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안 움직이면 부하들이 따르지 않는 법이지.”
“뭐야, 를르슈! 이런 수가 있다는 건 안 가르쳐줬잖아!”
“방금 전에 알려준 거에 또 응용을 한 것 뿐이야.”
“오라버니가 또 이기셨군요? 스자쿠 씨, 오라버니는 정말 강해요!”
“그러게 말이야. 진짜 한 번도 져주질 않네.”
스자쿠의 불만스러운 목소리에 나나리와 를르슈가 소리 높여서 웃었다. 두 남매가 웃는 소리에 스자쿠는 방금 전까지 를르슈에게 내리 10연패를 당한 것도 잊고서 같이 덩달아 웃었다.
체스판을 앞에 두고서 한참을 웃던 아이들은 나나리의 휠체어 옆에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체로 스자쿠의 투정 섞인 학교 이야기라던가, 그런 것에 충고하듯 잔소리를 덧붙이는 를르슈의 이야기였다. 중간중간 나나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선선한 바람이 부드럽게 세 사람 사이를 훑으며 지나갔다.
‘정말 그립군.’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 사이로 자신의 그림자가 조금이라도 비칠까, L.L.는 몸을 숨기고서 커다란 나무 뒤로 숨었다. 숨을 죽이고서 세 아이들이 도란도란 웃는 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왜 몇 번이고 이곳으로 도망치는 걸까.’
이 ‘장면’은 C의 세계에서, L.L.가 가장 많이 도망친 곳이었다.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그저 세 아이들이 웃으면서 시간을 보낼 뿐인 이 ‘장면’ 속에서 L.L.는 몇 번이고 숨어들고 그것을 훔쳐보았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때라는 것을 알고서도 그랬다.
장면이 끝나고 나면 L.L.는 다시 C의 세계로 돌아왔다. 언젠가 보았던 그 풍경대로, 를르슈의 흔적으로 만들어진 모든 장면들을 바라보며 L.L.는 누군가를 기다렸다.
* * *
“뭐라도 하고 있었나 싶었는데, 이런 곳에 있었구나.”
의자에 앉아있던 L.L.에게 C.C.가 다가왔다. C.C.는 를르슈의 기억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알고 있었던 를르슈보다 모르는 부분이 더 많았다는 것에 쓴웃음을 지었다.
“겁쟁이에게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곳이야.”
L.L.는 그렇게 말하며 C.C.에게 옆자리를 내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 어깨를 맞댄 채로 앉았다. 얼마나 오랜만에 사람의 체온을 느껴보는 것인지, C.C.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C.C.의 눈물에 L.L.는 평탄한 어조로 말했다.
“우는 것보다는 웃는 게 좋을 거야.”
“여자가 울면 달랠 생각도 없는 너에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나름 위로하는 말이었는데.”
“웃기지도 않아.”
C.C.는 자신의 앞에 놓인 를르슈의 기억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지르크스탄에서 L.L.가 되어 C.C.의 손을 잡아주었던 를르슈에게 자신은 이렇게 보이고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 네가 그랬을 때 저렇게 웃었구나.”
환하게 웃었어. 정말 행복해보여. C.C.는 중얼거리면서 L.L.의 어깨에 기댔다. L.L.는 낮게 웃으면서 C.C.에게 말했다.
“지금은 안 행복해?”
“그런 건 아니지만, 웃을 기분은 아니네.”
“그럼 곤란한데.”
“너도 내 약속을 지켜주지 않았으면서, 나만 네 약속을 지키는 건 좀 아니지 않아?”
L.L.는 그녀의 말에 그것도 그래, 라고 말하면서 더 이상의 대꾸를 하지 않았다. 눈앞의 장면은 C.C.의 웃는 얼굴로 멈춰있었다. C.C.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C.C.의 얼굴은 그 이후로 두세 번 정도 나왔지만, 방금 전처럼 환하게 웃거나 기뻐서 우는 모습은 없었다. 그녀는 괴로워 보이고 지쳐있었다. C.C.는 혀를 차면서 L.L.에게 말했다.
“넌 정말 최악이야, 를르슈.”
“아무래도, 를르슈 람페르지는 여자에게 좋은 남자는 아니었지.”
태연하게 대답하는 L.L.의 모습에 C.C.는 피식 웃었다.
“나를 좀 더 웃게 만들어주면 안 됐어? 솔직히 이런 얼굴로 기억되고 싶지 않아.”
“…….”
“지금이라도 웃게 만들란 말이야.”
“미안해.”
“마음에도 없는 사과는 필요 없어.”
C.C.는 다시 L.L.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녀의 무게는 점점 가벼워졌다. L.L.의 팔 끝에 자신의 팔을 엮으면서, C.C.는 L.L.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은 그녀가 필사적으로 매달려오는 것에 L.L.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사라지는 소리도 없이 점점 희미해지는 그녀의 무게를 견뎠다.
“무섭지 않은 건가, C.C.?”
“안 무서워. 그냥 미안할 뿐이야.”
“뭐가?”
“이대로 떠나는 게, 네게는 조금 미안해.”
C.C.는 다정하게 말했다. 다정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어딘가 멀게 느껴졌다. L.L.는 C.C.의 손을 잡아주면서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L.L.가 그녀의 손을 쥐었다고 생각한 부분이 사라져 허공을 움켜쥐고 있었고, C.C.는 그런 모습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사라지는 자신의 몸을 보면서 L.L.를 바라볼 뿐이었다.
“를르슈.”
그리고 그 이름으로 L.L.를 불렀다. L.L.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이 C.C.의 진짜 끝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어느 것 하나 놓쳐서 안되는 타이밍에서 무슨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는 L.L.에게 C.C.는 말했다.
“나, 지금 웃고 있어?”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는 C.C.의 모습은 웃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웃고 있다고 말해야 돼. L.L.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C.C.는 희미하게 웃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C.C.의 목소리는 완전히 멀어졌다. 어깨에 매달렸던 그녀의 무게는 한없이 가벼워졌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한 소녀의 영혼은 흔적도 없어졌다. L.L.는 C의 세계에서 떠도는 기억들 사이로 사라져버린 C.C.의 마지막 미소를 떠올렸다.
영원한 이별이었다.
* * *
를르슈 람페르지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남은 후회는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L.L.의 삶을 선택했다. 더 이상의 미련도, 마음도,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은 채로 살아가겠노라고 말하며 L.L.라는 이름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영겁의 시간 속에서 L.L.는 자신에게 모순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영원히 를르슈 람페르지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에 많은 시간을 썼다.
기적을 바라게 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희망을 원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바보 같은 남자였군,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줄리어스 킹슬레이는 L.L.의 기억들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휠체어를 탄 어린 소녀부터 쿠루루기 스자쿠의 어린 시절, 그리고 자신을 마녀라고 소개한 C.C.의 모습, 또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지나갔다. 줄리어스는 이것이 ‘를르슈’의 기억이며, 자신이 알 수 없었던 무언가의 공허함이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여태까지 세상으로부터 느껴지는 거리감에 대해서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나는 정말 ‘를르슈’였구나. 줄리어스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가장 마음이 가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파랗게 펼쳐진 한여름의 해바라기 밭이었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것이 어딘가 쓸쓸해보였다. 아마도 ‘를르슈’의 그림자겠지. 줄리어스는 손끝으로 그 액자에 담긴 풍경을 건드렸다.
그러면 스며들 듯 그때를 느낄 수 있었다.
습도가 높은 여름날의 공기, 뜨겁게 땅을 달구는 햇빛, 그리고 어딘가 익숙한 갈증이 줄리어스를 덮쳐왔다. 멀찍이 멀어지는 한 소년의 그림자가 보일 듯 말 듯 했다. 먼저 앞서가지 마. 나를 두고 가지 마.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을 정도로 목이 바짝 타들어갔다.
소년의 그림자는 멀어지는 줄 알았는데 가까워지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달려오는 소년은 누군가를 닮았다. 아니, 알고 있는 얼굴이다. 쿠루루기 스자쿠. 그다. 늘 미간을 찌푸리고 알 수 없는 분노를 삭히고 있는 그의 모습이 아니라, 어딘가 바보 같고 순진하면서도… 자신을 위해서 급하게 달려오는 다정함이 엿보이는, 아마 진짜 쿠루루기 스자쿠다.
그리고 쿠루루기 스자쿠가 이름을 부르려고 할 때, 줄리어스는 자리를 잃어버렸다. 그대로 튕겨나오듯, 흐려지는 해바라기 밭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줄리어스는 그제서야 자신이 ‘를르슈’의 그림자라고 생각했던 것이 쿠루루기 스자쿠의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구하러 언제든 달려오는 너를.
나를 포기하지 않았던 너에게.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는 꽤나 열렬하게 쿠루루기 스자쿠를 그리워했던 모양이었다. 줄리어스는 자신에게 남겨진, 어쩌면 떠넘겨진 것일지도 모를 를르슈의 흔적에 혀를 찼다.
‘그정도는 스스로 알아서 하란 말이다. 나 같이 아무것도 없는 빈 껍데기를 두고서 도망칠 게 아니라.’
이 많은 기억들 속에서, 줄리어스는 자신이 어느 한 부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를르슈’에게서 줄리어스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자신을 남기고 도망쳤을까.
정답은 간단했다. 그는 겁이 나서 그런 것이다. 홀로 남겨지게 될 그는 이제 어떤 것도 그리워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자신을 세워놓고서 이 끝을 맞이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계산 중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줄리어스에게도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남겨진 게 있다는 사실이었다.
호텔 카페테리아에서 C.C.와의 대화가 끝나고, 남겨지게 된 줄리어스는 자신을 두고 가는 그녀에게서 알 수 없는 미련과 죄책감을 느꼈다. 그런 것을 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해서 답답함에 눈물이 나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나를 두고 가지 마.
몇 번이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전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에, 스자쿠가 나타나서 C.C.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았냐고 그랬다. 그래서 그를 따라나섰다. 이윽고 두 손 가득 짐을 들고서 자신을 쳐다보는 C.C.의 시선 속에서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전하지 않으면 안될 말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해도 이제는 닿지 않아.”
줄리어스의 등 뒤에서,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늦은 거야.”
줄리어스는 그가 바로 를르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를르슈는 줄리어스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줄리어스의 옆에 다가온 를르슈는 줄리어스가 바라보고 있었던 해바라기 밭의 풍경을 보면서 말했다.
“결국 여기에는 나나리를 데리고 가지 못했어. 전쟁이 터졌거든.”
줄리어스는 를르슈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를르슈는 ‘조금 걸을까?’라고 말했다. 수많은 기억들이 더 스쳐지나갔고, 줄리어스가 보았던 해바라기 밭은 저 멀리로 사라졌다.
하지만 아쉽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풍경과 기억 속을 거닐면서 어디론가 향했다. 어느 갈림길의 중간에서, 줄리어스는 앞서가는 를르슈의 등을 보며 말했다.
“이제 여기에 나를 두고, 너는 다시 돌아갈 생각인가?”
줄리어스는 이 알 수 없는 기억의 세계 속에 자신이 홀로 남겨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는 이곳을 나가기 위해서 자신을 그 대가로 불러낸 것이라고.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현실의 를르슈가 이곳으로 숨어들고 줄리어스를 채웠던 것처럼.
줄리어스의 말에 한동안 말이 없던 를르슈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바로 아니라고 부정했다.
“하하, 그러지는 않아. 그러려고 널 만난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내가 널 여기로 부른 것도 아니야.”
“그럼 왜 나를 불렀어?”
“부른 게 아니라, 너도 여기에 있어야 할 존재일 뿐이야.”
를르슈는 줄리어스에게 텅 비어있는 액자를 내밀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액자에는 희미하게 무언가가 비춰지기 시작했다. 물을 잔뜩 머금은 수채화 같기도 하면서도 형태를 잡아가는 무언가는 줄리어스가 곧잘 하고 다니던 안대가 되었다. 그것은 줄리어스와 를르슈를 갈라내는 단 하나의 물건이었다.
줄리어스의 흔적을 남기는 를르슈의 표정은 유쾌해보였다. 그는 비밀을 말해주고 싶어서 안달난 아이처럼 줄리어스에게 마구 설명했다.
“내가 너이고, 또 네가 나인데 이런 거 하나 쯤은 있어줘야 하지 않겠어? 아무리 기어스로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너에게도 있었잖아. 전하지 못한 말이라던가, 그런 것들.”
“…….”
“나는 너무 많았는데, 너라고 없진 않았을 거 아니야?”
“그래?”
줄리어스는 자신이 있는 쪽의 갈림길이 어딘가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를르슈는 그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줄리어스만이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섭고 막막하다는 느낌보다는 아늑하게 느껴지는 어둠 같은 것이었다. 마치 그 해바라기 밭의 풍경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그런 건 나한테는 없는 것 같군.”
줄리어스는 를르슈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전했다. 나한테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줄리어스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를르슈는 납득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줄리어스를 바라보았다. 줄리어스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무너지는 길의 끝자락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두려운 것은, 오히려 이렇게 남겨지고서 아무것도 전하지 못한 채로 남겨지는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이다.
“전하지 못하는 것들에 미련을 두고 싶진 않아. 그건 그것대로 나를 만들어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됐거든.”
“…….”
를르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줄리어스를 바라보았다. 줄리어스는 다시 한 걸음 뒤로 뒷걸음질을 했다. 점점 어둡게 줄리어스의 얼굴에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를르슈는 그가 곧 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다급한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난 두렵지 않아.”
“…….”
“남겨지는 것도, 남기고 가는 것도.”
“…….”
“너랑은 달라.”
이번엔 줄리어스가 웃을 차례였다. 그는 호쾌하게 웃으면서 를르슈에게 말했다.
“왜냐면, 난 원래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네 덕분에 많은 것을 가지고 갈 수 있게 되었고, 그걸로 이제 미련은 없어.”
그렇게 어둠의 장막이 깊숙하게 내리고, 그 뒤로 줄리어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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