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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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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 than Zero

DOZI 2024.06.25 21:03 read.112 /

 

 흘러넘치는 마음을 어떻게 다잡을 수 있을까?

 밀어내고 닫아도 소용이 없는 이 마음을 어디로 흘려보내야 할까?

 그러면 나아질까?

이제는 기억도 안 날 정도로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옛날에 느낀 감정에 지금도 휘둘리고 있다면 너는 뭐라고 할까?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장난스럽게, 별 것 아닌 것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면 마음이 좀 편해질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도 그러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나의 욕심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나의 마음을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되는 순간 스스로를 부정하게 될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그렇게 말하게 되는 순간에 나는 무너지겠지.

그렇다고 너에게 이 마음을 드러내기도 싫다. 나의 욕심 때문에 너를 무너뜨릴 순 없으니. 그렇다면 이 마음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답을 찾을 때까지 계속해서 침묵할 나의 마음을, 너는 가엾게 여겨줄 지도 모른다.

 

 * * *

 

쿠루루기 스자쿠는 사랑에 빠진지 오래였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스스로 새길 때마다, 스자쿠는 누군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도 아닌데도 부끄러웠다. 그래서 그는 최대한 아무도 없을 때 자기 사랑을 떠올렸다. 그 과정이 아주 비밀스럽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무도 그가 사랑에 빠진 걸 몰랐다. 심지어 스자쿠의 사랑을 받는 그 상대조차, 자기가 그렇게까지 열렬한 사랑의 주인공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스자쿠는 무언가를 좋아할 때면 매번 열렬하게 그것에 반해있음을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음식은 삼시 세끼 일주일 내내 먹어도 질리지 않아하며, 이게 얼마나 맛있는지 주변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녔다. 좋아하는 게임이 있으면 사흘 밤낮을 밤새워가며 플레이했다. 운동에 한창 빠져 살았을 때는 컨디션 관리를 못할 정도로 몰두했다. 그러다보니 다들 스자쿠가 뭘 좋아하게 되면 모두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스자쿠가 요새 빠져있는 건 그거구나. 그를 아는 사람들이 알아차릴 정도로 스자쿠는 좋아하는 걸 아낌없이 표현했다.

그렇지만 사랑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드러냈다가는 그대로 부서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스자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무언가의 방어 기제가 발동했다. 좋아하는 것 앞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 성격이 우습게도 사랑 앞에서는 그렇게 변한 것이다. 스자쿠는 철저하게 자기 사랑을 감추었다.

사랑을 숨기는 건 쉬운 일이었다. 누군가는 비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내 마음인걸. 스자쿠는 그렇게 정당방위를 내세웠다. 사랑은 방향성을 가진 감정이기에, 감정이 지향하는 방향만 감추면 다들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을 이용한 건 나빴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스자쿠는 그런 비겁한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사랑을 감추고 싶었다.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지 닿을 수 있다.

사랑하는 상대는 줄곧 함께였기에, 함께 하지 않을 때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고,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철저하게 숨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까운 거리만큼 등을 돌리면 가장 멀게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몇 번이고,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길 바랐던 때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상처를 받는 건 스자쿠 자신임을 깨달았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처받는 건 너무 슬퍼.

슬퍼하지 않을 방법은 사랑을 끝내는 방법 밖에 없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으면서 스자쿠는 아직까지도 사랑에 빠져있었다. 그것도 오랫동안 그 사랑에 허덕이고 있었다. 처음엔 마음이 뻐근할 정도로 아팠지만, 이제는 그 뻐근함마저도 일상적으로 느껴졌다. 사랑이 일상에 녹아든 것은 아주 위험했지만, 동시에 행복한 일이었다.

이런 마음을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까? 들키면 속이 후련해질지는 몰라도, 드러나는 순간의 고통을 견딜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를르슈를 좋아해. 

너의 손이 다른 사람에게 닿는 건 상상하기도 싫어. 너를 알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싫어. 네가 사람들 사이에서 웃는 얼굴은 보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그 사이에서 가장 빛나는 너를 보고 있으면 더 좋아져. 어떻게 하면 좋을까? 네가 나를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생각해줄 때면 그 마음이 나와 같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나의 이기적인 마음을 너는 어떻게 생각할까? 사람들에게 상냥한 너는 어쩔 수 없이 받아줄 지도 모르지. 거기에 기대버린 나는 한정 없이 무너질 거야. 그런 나에게 너는 질려서 떠날지도 모른다. 너의 다정함과 상냥함에 기대는 건 정말 비겁한 일이지. 너는 상처 주는 걸 싫어하니까.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너는 좋아한다고 말해줄 거야. 그거에 만족할 수 있다고 거짓말한 나는 계속해서 더 욕심을 낼 거고.

그러니 말하지 않아. 말하면 안 돼. 앞으로도 함께 하고 싶으니까.

 

스자쿠는 그렇게 다짐한 터였다. 함께하기 위해서 스자쿠가 선택한 방법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아주 이상적인 대책이었다. 긴 시간동안 앞으로 계속 함께한다면 사랑을 숨기는 것에도 능숙해질 것이고 그렇다면 앞으로도 슬플 일은 조금씩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방금 전 를르슈의 통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자꾸 다시 말하게 하지 마. 한 번에 알아 들으라고.”

“그, 그렇지만 너무 뜬금없지 않아?”

“예전부터 준비한 일이라서 뜬금없는 건 아니야.”

“뭐?”

“원래부터 성인이 되면 브리타니아로 돌아가기로 했었고, 애초에 잠깐이었던 일본 유학이 예상보다 길어진 것뿐이다.”

 

준비해온 샌드위치를 다 먹은 를르슈는 스자쿠의 멈춘 젓가락질을 보고서 빨리 먹으라고 재촉했다. 먹는 것에는 어지간히 속도가 빠른 스자쿠는 밥알을 세듯이 느릿하게 식사를 이어갔다. 무슨 말을 들었더라. 아니,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스자쿠는 고민했다.

스자쿠와 를르슈가 다니고 있는 애쉬포드 학원은 고등부까지 있었고, 두 사람은 지금 학원에서의 마지막 1년인 고등부 3학년 생활을 하고 있었다. 대학 진학을 위해서 진로 상담이 한창인 와중에 어느 전공으로 갈 것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그렇게 되었다.

스자쿠가 먼저 상담을 받았기 때문에 그 결과에 대해서 떠들던 중이었다. 보호자로 온 아버지와 담임선생님, 그리고 스자쿠 세 명이서 했던 삼자대면의 결과로 도쿄에 있는 대학 중에 정치학부로 진학을 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이 되어서, 사실 정치는 별로인데 딱히 해보고 싶은 것도 없어서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고 를르슈는 어떻게 할지. 그걸 물어보고 있었다.

 

“스자쿠.”

“……응?”

“내가 브리타니아로 돌아가는 게 그렇게 의외인가?”

 

를르슈는 스자쿠의 입술에 붙은 밥풀을 떼어내며 물었다. 칠칠맞게 묻히고 먹지 마. 를르슈의 잔소리는 들릴 듯 말 듯했다. 의외냐는 말에 스자쿠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를르슈, 브리타니아에 가는 거 별로 안 좋아했잖아.”

 

거의 10년 넘게 함께 했던 그 시간동안 를르슈는 브리타니아에 가는 걸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방학 때마다 일주일 정도, 를르슈와 그의 동생들은 브리타니아에 있는 아버지네 집에서 지냈다. 일 년 중에 보름 정도 브리타니아에서 지냈는데, 그 짧은 시간에도 를르슈는 떠나기 전날 밤마다 스자쿠 앞에서 울상을 지었다.

를르슈네 가족은 꽤나 복잡한 가정사가 얽혀있었다. 가진 것이 많은 집안이 어딜 가나 그러하듯, 가족들끼리 재산다툼은 물론이고, 를르슈의 아버지는 이혼과 재혼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인지라 꼬여있는 관계가 남들보다 더했다. 를르슈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지금껏 교제해왔던 다른 부인들에 비하면 평범하고 수수했지만, 그랬기 때문에 더 피곤한 일이 많았다고 했다.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나서, 를르슈와 동생들은 어머니 쪽 성인 람페르지로 완전히 이름을 바꾸었음에도 아버지는 방학 때마다 를르슈네 가족들을 브리타니아로 초대했다.

스자쿠가 를르슈에게 아버지 쪽 친척들이나, 이복형제들한테 해코지를 당하냐고 물으면, 를르슈는 그건 아니라고 대답했다. 오히려 를르슈는 복잡한 가족관계도 안에서도 이복형제들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를르슈는 브리타니아로 돌아가는 것을 늘 꺼려했다.

 

“이젠 어렸을 때랑 상황이 완전히 다르니까, 싫다고 해서 언제까지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를르슈는 브리타니아로 돌아가는 걸 이제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스자쿠는 도시락의 반찬들을 꾸역꾸역 먹어치웠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기계적으로 씹어 삼키는 과정에 맛이 느껴질 리가 만무했다.

 

그렇구나. 를르슈는 떠나는구나.

 

스자쿠가 이해한 것은 그게 고작이었다. 를르슈는 들고 왔던 책을 읽으면서 독서에 빠져들었다. 더는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스자쿠가 물어보면 대답해 줄 지도 모른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옆모습을 시선으로 좇았다. 물어보면 듣고 싶었던 답을 내줄까? 장담할 수 없다. 그건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를르슈가 브리타니아로 돌아가면, 로로랑 나나리는?”

 

묻고 싶은 진짜 질문 보다는 차선책을 던져본다. 로로와 나나리는 를르슈가 끔찍하게 아끼는 쌍둥이 동생들이었다. 어머니가 해외 출장으로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지면서, 삼남매는 서로에게 애틋한 정도가 보통의 남매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각별했다.

 

“로로랑 나나리는 애쉬포드에서 학업을 마쳐야지.”

“를르슈랑 같이 안 가?”

“함께 가면 좋겠지만, 두 사람한테도 생활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렇구나. 스자쿠는 더 이상 입맛이 돌지 않았다. 반 정도 남은 도시락의 뚜껑을 덮었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할지 몰랐다.

 

“로로랑 나나리가 많이 섭섭하겠다.”

“방학 중에는 언제든 만날 수 있어.”

“둘 다 를르슈가 브리타니아에 가는 건 알아?”

“응. 예전부터 자주 나왔던 이야기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모양이더라고.”

“…….”

 

예전부터 자주 나왔던 이야기이고, 로로와 나나리가 알 정도인데 스자쿠만 몰랐다. 괜히 분한 마음에 스자쿠는 한숨도 쉬지 못했다. 더 물어보는 것 대신에 완전한 침묵을 선택한 스자쿠는 를르슈의 기색을 살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마음을 쓰고 있는 건 항상 스자쿠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를르슈가 이렇게 무신경하게 헤어짐에 대해 이야기를 할 리가 없었다. 스자쿠에게 조금이라도 언질을 주었다면 상처는 크게 느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통보였다.

항상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순전히 내 욕심이었네.

 

“있잖아, 를르슈.”

 

생각을 하기도 전에 열리는 입에서는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울리는 경보음이 그것만큼은 안 된다고 스자쿠의 혀를 묶었다. 책에서 시선을 뗀 를르슈가 스자쿠를 빤히 쳐다보았다. 

 

말하면 안 돼. 말해선 안 돼! 를르슈는 몰라야 돼!

 그렇지만, 지금 여기서 말하지 않으면, 이대로.

 

“아. 예비령이다, 스자쿠.”

 

스자쿠의 몸이 긴장으로 순식간에 굳어버린 와중에 예비령이 요란하게 울렸다. 정신 사납게 울리는 예비령의 멜로디에 스자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말하지 않아서 다행인가? 하지만 이제 말할 수 없을 만큼 먼 곳으로 를르슈가 떠나버릴 지도 모르는데. 그럼 말해도 되지 않아? 어차피 만나지 못하게 될 테니까.

그런 생각을 멈추게 된 건, 가슴이 아파서였다. 이제까지 마음이라는 추상적인 기관에 오던 가상의 통증이, 스자쿠의 신체 안에서 실재하는 고통으로 나타난 것은 처음이었다. 눈물이 날 것만큼 아파서 스자쿠는 숨을 멈추었다. 몸이 딱딱하게 굳어서 움직일 생각을 않자 를르슈가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르는데.

 

“를르슈,”

“왜?”

“…수업 잘 들어. 졸지 말고.”

 

 그러나 아주 오래 전부터 숨겨왔기에 드러내는 법을 이젠 잊어버렸다. 스자쿠의 말에 실없는 소리를 한다며 를르슈는 웃었다. 그 웃는 얼굴에 스자쿠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 *

 

저를 따라오겠다는 말도 하지 않는 스자쿠가 미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반이 다르기 때문에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 학생회실에서 잠깐 보는 것 말고는 이제 마주칠 일이 없기에, 오늘 학교에서 얼굴 보는 건 점심시간인 방금까지가 전부일 지도 모른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벤트를 좋아하는 학생회장인 미레이가 있었기에 방과 후에 거의 매일 마주치는 것이 일상이었으나, 미레이는 졸업했고, 학생회장으로 취임한 리발은 수험이니 입시니 하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며 예년만큼 크게 이벤트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부회장인 를르슈가 마음만 먹으면 해낼 수 있는 일들이 있긴 했으나, 어느 한편으로 마음이 기운 이후로 그 이전만큼의 활기를 되찾기는 어려웠다.

학생회의 다른 사람들은 달라진 분위기에 아쉬워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다들 학생회실에서 모여서 노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까.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마지막인 만큼 필사적일 수밖에 없을 일들이 가득했다.

 

이걸로 스자쿠와 함께 하는 생활도 끝이다.

 

스스로 끝이라고 생각한 일들과 다르게, 를르슈는 스자쿠에 한해서는 늘 그 다음과 그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제껏 함께 했던 습관의 관성 같은 것이었다.

를르슈에게 있어 스자쿠는 특별했다. 스자쿠는 항상 끝나지 않은 연장선을 그리는 사람이었고, 언제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는 혜성처럼 빙글빙글 를르슈의 주변을 맴돌았다. 무언가로 정의를 할 수 가 없었다. 를르슈의 인간관계는 늘 철저하게 정의되었고, 그것은 완벽하고 완결된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부모님, 동생들, 이복형제들, 친척들, 그 외의 어른들. 를르슈의 행동노선이 정해진 사람들과 다르게 스자쿠는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랐다. 그것은 늘 를르슈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스자쿠가 언제까지 를르슈의 옆에 있어줄지 알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함께할 수 있을까? 스자쿠는 언제 나를 떠날까? 

이혼 후에 어머니가 도피처로 선택한 곳은 일본이었다. 어머니의 타의에 의해, 어떤 연고도 없는 일본에 동생들과 함께 떨어진 를르슈는 일본에서의 생활이 빨리 끝나길 바랐다. 비록 어머니의 성을 쓰고, 아버지와 혈연적인 관계로만 남았을 뿐이지만 브리타니아에는 소중한 것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자식들을 희생시킨 것을 미안해했다. 그렇기에 일본 생활은 일 년 안에 마무리 될 예정이었을 것이다.

그 모든 예정을 포기하게 만든 것은 스자쿠 때문이었다. 우연히 옆집에 살게 되어 인연이 되었다. 동생들을 싸고 도는 를르슈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은 스자쿠가 처음이었고, 그 싸움 이후에 화해를 먼저 청한 것도 스자쿠가 처음이었다. 예측을 할 수 없는 속도로 들이닥치는 스자쿠에게 를르슈가 면역이 있을 리가 없었다.

처음은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스자쿠는 를르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준 타인이었다. 항상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진 를르슈를 제대로 봐준 사람은 한 명도 없었기에, 그 최초의 타이틀을 스자쿠가 가져간 것이다. 처음의 경험만 특별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를르슈의 세계가 서서히 넓어지면 그 처음의 강렬함은 희미해질 것이다. 

애쉬포드 학원에 입학하고, 친구들을 사귀고, 관계를 형성해나가면서 를르슈는 스자쿠를 계속 찾아다녔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면 피하게 되었다. 스스로도 왜 그런지 몰라서 당황하고 있을 때, 스자쿠가 먼저 다가와 주면 기뻤다. 그 기쁜 마음이 점점 커져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입 밖으로 어떻게 소리조차 낼 수 없을 만큼이 되었을 때, 를르슈는 깨달았다. 

를르슈에게 스자쿠는 특별했다. 그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처음으로 브리타니아에서 돌아오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동생들을 생각하면 를르슈는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스자쿠의 등장만으로도 동생들은 괴로워했으니까. 서로를 타인과 공유하는 걸 어지간히 싫어하는 동생들을 배려했다면 를르슈는 브리타니아로 바로 귀국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에 잔류하는 걸 선택한 것은 를르슈가 처음 부린 억지였다.

전화기 너머로 유피가 보고 싶다고 칭얼거리는 소리에도 를르슈는 일본에서 공부를 다 하고 가겠다고 말했다. 브리타니아에서도 공부는 할 수 있다구요, 를르슈! 유피가 삐져서 한 달 가까이 전화가 없었어도 를르슈가 그렇게 슬프지 않았던 이유는 스자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스자쿠랑 같이 있어서 채워지는 건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 감정은 소중했다.

얼마나 소중했냐면, 로로와 나나리가 다른 가족들이 보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영영 일본에 남아버렸을 정도로 소중했다. 동생들이 외롭지 않게 브리타니아로 돌아가는 방학이 올 때면 를르슈는 불안했다. 

다시 돌아와도 스자쿠가 있을까?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스자쿠는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을 만들면 어떡하지? 만약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고르는 스자쿠를 잡을 수 없게 된다면.

그러한 생각에 떠나기 전날 밤까지 불안해하고, 돌아오는 날까지 불안해했다. 다행히도 스자쿠는 를르슈와 계속 함께 해주었다. 그건 행운이었다. 스자쿠의 사람 좋은 면을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렇게라도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더 욕심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 더는 욕심내지 않아. 딱 여기까지가 적정선이다.

그럼에도 스자쿠가 조금씩 멀어질 때면 초조했다. 스자쿠는 자기 의지대로 사람을 사귈 수 있는 사람이고, 사랑을 선택할 수 있다. 그것에 대해 를르슈가 관여할 수는 없었다. 그와는 어렸을 때부터 옆집에 살았던 소꿉친구인 관계가 전부였고, 를르슈는 그 이상으로 욕심내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했다. 

다짐과 다르게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스자쿠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모습을 볼 때면 괴롭고, 스자쿠의 다정한 면을 사람들이 알아갈수록 슬퍼졌다. 그가 인정받아가는 모습을 볼 때면, 스자쿠는 를르슈가 없어도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실감할 때면 더욱 그러했다. 그러한 감정에 의해 마음 한켠이 무너져가는 걸 내버려둘 순 없어서, 를르슈는 특단의 대책을 세웠다.

“브리타니아로 돌아간다고? 그럼 제국대학 쪽으로 진학하겠구나. 하긴, 아버지가 그쪽에 계신다고 했지. 가족들끼리는 이미 다 이야기는 했고?”

“네, 그렇습니다.”

“그렇군. 람페르지는 동생들이랑 떨어져 지낼 수 있겠어?”

 

교내에서 이미 소문이 자자한 를르슈의 동생 사랑은 새로운 담임선생님도 아는 모양이었다. 를르슈는 어른들에게 신뢰를 주는 미소를 지었다. 멋들어진 미소로 진로 상담은 마무리가 되었다.

를르슈가 동생들을 자기 욕심 때문에 상처를 주는 건 두 번째였다. 나는 정말 제멋대로에, 엉망진창이군. 홀로 귀국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을 때 로로와 나나리는 눈물을 그칠 줄 몰랐다. 나도 갈래, 형. 저도 따라갈게요, 오라버니. 그런 두 사람을 달래고 달래서 일본에 남게 했다. 한 번 시작한 곳에서 끝을 보는 것이 좋다. 그건 를르슈가 내세울 수 있는 허울 좋은 변명이었다. 

로로와 나나리를 울게 만들 정도로 충격적인 를르슈의 귀국은 스자쿠에게 어떤 의미가 될 것인지, 를르슈는 예측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철저하게 계산하여 손해를 보지 않고 이익을 쟁취하는 를르슈는 스자쿠에 한해서는 늘 손익을 따질 수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다 합쳐서 제로였다. 

그런 스자쿠에게 브리타니아 귀국 소식을 들려주면, 스자쿠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함께해줄 것인가. 아니면……를르슈보다 더 가까운, 그 이상의 사람을 찾아내서 빈자리를 채워버릴 것인가.

마음속으로 도박을 한 것이다. 결국 를르슈는 보기 좋게 져버렸지만. 딱히 누군가와 한 내기는 아니었지만, 마음을 잃었다. 를르슈의 마지막으로 남은 카드는 일본에 남아있을 로로와 나나리였다. 다정한 스자쿠는 두 사람을 계속 신경써줄 것이다. 그러면 스자쿠는 를르슈를 잊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잊지 않으면 돼, 스자쿠.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만큼, 눈에서 보이지 않으면 가려질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치졸한 나의 사랑에는 그거로 충분하다. 충분하다 못해, 차고도 넘친다.

 

* * *

 

앞으로 남아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는 그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정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마음을 감추면 늘 다를 것 없는 일상이 평온하게 이어진다는 믿음이 있어서 그랬을 지도 모른다. 

대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이 되면 원서 접수나, 센터시험까지의 날짜를 손꼽아 세는 것도 를르슈와 함께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같은 대학교를 갈 것이고, 전공은 다를 순 있어도 서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분야에서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지낼 수 있을 거고, 대학생이 되었으니 여행을 멀리, 그리고 길게 떠날 수도 있겠다. 를르슈는 로로와 나나리 걱정에 일본 밖은 무리일지도. 그렇지만 같이 있을 테니까, 해외로 못나가는 아쉬운 마음은 반반씩 나눠 가지면 덜 슬플 것이다. 어쩌면 일본에서 노는 게 더 재미있을 지도.

전부 스자쿠만 기대했던 미래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도, 스자쿠는 습관적으로 를르슈와 함께 있는 자기 자신을 떠올렸다. 이젠 의미 없지, 그런 상상. 손 안의 샤프를 고쳐 쥐며, 스자쿠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와 씨름했다.

를르슈는 내일 브리타니아로 떠난다. 브리타니아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을 갈 것이고, 아버지가 사는 저택에서 통학을 하며 그 쪽의 대학교로 진학할 것이다. 비상한 머리를 타고난 를르슈에게 일본이든 브리타니아든 시험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공석이 되는 학생회 부회장 자리에는 스자쿠가 들어갈 것이다. 를르슈는 브리타니아로 돌아갈 날을 기다린 사람처럼 준비를 했다. 매사에 준비가 철저한 를르슈는 떠나기 직전까지 완벽했다. 어제는 학생회 사람들끼리 조금 이른 송별회를 했다.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로로와 나나리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에게는 스자쿠의 말을 꼭 잘 들으라고 당부했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리던 쌍둥이는 를르슈가 애쉬포드 학원에서 마지막으로 구운 케이크의 등장에 결국 울어버렸다.

스자쿠는 를르슈가 갑자기 브리타니아로 떠나는 이유를 모른다. 아마 예전부터 준비한 듯 했고, 그걸 스자쿠가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늘 같이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의논해줬으면 기분이 좀 나아졌을까.

를르슈의 마음에 스자쿠는 들어갈 수 없다. 아주 당연한 사실임에도 그것이 가끔은 속상했다. 마음속에 들어간다면 물어보진 않아도 왜 떠나는지 알아볼 수는 있을 텐데. 마지막까지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를 한참을 노려보다가, 스자쿠는 문제집을 덮어버렸다. 공부할 기분이 아니었다. 어떤 것도 정리가 안 되어있는데 끝이 날 지경에 공부라니.

계절이 추워지면서 날은 짧아졌다. 노을 진 하늘은 한참 전에 까맣게 물이 들었고, 스자쿠는 열어둔 창으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는 것에 창문을 닫으러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스자쿠의 집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를르슈를 발견했다. 를르슈는 스자쿠가 있는 방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고, 타이밍 좋게 스자쿠가 나타난 것이었다.

어떻게 할지 몰라서 우선 하던 대로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가로등 아래에서 를르슈가 희미하게 웃는 것이 보였다. 그 얼굴에 스자쿠는 계단이 부서져라 빠르게 내려갔다. 를르슈는 바로 나타난 스자쿠를 바라보기만 했다.

침묵은 늘 스자쿠의 마음을 숨겨주었지만, 이제 마지막이 될 오늘까지 침묵을 지켜야할까? 

 

“를르슈, 내일 새벽에 나가야하지 않아?”

“응. 그렇지.”

“그럼 들어가서 빨리 자야지. 애들도 걱정하겠다.”

“……스자쿠.”

 

옛날부터 를르슈는 브리타니아로 떠나기 전날 밤에는 스자쿠와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일본에 빨리 돌아올 테니 뭘 하고 놀지 계획을 세워두라는 를르슈의 잔소리, 그리고 브리타니아에 가면 내 선물 좀 사오라고 하는 스자쿠의 투정이었다. 지금도 그런 대화를 나눠도 되는 걸까?

 

“스자쿠한테 계속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

 

를르슈의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스자쿠는 평소보다 밝게 빛나는 그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눈을 맞추게 되면 어떻게 안녕을 나눠야하는지 모른다. 지금은 예전과 다르다고 한 를르슈는 브리타니아로 돌아가는 선택을 했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사람이었다.

 

“뭔데?”

 

를르슈는 시선을 맞추지 않는 스자쿠를 탓하지 않았다. 다그쳐서 자기 좀 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차분하게 가라앉는 분위기 속에서 를르슈가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

 

스자쿠가 고개를 들어 를르슈를 쳐다보았을 때, 를르슈의 고개는 아래로 떨구어져 있었다. 주먹을 움켜쥔 를르슈의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무엇이 를르슈를 그렇게 떨게 만드는지, 스자쿠는 모른다. 

어쩌면 지금이 뭐라도 말을 할 수 있는 때인지도 모른다. 왜 나를 두고 브리타니아로 가냐고 화라도 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를르슈가 지금 와서 스자쿠에게 계속 하고 싶었던 말을 하려고 하는 것처럼.

 

“나 수업시간에 한 번도 안 졸았어.”

“…내가 먼저 걸려서 선생님한테 혼나고 있으면, 그때 잠 깼으면서 거짓말 하지 마.”

“거짓말은 네가 혼자 걸린 게 억울하니까 나도 졸았다고 물고 넘어질 때 하는 거고.”

 

두 사람은 앞으로도 전할 일이 없을 말들을 손조차 닿지 않을 깊숙한 곳에 박아두면서, 숨기면 숨길수록 커졌던 사랑 같은 것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리게 만들 것 같은 와중에도, 그것이 서로를 위한 최선이라는 가식적인 위로를 했다.