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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dulum 5 (完)

Re:play / DOZI 2025.01.15 11:57 read.17 /

C.C.의 눈이 틀리지 않았더라면, 역의 출구에 서있는 남자는 틀림없이 쿠루루기 스자쿠였다. 그는 누군가를 찾고 있는 모양인지,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C.C.를 발견하고서는 손을 크게 흔들었다. C.C.는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매번 다시 태어나는 쿠루루기 스자쿠는 C.C.를 알 수가 없었으니까. 이번에는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스자쿠는 C.C.를 알아볼 수 없는 게 맞았다. 지금까지의 가설로는 모두 그래왔다.

 

“C.C.!”

 

하지만 아니었다. 자신의 이름을 우렁차게 부르는 스자쿠의 목소리에 C.C.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성큼성큼 C.C.의 앞까지 다가온 스자쿠는 환하게 웃으면서 그녀를 환영했다.

 

“C.C., 오랜만이야.”

“……너, 나를 알아?”

“아하하,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내가 누군지 아는구나. 짐은 그게 전부야?”

“…….”

“여긴 추우니까 어디 들어가서 따뜻한 차라도 한 잔 하는 게 어떨까? 할 이야기가 많잖아, 우리.”

 

C.C.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역사 안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고소한 커피 향이 나는 카페에서, 스자쿠는 카페라떼를, C.C.는 밀크티를 시켰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료를 앞에 두고서, 스자쿠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평범한 안부인사로 채워질 시간이 아니었다. 궁금한 것은 산더미 같았고, C.C.는 스자쿠에게 모든 것을 퍼붓고 싶었지만, 흥분하는 것 대신에 밀크티를 마시면서 속을 다스렸다. 그녀도 허투루 긴 세월을 살면서 제멋대로 군 것은 아니었다.

 

“잘 지냈으면 너를 만날 일은 없지.”

“하지만 나를 만났으니까 이제 끝난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아?”

“뭐가 끝이 났다는 거야?”

“…사실 C.C.도 알고 있잖아. 그래서 를르슈를 찾으러 온 거 아니야?”

 

스자쿠가 어디까지 앞서 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가늠할 수 없었다. C.C.는 한 모금의 밀크티를 삼키고 나서 물었다.

 

“스자쿠, 너는 어떻게 다 기억하고 있는 거야? 코드도, 기어스도 없으면서.”

 

그 말에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C.C.는 여유롭게 수긍하는 그 모습에서 초조함을 느꼈다.

 

“이제까지는 계속 기억이 없었으면서… 왜 이번에는.”

“이번에는 정말 끝이니까, 라는 답변으로 괜찮을까?”

“…하나도 답이 안 되잖아!”

 

결국 참다 못한 C.C.가 윽박을 지르자, 스자쿠는 그녀에게 진정하라고 말하면서 입을 열었다.

 

“자세한 건 나도 몰라. 이제까지의 나는 기억이 없었는데, 왜 이번에는 기억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면서도 반대로 를르슈가 아닌 줄리어스가 여기에 있는지도, 사실은 모르겠어.”

“…줄리어스? 그래, 그 남자는 대체 뭐야?”

“너무 옛날의 이야기인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를르슈와 똑같은 또 다른 를르슈라고 해야 할까. 기어스의 힘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사람이야.”

“샤를의 기어스?”

“맞아.”

“샤를의 기어스가 이제 와서 작동하는 것도 말이 안 돼.”

 

C.C.는 중얼거렸다. 샤를이 죽은지 벌써 얼마의 세월이 흘렀는가. 기어스의 조각을 찾아 떠난 여행은 오래도록 길었다. 그 긴 세월동안 죽은 샤를의 기어스가 다시 작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제까지의 C의 세계의 룰에서는 그래왔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기억을 갖고 다시 태어난 거라던가, 아니면… 네 상처가 이제 아물지 않는 걸 보면 C의 세계는 달라진 거야.”

“L.L.… 아니 를르슈 때문인가?”

 

C.C.의 말에 스자쿠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L.L.라고 부르는구나.”

“그 녀석이 마음대로 붙인 이름이야. 너는 를르슈라고 부르면 돼.”

“글쎄, 난 잘 모르겠어. 를르슈가 L.L.로써 살아온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L.L.는… 한 번도 L.L.로 살아오지 않았어. 그 녀석은 계속 를르슈였어. 이건, 내가 멋대로 L.L.라고 부를 뿐이니까.”

 

스자쿠는 울먹이듯 말하는 C.C.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C.C.는 자신이 부려온 억지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었다.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서, C.C.는 필사적으로 아무렇지도 않은척하면서 스자쿠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줄리어스는 어디 있어? 그 녀석이 나를 몰라도, 나는 인사하고 가고 싶어.”

웃는 연습도 필사적으로 했으니까. C.C.는 흔들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말했다.

 

* * *

 

줄리어스가 눈을 떴을 때에는 혼자였다. 격렬한 섹스 끝에 정신을 잃었을 때에는 스자쿠의 품에 있었는데, 눈을 뜨고 나니 그가 없어진 것이 몹시 쓸쓸했다. 줄리어스는 욱씬거리는 몸을 일으켜서 스자쿠의 빈 자리를 확인할 수 있는 메모를 발견했다.

 

 잠깐 나갔다 올게. 기다려줘.

 

 깔끔한 글씨체로 휘갈겨진 그 메모를 본 줄리어스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소리 내어 한참을 웃고 나면 어제의 쿠루루기 스자쿠가 섹스의 매너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이 떠올랐다. 누가 누구에게 매너에 대해서 운운하는 것인지, 섹스한 뒤에 사람을 홀로 내버려두는 것이 더 형편 없는 쪽 아닌가.

한편으로는 섹스 후의 혼자 남은 외로움을 계산한다는 시점에서 자신이 스자쿠에 대해서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쿠루루기 스자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열망은 상당했다. 위로 받고 싶고, 위로 하고 싶을 정도로, 연민과 동정을 넘어서는 감정으로, 줄리어스는 스자쿠를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제의 섹스로 그를 완전히 가질 수 있었던 것일까, 생각하면 줄리어스는 입맛이 썼다. 줄리어스 킹슬레이를 몸으로 묶어둘 수 없는 것처럼, 쿠루루기 스자쿠 또한 그럴 것이라는 것이 내려진 결론이었다. 줄리어스는 뒤집어 쓰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울한 생각은 물로 씻어내야만 했다. 

욕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뻐근했지만 영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미 어제 스자쿠가 한 차례 씻겨주긴 했지만, 따뜻한 물줄기가 몸에 닿자 노곤하게 풀리는 느낌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젯밤 내내 깨물리고 물고 빠느라 남겨진 흔적들에 비눗물이 닿고 흩어질 때마다 따끔거렸다. 샤워 콕을 돌린 줄리어스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 피어오르는 수증기 사이로 비쳐진 자신은 여전히 낯설었다. 두 눈으로 스스로를 응시하는 자신만큼 낯선 것이 없었다.

줄리어스의 안에서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것들이 남아있었지만, 그것을 있는 힘껏 모른척 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미룰 수 있는 한, 그것으로부터 도망쳐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저 그러고 싶다. 아무것도 없는 나의 세계에서 유일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도 않고 찾고 싶지도 않고… 또 그것을 다시 잃었을 때의 상실감을 느끼고 싶지 않으니까.

줄리어스는 겁쟁이가 된 자신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물기를 닦아낸 줄리어스는 어제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는 중이었다. 느긋한 손짓으로 셔츠의 단추를 잠그고 있을 때였다.

 

“줄리어스, 벌써 일어났어?”

 

잠겨 있던 호텔 문이 열리면서 스자쿠가 돌아왔다. 그는 메모 속에서는 ‘잠깐 나갔다 올게’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줄리어스가 샤워를 하고 한참이나 있다가 돌아왔다. 거짓말쟁이가 따로없군. 줄리어스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스로도 왜 혼자 내버려뒀냐는 식으로 삐져있는 아이처럼 구는 것이 유치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스자쿠는 그런 줄리어스를 비웃지 않았다.

 

“혼자 있게 해서 미안. 누구를 좀 만나고 오느라 늦었어.”

“그래? 난 괜찮았어.”

 

줄리어스의 부루퉁한 목소리에 스자쿠는 웃으면서 근처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의 낮아진 시선이 저를 올려다보는 것에 줄리어스는 괜히 눈을 피하면서 느릿하게 단추를 다 잠갔다.

 

“너를 만나러 온 사람이 있어.”

“나를 만나러?”

“응.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거든.”

“…….”

 

줄리어스는 그 여자를 떠올렸다. 기차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C.C.가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각에 잠긴 줄리어스가 대답을 망설이는 것에 스자쿠는 그의 차게 식은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누가 왔는지 아는구나, 줄리어스.”

“…너는 그 여자를 어떻게 알아?”

“꽤 지독한 인연이야.”

“악연인가?”

“난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좋은 인연은 아니지.”

 

스자쿠의 말에 줄리어스는 그 말을 곱씹었다. 인연이라는 말로 C.C.와 저를 묶기에는 서로의 연결고리는 희미했다. 그럼에도 저를 찾아왔다는 C.C.와 그녀를 계속 신경쓰고 있는 자신은 무언가가 존재하는 듯 했다. 줄리어스의 번민을 아는 것인지 스자쿠는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C.C.는 인사를 하러 온 것 뿐이야.”

 

그녀의 이름을 꺼내면서, 스자쿠는 다 아는 것처럼 말했다. 어떤 인사인지 알 수 없는 것을 불안해하는 줄리어스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면서, 스자쿠는 다시 한 번 괜찮다고 말했다. 줄리어스를 종용하는 듯, 한편으로는 정말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안아주듯 말하는 스자쿠에게 줄리어스는 알겠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구깃구깃한 셔츠를 입은 줄리어스와 낡은 원피스 차림의 C.C.는 이 고급 호텔의 카페테리아에서 제일 어울리지 않았다. 

 

“늦어.”

 

줄리어스가 자리에 앉자마자 C.C.는 내뱉듯이 말했다. 여전히 제멋대로인 여자다. 줄리어스도 지지 않고 시큰둥한 말투로 말했다.

 

“네가 멋대로 날 기다린 거야. 이건 또 뭐야? 뭘 시켜 놓은 거야?”

“꿀을 듬뿍 넣은 우유야. 너 이거 좋아하잖아.”

 

줄리어스는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 C.C.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꿀을 넣은 우유는 굳이 호오를 따지자면 좋아하는 쪽에 가까웠지만, 이 여자가 줄리어스를 챙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태도가 별로였다. 

그런 그의 불편한 심기를 알고 있기라도 한듯이, C.C.는 더 이상의 대꾸 없이 자신의 앞에 놓인 오렌지주스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차라리 신경을 긁어대는 것이 속이 편할 정도로 숨막히는 정적이었다. 줄리어스는 자기 몫으로 놓인 꿀을 넣은 우유를 마셨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리고 정말 줄리어스의 입맛에 맞춘듯한 달콤함이었다.

 

“맛있어?”

 

줄리어스가 한 모금 마시는 것에 C.C.가 물었다. 줄리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내려놓았다. 흡족스러운 표정으로 C.C.가 웃었다.

 

“맛있다니까 다행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롱이 아닌 순수한 다정함으로 가득했다. 줄리어스의 보답도 바라지 않는 듯한 자애로움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소름이 끼치다고 하기보다는, 무언가 다른 것이 느껴졌다. 줄리어스는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네게 인사를 하러 왔어. 그동안 고마웠다고 말은 해야 할 거 같아서.”

 

C.C.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다정한 목소리로 하는 말들은 꼭 준비된 연극 속의 대사 같을 정도로 매끄럽게 흘러갔다.

 

“네가 누구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아. 도망쳤다고 해도 상관 없어. 줄리어스든, 를르슈든, L.L.든, 뭐든 좋아. 덕분에 행복했고 즐거웠어. 너를 만나서 다행이야.”

 

눈물이 금방이라도 흐를 것 같은 눈으로 C.C.는 줄리어스를 바라보았다. 눈물로 일렁이는 금빛의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것에 줄리어스는 눈을 뗄 수가 없 었다.

 

“이제까지… 마지막까지 함께 해줘서 고마워.”

 

그녀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면서도 끝까지 울지 않았다. 그저 입꼬리를 끌어당겨 앳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있는 힘껏 웃는 그녀의 모습에 줄리어스는 할 말을 잃고서 그저 그녀를 볼 뿐이었다.

C.C.는 원피스 자락을 털면서 일어났다. 이제 할 말은 전했으니까 가볼게. C.C.의 말에 줄리어스는 급하게 뒤따라 일어났다.

 

“이제 어디로 가는데?”

“그건 너에게도, 나에게도 이제 중요하지 않아.”

“…내가 쿠루루기 스자쿠랑 같이 있어서 그런 거야?”

“하하, 네가 쿠루루기 스자쿠를 골랐다고 해서 이런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C.C.는 정말 우습다는 것처럼, 평소의 표정처럼 얼굴을 바꾸고선 말했다.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떠보듯 묻는 C.C.의 모습에 줄리어스는 반문했다.

 

“그거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야?”

“네가 쿠루루기 스자쿠를 고르는 거에는 이미 넌더리가 났어. 그런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이제 와서 상처 받을 것도 없어.”

“예전부터?”

“줄리어스.”

 

줄리어스를 나직한 목소리로 부른 C.C.는 이내 손을 내밀었다. 오른손만 내밀고 있는 그녀는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줄리어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자, C.C.는 내민 손을 한 번 흔들었다.

 

“마지막으로 악수 정도는 해줘도 되잖아?”

“그러니까 너는 왜….”

“손 내밀어, 어서.”

 

줄리어스를 닦달하듯 하는 말에 결국 어쩔 수 없이 줄리어스도 오른손을 내밀었다. C.C.는 줄리어스의 손을 잡아왔다. 그녀의 손은 거칠었다. 작은 손에서는 이제껏 불편한 생활을 해온 것에 대한 세월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따뜻했다. C.C.는 줄리어스의 손을 붙잡고서 위아래로 천천히 흔들었다.

 

“잘 지내.”

 

그녀는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더 이상 전할 말은 없다는 것처럼 C.C.는 산뜻하게 웃어보였다. 이제 미련도, 남겨놓은 마음도 없어. C.C.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건 스스로에게도 하는 말과 같았다.

눈앞의 줄리어스는 안녕을 고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이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상황이 를르슈다운 가장 이상적인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L.L.가 아닌 를르슈다운, 오만한 어린애의 겁쟁이다운 면이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나는 그런 너를 사랑한 거겠지. C.C.는 사랑했던 를르슈를 떠올렸다. 그리고 사랑했던 그녀에 대해서도, 또 자신을 사랑해준 모두에 대해서 생각했다. 생각할수록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C.C.는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오면 끝이 난다는 생각에 막연히 기쁠 것이라고 여겨왔다. 그렇지만 이제 영원한 안녕을 고해야 할 를르슈를 앞에 두고 있으니 불안함이 앞섰다. 너는 어떻게 되는 걸까, 를르슈. 도망치고 도망쳐서, 네가 원하는 곳에 닿을 수 있을까. 

나까지 너를 두고 가는데.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전하기에는 C.C.의 시간은 이제 영원하지 않았다. C.C.는 줄리어스를 등지고서 호텔 카페테리아 밖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줄리어스는 뒤따라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그는 안녕을 말한 C.C.를 쫓아오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선택인 것이다.

쿠루루기 스자쿠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났다. 그는 두 손 가득 무언가의 짐을 들고서 C.C.를 알아보고는 금방 그녀의 앞으로 달려왔다.

 

“이야기는 잘했어?”

“잘 모르겠어.”

 

C.C.는 자신의 입밖으로 튀어나가는 그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을 한 거지? 난 제대로 전했는데. 모든 것에 안녕을 말하고 왔는데, 뭘 모르겠다는 거지?

스스로에게 놀라는 C.C.의 모습을 보고서 스자쿠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C.C.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에 대해서 묻지는 않았다.

 

“원래 이야기는 해도 해도 아쉬운 법이야. 그래서 줄리어스는?”

“호텔 안에 있어.”

“너 혼자 나온 거야?”

“어차피 나 혼자 갈 거였어.”

“나한테는 인사 안 할 생각이었어?”

 

너무하네, 하고 스자쿠가 말했다. C.C.는 당찬 미소를 지으면서 스자쿠에게 되물었다.

 

“우리가 인사가 필요한 사이인가?”

“새삼스럽긴 하지만, 모처럼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도 없는 건 섭섭하잖아.”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다니, 영광이야.”

 

스자쿠는 C.C.의 비꼬는 말에도 굴하지 않았다. 스자쿠는 진심으로 C.C.가 혼자 떠나는 것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쿠루루기 스자쿠가 이렇게까지 착해빠진 녀석이었던가? C.C.는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낯선 기분이었다.

스자쿠는 C.C.가 혼자 훌쩍 떠나버릴 것 같은 것이 영 불안한지 그녀에게 자신이 들고 있던 짐을 두 손 가득 묵직하게 쥐어주었다. 이거, 들고 가면 경찰 부를 거야. C.C.의 눈을 똑바로 보고서 말하는 스자쿠는 단호해보였다. 평소라면 경찰을 부르던지 말던지 자신의 길을 갔을 C.C.였지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그저 그 무거운 짐들을 들고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죽음, 끝. 그런 것들이 C.C.를 그녀답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사이에 스자쿠는 재빠르게 호텔로 들어갔고, 어째서인지 울고 있는 줄리어스를 데리고 나왔다. 스자쿠의 손에 갑자기 붙들려 나온 줄리어스는 C.C.를 보자마자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줄리어스는 C.C.에게 아직 울음에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간 거 아니었어?”

“보다시피, 누구 때문에 못 가고 있어서.”

 

C.C.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스자쿠를 가리키며 말했다. 줄리어스가 그렇구나, 라고 말하는 것에 C.C.는 줄리어스에게 왜 울었냐고 묻지 않았다. 이제 그가 울고 있어도 달래줄 사람은 자신이 아니니까. 앞으로 혼자 있을 그의 곁에는 스자쿠가 있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결론에 속이 시원하면서도 이상한 기분이었다. C.C.는 자신이 이제껏 무엇을 바라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스자쿠는 C.C.에게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C.C.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기차역으로 갈 거야. 스자쿠는 C.C.가 가는 기차역의 종착지를 되묻지 않았다. 그저 ‘그래’라고 말하면서 기차역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C.C.는 그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별이 조금 지지부진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썩 나쁘지 않을 결말이 될 것 같았다.

 

“줄리어스도 갈 거지?”

“…좋아.”

 

줄리어스는 한 박자 늦게 대답하며 스자쿠에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C.C.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어딘지 주눅이 들어보였다.

세 사람은 기차역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C.C.와 줄리어스가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고, 스자쿠가 택시기사 옆 조수석에 앉았다. 어디로 가시나요? 가까운 기차역으로 가주세요. 스자쿠는 그렇게 말하면서 백 미러로 뒤에 앉은 두 사람을 힐끔 쳐다보고서 쓴웃음을 지었다. 어딘지 모르게 싸우고 화해할 줄 모르는 두 아이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일지도. 택시기사는 말없는 세 손님을 태우고서 아직도 눈이 내리는 도로 위를 서행하며 나아갔다. 시간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느낌으로 스자쿠와 줄리어스, C.C.를 기차역으로 도착하게 만들었다.

기차역은 플랫폼이 하나 뿐인 아주 작은 역이었다. 표를 끊을 때, 역사의 사람은 흘러가는 말투로 눈발이 굵지는 않아서 기차를 타고 떠나는 데에 지장은 없다고 했다. C.C.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거 가져가.”

 

표를 끊고 돌아온 C.C.에게 스자쿠는 대뜸 자신이 들고 있던 짐을 내밀었다. 무거웠지만 아주 들지는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게 뭔데?”

“앞으로 필요할 물건들이야. 이것저것 급한대로 산 거야. 아, 그리고 돈도 줄게. 돈은 언제든 필요할 테니까.”

 

스자쿠는 지갑에서 현금을 몽땅 털어서 C.C.에게 주었다. 정말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C.C.가 얼떨결에 받은 돈을 들고서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그런 스자쿠의 뒤에서, 서너 걸음 뒤에 줄리어스가 서있었다. 그에게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내가 없어지고 나면, 너는 괜찮을까? 이번에도 쿠루루기 스자쿠가 너를 두고 떠나가진 않을까? C.C.는 줄리어스, 아니 를르슈를 걱정하는 자신의 마음이 우스워서 이내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아버렸다. 갑자기 웃는 C.C.의 모습에 스자쿠는 의아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말했다.

 

“그렇게 웃는 거야.”

“…….”

“웃으면서 떠나는 게, 훨씬 보기 좋잖아.”

 

스자쿠의 말에 C.C.는 웃고 있던 입꼬리가 떨렸다. 플랫폼에 곧 기차가 들어온다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삐익하고 울어대는 그 소리 사이로 C.C.가 조용히 말했다.

 

“난 너를 부러워했어, 쿠루루기 스자쿠.”

 

스자쿠는 이번에도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말을 들으며, 뭐든지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웃어줄 뿐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했으니까. 마리안느한테도, 를르슈한테도.”

“…….”

“내 차례가 올 거라고 믿었던 게 바보 같아.”

 

C.C.는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기차가 들어오면서 불어치는 바람과 함께 눈물이 흩어졌다. 우는 건 이제 지겨웠다. C.C.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줄리어스에게 손짓했다. 줄리어스는 시선이 마주치고 그녀의 흔드는 손을 보자 얌전히 C.C.의 앞으로 다가왔다. 방금 전까지 울었던 눈가가 붉은 줄리어스에게 C.C.는 손을 들었다. 찰싹, 하고 바람을 가르고 뺨을 내치는 소리가 들렸다.

뺨을 얻어 맞은 줄리어스는 당황한 눈으로 C.C.를 쳐다보았다. 옆에 있던 스자쿠는 ‘C.C.!’하고 그녀를 불렀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그저 C.C.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줄리어스에게 말해줄 뿐이었다.

 

“진작부터 이렇게 때려줬어야 했는데.”

“뭐?”

 

줄리어스가 황당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내면, C.C.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들어오는 기차에 올라탔다. C.C.는 스자쿠에게 받은 짐을 씩씩하게 움켜쥔 채로 승강구에 올라섰다. 그리고 줄리어스와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C.C.는 무언가 말하려고 하다가,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기차 안으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플랫폼에 있던 몇 없는 사람을 다 태운 기차는 떠나겠다고 기적 소리를 높게 울렸다.

C.C.에게 얻어맞은 뺨에 어이가 없던 줄리어스는 그런 그녀의 뒤를 시선으로 쫓다가 어느새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어떤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스자쿠가 아니었다. 자신과 똑같이 구겨진 셔츠 차림에, 자신과 똑같이, 똑같이 생긴 얼굴로 기차 안의 C.C.를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C.C., 미안해.”

 

울고 있던 그 남자가 하는 말은 사과였다. 줄리어스는 자신의 옆에서 울면서, 정작 들어야 할 당사자에게는 닿지도 않을 사과를 하는 남자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자신의 근간을 뒤흔들게 된 원인, 바로 이 남자가 를르슈였다. 자신과 똑같이 생겼으며, 사실상 줄리어스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를르슈는 우는 것에 정신이 없었다. 그런 를르슈의 옆에는 스자쿠가 서있었다. 스자쿠는 옆에 서있는 를르슈를 바라보다가, 줄리어스 쪽을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제 정말 끝이 오고 있어.”

 

스자쿠는 그렇게 말하며 줄리어스에게 손을 뻗었다. 줄리어스는 손을 내밀었다. 아니, 내밀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민 팔의 끝에는 손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희미한 연기처럼 남아버린, 손끝이라는 개념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울고 있는 를르슈와 떠나는 C.C., 그리고 끝이 오고 있다고 말하는 스자쿠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줄리어스의 의식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이 줄리어스의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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