할 뿐이었다. 스자쿠는 줄리어스에게 손을 내밀었고, 줄리어스는 그 손을 잡으면서 걸었다. 차가운 손끝에 닿는 스자쿠의 따뜻한 체온은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어디로 갈 거야?”
“글쎄,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아무데나 가는 건 좀 싫지?”
스자쿠는 자신이 입고 있던 코트를 줄리어스에게 입혀주면서 말했다. 이런 건 여자한테나 해라. 줄리어스의 말에 스자쿠는 해주고 싶은 사람 마음이라고 대꾸했다. 그리고 나는 가디건도 입고 있으니까 괜찮아. 스자쿠의 코트 덕분에 따뜻해지는 몸으로 추위를 이겨내고 나면, 줄리어스에게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생겨났다.
C.C. 그 여자는 혼자서 기차를 타고 있을까.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내가 내린 것을 봤겠지? 나를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을 텐데.
줄리어스의 기분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런 줄리어스에게 스자쿠는 하얗게 번지는 입김 사이로 웃으면서 다음 행선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우선 호텔에 가서 쉴까? 저쪽에 쇼핑몰도 있는 모양이야.”
화려한 조명이 빛나고 있는 건물들이 보이는 곳을 가리키면서 스자쿠가 말했다. 줄리어스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문득 자신의 자금사정이 떠올랐다. 스자쿠는 어떨진 몰라도 줄리어스는 땡전 한 푼 없는 신세였다.
“근데 나는 돈이 없어.”
“괜찮아, 내가 많으니까.”
스자쿠는 현금으로 두둑한 지갑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이 정도면 조금 사치를 부려도 되겠지? 스자쿠의 말에 줄리어스는 그래, 하고 대답했다.
사치를 부려서 그들은 고급 호텔에서 제일 작은 방을 빌렸다. 얼마나 묵으실 건가요? 그 말에 줄리어스가 대답하지 못하자, 스자쿠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사흘 묵을 겁니다. 사흘이라는 말은 준비된 것처럼 나와서, 스자쿠가 호텔 방 열쇠를 받고 앞장 서서 걷고 있을 때, 줄리어스는 물었다.
“여기에 사흘만 있을 거야?”
“응? 아아, 호텔이 마음에 들면 더 있어도 돼.”
“딱히 그런 건 아니다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문을 열면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 하나가 가득 들어찬 좁은 구조가 보였다. 깔끔하지만 좁고 작은 호텔. 이것이 스자쿠와 줄리어스가 부린 사치. 스자쿠는 작은 방을 보고 침대에 겨우 걸터앉으며 웃었다.
“더 큰 방을 달라고 할 걸 그랬어.”
“자기만 할 거면 문제 없어.”
“그건 맞는 말이야.”
짐을 놓을 것도 없는 두 사람은 호텔에 붙어 있는 쇼핑몰을 구경하러 갔다. 줄리어스는 유행이 지난 코트를 반값에 샀다. 다른 것도 살까 했지만 줄리어스가 더 이상의 소비는 낭비라는 말에 스자쿠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목도리를 내려두었다. 앞으로의 여행에서 돈은 더 많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줄리어스는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행의 초장인 지금 돈을 함부로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줄리어스가 그렇게 말하자 스자쿠는 미소를 지었다.
쇼핑에서 돌아오고 나면 줄리어스가 먼저 씻고, 스자쿠가 다음으로 씻었다. 갈아입을 옷을 사지 않았던 탓에 가운을 입고서 자는 수밖에 없었다. 자꾸 벌어지는 앞을 꽉 여미면서 줄리어스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같은 침대의 옆에 누운 스자쿠는 그런 줄리어스를 보면서 물었다.
“내일은 뭐하고 싶어?”
“당연히 쇼핑이지. 옷을 갈아입고 싶어. 속옷도 몇벌 있는 편이 좋고. 짐 가방 같은 것도 있으면 좋겠어.”
“하아, 짐 만드는 건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그냥 그때그때 사는 건 어때?”
“…너 부자야?”
“집에 돈이 없는 편은 아니지.”
줄리어스는 스자쿠가 하는 말에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더 말해보라고 눈짓하면, 스자쿠는 천장을 바라보며 누웠다.
“나에 대해서 알고 싶어?”
“그래.”
“……뭐, 어디서부터 설명할까? 가족사항부터? 부모님, 형, 여동생, 그 외에도 사촌들도 제법 있고. 다들 사이는 좋아. 돈 많은 집에서 사이 좋기는 쉽지 않은데 말이야.”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형이 있고 여동생이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줄리어스가 아는 스자쿠는 명예 브리타니아인으로서 출세한 나이트 오브 세븐에 불과했으며, 그 외의 정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원래 쿠루루기는 어떤 남자였을까. 아마 지금 눈앞의 스자쿠와는 다른 인물이겠지.
“줄리어스는? 어떻게 지냈어?”
“……딱히.”
“딱히?”
“부모나 형제가 있진 않아. 그러니까 딱히 할 말도 없어.”
“그럼 친구는?”
친구라는 말에 줄리어스는 문득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쿠루루기는 친구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곁에 있는 황제폐하의 기사였을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관계에 대해서, 줄리어스는 정의할 것이 없는 자신에 대해서 허무함을 느꼈다.
눈을 뜨고 나니 황제폐하도, 나이트 오브 세븐도, 브리타니아도 없어진 세계가 되었고, 죽지 않는 마녀가 망령처럼 줄리어스의 곁을 떠도는…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기차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그리고 존재할 수 없는 쿠루루기 스자쿠와 만나게 된 것은, 스스로도 잘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의 이끌림 때문이었다.
“친구는 없어. 나에겐 오로지….”
“오로지?”
황제폐하, 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다가 스자쿠의 맑은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을 보면서 줄리어스는 눈을 감았다. 두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자신은 어딘가 낯설었다. 이제까지 동요한 적 없는 자신의 신념이 뿌리가 흔들리다 못해 뽑힌 거나 다름없었다.
쿠루루기 스자쿠, 그 눈에 비치는 남자는 줄리어스 킹슬레이가 맞는 걸까. C.C.의 말에 따르면 나는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이기도 하고, 제로이기도 하면서.
줄리어스가 눈을 감아버리는 것에 스자쿠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스자쿠의 따뜻한 손이 뺨에 닿는 것에 줄리어스는 이내 눈을 뜨고,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뭐하는 짓이야?”
그의 손길은 지나치게 다정했다. 마치 무언가의 위로를 주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줄리어스는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울 것 같아서.”
“울 것 같다고?”
“방금 전에도 울었잖아.”
“…그럼 울게 내버려둬.”
“우는 아이를 내버려둘 순 없어.”
“누가 애 취급 해달래?”
줄리어스는 스자쿠의 손을 밀어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스자쿠는 손을 거두는 것 대신에 머리카락을 귀뒤로 넘겨주었다. 그 손길이 미울 정도로 또 상냥했다. 그 얼마 안되는 체온으로 줄리어스를 위로하려는 것 같아서, 그 위로가 연민과 동정이라면 굴욕이라고 생각해야만 하는데도 또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런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은 아무래도, 줄리어스 자신이 몹시 흔들리고 있기 빼문일 것이다. 중요한 모든 부품들을 잃어버린 기계가 된 기분이었다. 쓸모를 찾을 수 없게 된 브리타니아의 군사는 자꾸 남겨진 무언가들의 흔적들에 의해서 흔들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대로 쓰러질 수도 없고, 완전히 박살날 수도 없었다. 이 어중간한 느낌 속에서 쿠루루기 스자쿠가 주는 체온은 줄리어스를 애매하게 만들었다.
“아직도 애 취급하는 것처럼 느껴져?”
“…….”
“줄리어스를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그럼.”
“응.”
“왜 이렇게 만지는 거야?”
물어보는 스스로의 목소리가 완전히 길 잃은 아이의 것과 똑같아서, 줄리어스는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이 쿠루루기 스자쿠 앞에서는 그래도 되지 않을까, 용기가 생겼다. 어차피 나는 모든 것을 다 잃은 상태이다. 더 잃어도 상관 없다. 원래 아무것도 없었다고 증명 당해도.
줄리어스는 허세를 부리듯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쿠루루기 스자쿠가 도망칠 수 없게, 줄리어스는 말을 덧붙였다.
“오늘 처음 봤으면서, 왜 이렇게 잘해줘?”
줄리어스의 ‘잘해준다’는 말에 스자쿠는 아하하, 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스자쿠가 웃는 소리에 줄리어스는 물밑으로 가라앉혔던 부끄러움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
“내가 진짜 잘해줄 생각이었다면 줄리어스랑 이렇게 같이 누워있지도 않았을걸.”
“뭐?”
“줄리어스는 어떨진 모르겠지만, 나는 위로 받고 싶어. 그래서 너를 위로하고 싶기도 해.”
“…….”
“네 눈에는 어때 보일지는 몰라도, 사실 난 지금 엄청나게 지쳐있거든.”
스자쿠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것은 꼭 멀어지려는 움직임 같아서, 줄리어스는 그의 가운을 붙잡았다. 갑자기 붙잡힌 옷자락에 스자쿠가 미묘한 표정으로 줄리어스를 바라보았다.
“내가 하는 말, 무슨 말인지 몰라?”
무슨 말인지, 사실 알 수가 없다. 줄리어스에게 위로 받고 싶고, 줄리어스를 위로하고 싶고. 그런 감정에 대해서 줄리어스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줄리어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앞으로의 삶에는 황제폐하도, 나이트 오브 세븐도, 브리타니아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 을 위안으로 삼아야할까. 줄리어스는 그 위안으로 쿠루루기 스자쿠의 체온을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솔직히 모르겠어. 난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으니까.”
“그럼 알려줄게. 남에게 위로 받고 싶어하는 남자는, 속셈이 있는 거야. 줄리어스.”
“…….”
“어떤 방법으로 위로 받고 싶은지도 알려줘야 할까?”
스자쿠는 일부러 짓궃은 미소를 지으면서 줄리어스의 손을 떼어냈다. 나는 옷 갈아입고 밖에서 자다가 올게, 라고 말하는 스자쿠에게 줄리어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알려주면 되잖아!”
그가 지금 멀어지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속셈, 위로, 방법. 그런 모든 단어들을 유추했을 때 쿠루루기 스자쿠가 자신에게 섹스를 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섹스 정도로 위로가 된다면 얼마든지 이 몸을 내어주마. 줄리어스는 가운의 끈을 풀었다. 그런 줄리어스를 보고 있던 스자쿠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줄리어스를 원하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 불확실함 속에서 옷을 벗는 도박은 성공하는 듯싶었다.
알몸이 된 줄리어스를 보고서 스자쿠는 천천히 그의 침대 곁으로 다시 다가왔다. 줄리어스는 가까워지는 스자쿠의 숨결을 느끼면서, 그와 입술을 맞대게 되는 거리를 세면서 눈을 천천히 감았다. 자신의 입술 끝에 닿는 스자쿠의 체온에 긴장하며 그의 몸을 붙잡게 되었다. 입술끼리 닿고, 부벼지는 살갗의 따뜻함에 줄리어스는 또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사람은 이렇게 나약해지는구나. 이런 식으로 위로를 받고, 위로를 원하면서, 끌어안는 체온만으로도 쉽게 약해지는구나.
“울지 마, 줄리어스.”
“울면 매너 위반인가?”
“딱히 그런 건 아니긴 한데….”
스자쿠는 줄리어스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면서 더운 숨을 토해냈다. 입술 끝에서 느껴지는 촉촉함과, 그가 흔적을 남기면서 닿는 뜨거운 느낌에 줄리어스는 작게 신음했다. 스자쿠가 등줄기를 훑으면서 문지르는 느낌은 줄리어스의 긴장을 팽팽하게 당기게 했다.
모든 감각이 낯설고 부자연스러웠다. 이런 것은 처음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처음인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줄리어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줄어든 줄리어스의 신음 소리에 스자쿠는 그가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인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른 건 몰라도 소리 참는 건 매너 위반이야.”
“섹스에 그런 룰은 없어.”
“우리가 이제 섹스하는 건 아는구나.”
스자쿠는 기쁜건지 슬픈건지 모를 목소리로 말했다. 줄리어스는 자신에게 먼저 위로를 갈구해놓은 주제에,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를 내는 스자쿠가 싫었다. 확실하게 하란 말이야,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겨우 억누르며, 줄리어스는 헐떡거리는 숨 사이로 말을 걸었다.
“너 말이야. 원래도 이렇게… 아무한테나 이래?”
“…응?”
“위로해달라고 하면서, 섹스하냐고.”
줄리어스의 쇄골에 얼굴을 파묻은 스자쿠는 쿡쿡거리면서 웃었다. 어디서 웃긴 포인트인지는 모르겠지만, 줄리어스는 당황하지 않은척 하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줄리어스는 내가 아무한테나 이러는 거 같아?”
“…….”
“그렇다면 조금 속상한데.”
속상할 건 네가 아니라 나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줄리어스는 자신의 위로 올라타기 시작하는 스자쿠를 보며, 또 멀어지는 침대 위의 천장이 낯설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풍경으로 보이는 천장은 처음이다. 남의 앞에서 피부를 다 드러내며, 알 수 없는 신음을 내는 것도 처음이다.
나는 뭐든지 다 처음인데, 너는 익숙한 듯이 섹스를 하는 게 누가 속상할 일인지.
줄리어스는 자신의 가슴팍에 매달리면서 유두를 천천히 핥아올리는 스자쿠의 애무에 조금씩 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높고 앓는 듯한 소리여서 낯설게 느껴졌다.
머리가 냉정해지는 것 같으면서도 몸은 뜨거워지고 있었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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